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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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성공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중 비야님의 이야기만큼 재밌고 신나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두 분 중에 한 분이시고 많은 사람들의 롤 모델이시고 베스트셀러 작가이시고 그렇습니다. 대략 4년의 한 번을 주기로 비야님의 신간이 나옵니다. 책이 나올 때마다 비야님은 변신을 하거나 변신 중이거나 무언가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비야님 삶을 관통하는 주제는 여전히 "연대"입니다만 한 번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어요. 그만큼 다채로운 인생을 살고 계시죠. 비야님 인생 면면을 들여다보면 무릎팍 도사에 나왔던 안철수님의 삶과 유사해 보입니다.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을 선택하며 살아온 건 아니지만 뭔가를 이뤘을 때 다른 일에 도전하는 건 비슷해 보여요. 또한 선택한 일들이 '나'를 위함이 아닌 '우리'를 위함이라는 것들도 그렇구요.

 책을 읽으면서 항상 자극을 받습니다. 삶 자체가 워낙에 자극(?)적이기도 하시고 follow your heart를 적극 실천하고 계시니까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이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사막의 낙타인지 숲 속의 호랑이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구요.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서 잉여인간 놀이나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해주셨어요. 혹시나 너무 피곤해서 하늘이 노래질 때 그건 사랑이었네를 들춰보겠습니다.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열심히 해본 게 언제적 이야기인가요. -_-


지난번의 책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처럼 일단 대여섯 권을 사서 쟁여놨습니다. 후에 지인들 생일을 챙기거나 선물 줘야할 일이 있을 때 요긴하게 쓰이겠지요. 지도-는 너무 많이 뿌려서 더 이상 뿌릴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뿌렸습니다. 아마 그건 사랑이었네도 그렇게 되겠지요. 나중에 또 다른 신간이 나올 때쯤엔 저도 웃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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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종말
제프리 삭스 지음, 김현구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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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선 하루에 대략 2만 명의 사람이 절대적 빈곤으로 죽어간다. 2만 명이면 내가 살던 고향에선 인구의 1/10 수준이고, 제법 규모가 있는 대학 한 개에 다니는 사람 수이다. 말이 좋아 2만 명이지 규모를 추산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빈곤으로 죽어가고 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지구 한편에선 기아로 죽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또 다른 한편에선 비만으로 인해 각종 질병이 발생한다. 문제는 생산이 아닌 분배다.

 각 나라가 겪는 빈곤의 원인은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서 한, 두 가지 매뉴얼을 통해 빈곤의 원인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제프리 삭스가 제시하는 체크 포인트를 통해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한 후 임상경제학의 관점에서 빈곤을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 문제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생명체처럼 모든 관계가 역학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까지 빈곤을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들은 경제 문제를 기계적인 것으로 치부하였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임상경제학은 이러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경제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경제학이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인 학문이라고 쓰여있지만 사고의 전환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나라의 지리적 위치가 빈곤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것은 책을 통해 배웠다. 정부의 무능이나 부패, 잘못된 풍습으로 인한 남녀차별, 적절한 교육의 부재로 인한 가난의 대물림도 빈곤의 대표적 원인 중 하나다. 이러한 빈곤 탈출을 위해 기본적인 공공 인프라 구축과 교육이 필요하다. 가난한 나라는 스스로 이런 정책을 펼 능력이 없으므로 다른 나라의 원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원조는 help의 개념에서 이해되면 안 된다. 지금껏 부국은 빈국을 착취하는 형식으로 전체의 부를 증가시켰다. 잘못 지속되어온 부의 편중을 해결한다는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 잘 사는 나라에서 못 사는 나라를 도와준다는 생각으론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안타까웠던 사실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해방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도움을 주기는커녕 빈곤의 상태를 지속시키는 게 자국에 유리하면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부패한 정권을 유지시킨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기자 2명의 목숨은 매일 죽어가는 2만 명의 삶보다 우월한 것인가. 그 기자들은 클린턴의 방북으로 생명을 건졌지만 빈국의 사람들은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 "아직도 이 세상에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곤의 문제는 관심으로 해결할 수 있다.

 빈곤의 종말에서 내가 체내화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국제구호나 경제학에 식견이 없는 나로선 그냥 그렇구나- 수준의 책 읽기였다. 두꺼운 책 두께에 압도당하기도 했고 처음부터 정독하려니 쉽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부분은 정독하고 그렇지 않은 사례들은 빨리 넘겼다. 다 읽고 <그라민 은행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빈곤의 종말이 좀 더 거시적 측면에서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었다면 그라민-은 미시적 측면의 해결책 이었다. 쨌든 두 책에서 내리는 결론은 같다. "물고기를 잡아 주는 방법으로는 빈곤을 해결할 수 없다, 그들에게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고 낚시를 할 '최소한의 도구'를 지급해주자." 지구가 착한 쪽으로 발전하고 있느냐?란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런 노력들로 적어도 굶어 죽거나 치료약이 개발된 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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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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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려고 맘먹은 리뷰는 되도록이면 바로 쓰는 게 여러 모로 좋은데 요즘은 그러지 못한다. 책 읽을 당시 느끼던 생생한 감정들은 휘발성으로 이루어져있는 건지 모두 날아가 버리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끼적여놨던 메모들만 한 줄씩 남아있다. 그 메모를 보고 감정을 되살려서 독후감을 쓰고 있다. 내가 내 감정을 돌이켜 추측(?)하는 상황이라니- 아이러니하다. 보통 고전은 지루하고 내용을 알 수 없거나, 환상적으로 재밌거나 둘 중 하나로 수렴하는데 <<달과 6펜스>>는 후자였다. 재밌는 게 하늘을 찔러서 시도 때도 없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버스 안에서 책을 읽을 때 시달리던 멀미와 완전히 작별한 게 달과 6펜스부터였다. 그 정도로 몰입도가 높았고 예전에 읽었을 때와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내용 파악에 중점을 두고 텍스트를 놓치는 부분 없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 읽을 때는 꼼꼼히 읽었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구멍이 발견되면 그 장면을 집중적으로 읽는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 읽을 때와 두 번째 읽을 때 전혀 다른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처음 읽었던 게 몇 년 전이긴 하지만 비문학이 아닌 문학에서 이정도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번에 달과 6펜스를 읽을 때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책을 읽었다. 1)<<달과 6펜스>>라는 제목에 충실하며 2)인물들이 가지는 특성에 집중하며. 또 다른 접근 방법들이 있겠지만 소설의 겉면에 드러나는 알아차리기 쉬운 것들을 중심으로 읽었다.


1)은 처음 읽을 때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책을 읽을 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나 문화를 모르면 그 소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심으로 정답이었다. 처음 읽을 때 달의 의미(≒lunatic)는 너무 강렬하게 다가왔으므로 차치하고, 6펜스는 막연하게 '돈'이겠구나- 했는데 거기서 생각을 심화시켜 '물질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말'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스트릭랜드가 첫 번째 부인과 인연을 끊는 순간이 속세 혹은 물질세계와 인연을 끊는 순간인 건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는데 제목과는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작품 해설을 보고 나서야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 지향하는 삶은 달과 같은 삶이다. 현실이 6펜스에 얽혀있을지라도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달에 다가가고 싶어 한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과 스트릭랜드의 차이는 불확실한 이상을 위해 현실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확실한 현실에 남아있을 것인가에서 나타난다. 현실에서도 이상을 위해 6펜스를 버리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이상적 삶이 어려운 것은 현실의 모든 문제가 항상 <먹고사니즘>과 직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먹고사니즘을 떠나서 살 수는 없기에 이상을 좇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과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동시에 갖는다. 모든 이상적 삶이 6펜스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달과 6펜스를 동시에 갖는 천운을 누린다. 하지만 퍼센트로 따지면 1%도 안 되는 삶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예외로 두자. 스트릭랜드도 달의 위해 6펜스를 버리지 않는가. 사실 그는 특수한 상황인 것이 6펜스는 갑자기 무가치해져버렸기 때문에 버렸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구석이 있다. 수십 년간 중요하다고 생각해오던 것이 어느 날 먼지 같은 것이 되었다면 그건 그냥 상관없어진 것뿐이지, 먼지를 버리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느 날 신 내림을 받은 무당이나 계시를 받은 종교인이 비슷한 경우가 될 수 있겠다.


달과 6펜스의 인물들은 흥미로운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주인공인 스트릭랜드가 가장 알 수 없고 신비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 외의 인물들은 스트로브를 제외하고는 적당히 현실적이고 적당히 소설적요소를 가진 것으로 나온다. 스트릭랜드 자체는 입체적이고 기이한 면을 보이고 있지만 책을 읽은 사람들의 평가는 '스트릭랜드는 예술에 미쳤군'으로 집약된다. 그가 하는 기행들이나 여타의 행동들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하는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집중했던 건 스트로브와 스트릭랜드 였는데 한 사람에게 결여된 것이 다른 한 사람에게 보였다. 그래서 이 둘은 원래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스트릭랜드에게 없는 인간다움이 스트로브에게 넘쳐나고 있었고, 스트로브에게 결여된 관능적이고 야수같은 면이 스트릭랜드에게는 야생 그 자체로 느껴졌다. 분명 서로를 부각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책을 다 읽고 나서 접었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를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처음 알아본 것도 헌신한 사람도 결국 용서를 하는 것도 스트로브다. 이 정도면 성자 수준의 인격인데 스트릭랜드의 괴팍함 매혹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적 장치로 사용된 것 같았다. 흠 이게 사실이라면 좀 무섭군요.


소설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중략) 그것은 사회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p.260 이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먹고사니즘이 중요한 사람은 현실에서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고 현실을 떠나 이상을 좇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된다. 소설을 읽으며 마음 한편에서 통쾌한 기분이 들었던 장면은 내가 죽어도 떠나지 못할 세상을 주인공은 홀가분하게 떠나는 장면이었다. 내가 추구하는 이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붙여주기만 하면 떠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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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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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아카데미 몇 군데를 기웃거려 보기도하고 학교에서 교양으로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배우고 있지만, 그곳에서 배운 것은 철학이란 '철학하는 것'을 뜻한다-뿐이었다. 흔히 말하는 철학은 철학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철학자들이 정립해놓은 법칙이나 사상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게 철학의 겉면이라면 그러한 사상을 토대로 비판적 사고를 하는 것이 철학의 본질이라 했다. 비판적 사고를 위해서는 우선 철학자들의 사조부터 알아야 했다. 철학하기 위한 순서를 굳이 따지자면 철학사를 먼저 공부한 뒤 그것을 토대로 어떠한 사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배웠다. 이건 플라톤이나 데카르트가 말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것을 회의하라, 그것이 철학이다. 여러 책을 통하여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충분히 느꼈으니 더 늦기 전에 공부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자주 가는 철학 커뮤니티에서 초심자들을 위해 추천해 준 책이 <<철학 콘서트>>였다.




책의 권두글이 인상 깊었다. 어떤 대학 신입생의 글솜씨에 놀라던 찰나 학생의 글쓰기 스승이 황광우임을 알고 수긍했다는 이야기는 황광우씨가 어떤 필력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황광우씨의 저서를 보니 제목이 익숙한 책들도 몇 권 있었다. 권두글에서 몇 장 넘기면 저자가 책을 어떠한 순서로 읽으면 좋은지 적어 놓았는데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예수 -> 토마스 모어와 애덤 스미스 -> 석가와 공자 -> 퇴계와 노자 -> 플라톤과 마르크스를 마지막으로 읽으라고 적혀있었다. 전부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언급되거나 사상에 대해 배운 인물들이었다. 대학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인물들도 있었고. 플라톤과 맑스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사상보다는 인물 자체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플라톤과 맑스는 사상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해하지 못 할 수준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사상에 대한 수준은 고등학생이 교양으로 알면 적절한 수준이었다.


특히 흥미있었던 부분은 한비자와 맑스에 관한 이야기. 관련없는 이야기를 내놓은 두 학자 사이에서 저자가 공통적으로 본 것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홍세화씨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 떠올랐다. 헌데, 두 사람 모두 유물론자들인가? 한비자가 유물론의 시조쯤 되는 건가? 내가 배운 한비자는 상앙과 함께 세계사 책에 딱 한 줄 나오는 사람이라..


사상가를 이해하면 철학이 쉬워진다는 말에 적극 동감한다. 이것은 비단 철학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학문을 시작하는 책으로 학자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 책이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듣곤했다. 학자의 사조만 보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와 닿지 않는 경우가 종종있다. <<철학 콘서트>>는 학문에 관한 이야기보다 학자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펼쳐져 있었다. 최근에 보니 <<철학 콘서트 2>>도 나와 있었다. 1권과 겹치는 사상가들도 있고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도 있었다. 1권과 비슷하다면 2권도 재밌을터.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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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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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여러 곳을 거쳐 완독했다. 읽어야겠다 마음은 있었는데 책을 살 정도로 읽고 싶지는 않았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리자니 도서관 가는 게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센트럴시티 영풍문고에서 읽기 시작해 신림역 반디앤루이스를 거쳐 교생실습하고 있는 삼성초등학교에 와서야 빌려 읽었다-사실 학생들이 도서실에서 빌려온 걸 내가 하루만 읽는다고 애원했다-. 읽은 사람들이 괜찮은 책이다 좋은 책이다를 연발해서 기대하고 읽었는데, 기대하고 읽어도 좋았다. 오~ 요즘 중, 고딩들은 이런 감성으로 사는구나 싶었다. 다만 선생님놀이 하고 있는 내가 보기에 똥주를 욕하는 완득이가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이 아팠다. 쌤들은 도리 없이 욕먹는구나.


<<완득이>>는 완득이가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그린다. 장애인 아버지에 어려운 가정환경, 알고 보니 국제 결혼해서 물 건너오신 어머니가 있고 같은 반 여자아이와의 something도 있다. 대학을 왜 가야 되냐 외치는 장면과 하고 싶은 걸 찾아내서 곧장 빠져드는 모습도 나온다. 그 나이 또래 남자 아이들의 성에 대한 관심도 등장한다. 그러다 소설 말미엔 철도 든다. 이만하면 청소년 문학에서 나올 수 있는 소재는 몽땅 나온 셈이다. 지금까지 출판된 청소년 문학과 별반 다를 점이 없어 보이는 <<완득이>>가 성공한 이유는, 이런 평범하고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재미있게',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같은 소재를 차용한 <<늑대의 유혹>>이나 <<그 놈은 멋있었다>>에는 청소년 '문학'이라는 호칭을 달아주기 민망하다. 이런 소설들은 철저하게 현실과는 괴리된 판타지에 기초해서 소설이 전개된다. 소설의 특징에 허구성도 존재하지만 보고 있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완득이는 늑대의 유혹의 정태성만큼 멋있지도, 폼 나지도 않다. 그냥 교실을 둘러보면 꼭 한명씩 있는 말수 적고 집안 형편은 어려운데 자존심은 더럽게 센 그런 아이다. 굳이 도완득과 정태성을 비교하면, 완득이는 소설 속 인물이지만 현실에 발붙이고 있다. 3층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멀쩡하게 걸어 나가는 태성이는 허공에 떠 있는 가상인물이다. 귀여니의 소설들이 10대~20대 초반 학생들에게 주로 읽혔다면 완득이는 10대 초반에서 40, 50대를 아우른다. 읽고 나면 생각할 거리가 많거나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지는 않지만 내가 10대 땐 이랬었지-라던지 우리 아이도 이런 마음이겠구나-느낀다. 요즘 10대 아이들 마음속을 들여다 본 느낌이다.


완득이는 킥복싱을 시작하며 싫은 것과 좋은 것이 함께 왔다고 말했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아이들이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교생실습은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사는 게 다 이렇다. 마냥 좋은 것도 마냥 싫은 것도 없다. 끝끝내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킥복싱에서 TKO 3연패를 당한 완득이는 이제 완득이의 TKO를 찾아 나설 것이다. 시작할 때 교회에서 똥주를 죽여 달라 기도하던 완득이는 마지막에 똥주를 두고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친다. 완득이는 철이 들며 똥주가 자기를 발견해 준 것을 깨닫는다. 어머니와도 잘 풀리고 아버지는 완득이의 킥복싱을 인정한다. 모든 게 잘 풀리는 해피엔딩이다. 마음에 드는 결말이다. 모든 성장 소설이 다 그렇겠지만 방황하던 아이가 철드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이야기도 없다.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이 책에 보인 관심 포인트는 "선생님 완득이에 '욕'이 나와요-"였다. 친절하게 페이지를 펼쳐주며 똥주의 씨발 씨발을 보여주는데- 피식:) 애들이 몸집만 크지 영락없는 초딩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덩치는 나만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초딩은 초딩이다. 귀엽다. 2학년 애들은 수업 내내 웃음 참느라 혼났다. 앉은키랑 선키랑 똑같고, 발표하기 전에 "xx이가 발표해보겠습니다"하고 우렁차게 외치는데 우와앙 이 아이들은 천사인가,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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