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론
존 롤즈 지음, 황경식 옮김 / 이학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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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원초적 입장의 구성요소
 원초적 입장에서의 여러 가지 조건의 구체적 내용은 22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으로서 각 한 절씩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각절의 내용을 요약의 형식을 빌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 순서는 2-2-1정의의 여건, 2-2-2정당성개념의 형식적 제한조건, 2-2-3무지의 베일, 2-2-4당사자들의 합리성으로 나누어서 각각 살펴보려고 한다.

2-2-1.정의의 여건(the circumstances of justice)

 사회란 상호 이익을 위한 협동체이기는 하나 그것은 이해관계의 일치뿐만 아니라 그 상충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갖게 된다. 각자는 혼자만의 노력에 의해 사는 것보다 사회적인 협동을 통해 더 나은 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에 대해 이해가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해의 상충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와 같이 이익의 분배를 규제할 다양한 사회체제들 중에서 선택을 하거나 적절한 분배의 몫에 대한 합의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원칙들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이 정의의 역할을 규정한다. 이러한 필요성이 생기게 하는 배경적 조건들이 바로 정의의 여건이 된다.

이러한 정의의 여건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1)인간의 협동체제가 가능하고도 필요한 객관적인 여건

(2)협동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측면으로서의 주관적인 여건

  (1)인간의 협동체제가 가능하고도 필요한 객관적인 여건을 살펴보면,

    ①그들은 일정한 지리적 영역에서 함께 거주한다.

    ②그들은 능력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유사하다. 그래서 누구 하나가 타인을 지배할 수 없다.

    ③그들은 협동체가 결렬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궁핍하지 않으며 반면에 협동체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풍족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적절한 부족상태에 있다.

  (2)협동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측면으로서의 주관적인 여건을 살펴보면,

    ①대체로 비슷한 욕구를 갖거나 혹은 여러면에서 상호보완적인 욕구를 가짐으로써 그들 간에 서로에게 유익한 협동이 가능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의 인생계획을 가져야 한다. 즉 가치관으로 인해 그들은 서로 다른 목적과 목표를 갖게 되며 이용가능한 천연자원이나 사회적 자원에 대해서는 상충되는 요구를 하게 된다.

   ②모든 사람이 지식이나 사고나 판단등 여러 가지에서 부족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천부적 여건의 일부인 한에서, 이 둘의 결과적으로, 개인들이 서로 다른 인생계획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사회적 학설들도 존재하게 된다.

롤즈는 그 다음에 몇 가지 해명할 것을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①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정의의 여건이 성립함을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②그 당사자들이 가능한 그들이 가치(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증진시키고자 하며 이러한 노력을 함에 있어서 그들은 지금까지의 도덕적인 유대관계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③원초적 입장에서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이해관계에 관심이 없다고 가정한다.

 이상의 조건이 정의의 여건이다. 중심적인 것으로 정리하면, 객관적 여건에서는 적절한 부족 상태, 주관적 여건에서는 이해관계의 상충이라는 조건이다. 그래서 적절한 부족 상태아래서 상호 무관심한 사람들이 사회적 이익에 대해 상충하는 요구를 제시할 경우 정의의 여건이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론 1부를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이 여간 힘든것이 아니다. 그래도 각 부분을 나누어서 계속 정리해보려고 한다. 다음은 2-2-2정당성 개념의 형식적 제한조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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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원적 인간: 선진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 연구 한마음신서 9
H.마르쿠제 / 한마음사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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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은 일차원적 인간 책 표지 이미지좀 넣어놓지! 네이버에도 나오는 이미지를 안넣는 것은  정성 부족! 일차원적 인간의 이미지는 네이버에서 복사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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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쿠제에 의하면, 선진 산업사회는 기술적 지배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지배에 의하여 획일화된 가치로 창조성과 상상력을 통제하는 사회가 바로 일차원적 사회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대학생인 우리들 스스로에게 비추어 볼 수 있다. 대학은 급격히 변했고, 또 변해왔던 시간보다 더 빠르게 변화해 가고 있다. 그 변화는 바보 같은 열정도, 바보 같은 사랑과 낭만을 과거의 것으로 묻어버렸다. 학점은 목적 그 자체가 되어 버렸고, 취직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알았는가의 문제는 기각된 채, 학점만이 중요해졌다. 자신의 미래의 계획은 타산적으로 계획되고 그 계획에 도달하기 위한 생존경쟁은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왜 그런가? 우리는 취직을 해야 되고, 절박한 취직의 욕구에는 학점이라는 전제조건이 따라 붙는다. 어디 그 뿐인가? 토익과 토플을 비롯한 어학 자격증, 기술자격증을 구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아마도 마르쿠제의 논의대로 말해보면, 이러한 현상은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 일차원적 사회의 대학생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 구석구석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레져와 여가, 오락, 문화의 다양성이 증대되었다고 하지만, 실상 그 안에서의 향유는 기술적 지배의 결과물이며 체제 내로 흡수하기 위한 관리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중독, TV 홈쇼핑 중독, 컴퓨터 게임 중독등등 알고 보면, 우리는 TV와 컴퓨터가 없다면 알콜 중독자가 알콜에 목말라 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은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저서인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나타난다. 자연의 인간지배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겠다는 계몽의 기치는 오히려 인간의 인간지배의 수단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문화산업을 만들어 낸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러한 이성의 변질, 즉 도구적 이성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을 중심을 둔 나머지 비관적이며 우울하기만 하다. 어떠한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에 반면, 마르쿠제는 기술적 지배의 일차원적 사회와 이에 대한 해방의 대립구도가 계속된 긴장관계로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마르쿠제의 기술적 지배에 대한 비판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과 유사하면서도 희망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1. 선진산업사회의 지배(억압)의 양상

 지배 혹은억압’이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육체적 구속 및 감금상태를 쉽게 떠올리 수 있다. 그러나 마르쿠제에서의 지배 혹은 억압은 이러한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 이것은 안토니오 그람시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또한 언급했던 것이다. 그람시가‘지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리더쉽’에 의한 헤게모니적 지배를 이야기 한 것은 억압과 지배의 양상을 보이지 않게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계몽의 지배’를 제시하고, 이를 은폐하는 허위의식, 기만으로서의 ‘문화산업’을 이야기한 것은 선진산업사회의 지배양상을 고발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문학은‘기술적’능력이라곤 없어서 돈도 되지 않고, 취업도 되지 않는다. 세계 최대의 굴지의 기업이자 국내 최대의 기업인 삼성은 IT 산업의 육성을 위해 정보통신기술자로서 대학생을 육성은 하지만, 인문학에 투자하지는 않는다. 학문조차도 돈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 위계적으로 서열화 되는데, 그것은 곧 돈으로 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아무런 기술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인문학은 이러한 이유로 천대받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이것 또한 기술의 억압이 아닌가? 선진산업사회의 억압이 아닌가?

 마르쿠제는 이러한 현상을 선진산업사회의 비합리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선진 산업사회는 위험을 영속시킴으로써 한층 풍요해지고 거대해지며 살기 좋아진다. 사회의 정치적 요구는 개인의 욕구와 원망으로 바뀌고, 그것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기업과 공공의 복지를 조장하며, 이렇게 해서 전체가 더할 나위 없이 이성을 구현하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전체적으로 볼 때 비합리적이다. ”(8쪽)

한층 풍요로워진 선진산업사회는 정치적 요구 대신에 개인의 욕구를 조장하고, 그것을 총족시켜 주는 것 처럼 공공복지를 강조하는 것은 이성을 구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비합리적인 이유는 ‘생산성의 발전은 인간적인 욕구와 능력의 자유로운 발달을 해치며, 그 평화는 끊임없이 전쟁의 위협을 통해 유지되고, 그 성장은 생존경쟁을 완화하기 위한 현실적 가능성을 억압’(8쪽)하는데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억압은 이전의 억압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억압은 자연적이고 기술적인 미성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압도적인 능률과 생활수준이 폭력보다는 기술을 통해 억압하고 이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기술의 진보는 지배와 통합의 모든 체제로 확대됨으로써,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을 융합시키고, 고역과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전망의 이름으로 모든 저항을 타파 또는 논파하는 듯이 보이는 생활형태를 만들어’(10쪽) 낸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사회변혁을 억제하려고 하고, 이 사회변혁의 억제는 선진산업사회가 수행한 것 중에서 아마도 가장 특이한 업적이라고 마르쿠제는 말한다.

이러한 지배와 억압을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사회라고 말한다. 일차원적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의식.언어.예술은 모두 일차원적이라는 것이다. 기술적 지배로 인하여 사람들의 의식과 언어, 예술이 다양하지 못하고 관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다차원적이지 못하고 획일화된 일차원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일차원적 사회는 반대세력을 흡수하여 사회변동을 저지하고 다른 사회제도를 만드는 사회적 변형의 길을 봉쇄한다. 이것이 선진 산업사회의 가장 큰 성과이다. 기술의 지배는 새로운 통제의 형태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선진산업사회의 기술의 지배의 의미

  과거의 지배처럼 현대 산업사회도 지배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이 지배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이라고 마르쿠제는 단정한다. 무제한의 생산으로 조절된 산업체제의 중대한 결정은 기술자와 과학자에 의해 수행된다. 이것이 바로 기술이다. 그들은 새로운 상품을 고안하고 소비자에게 인위적인 욕망을 심어줌으로써 상품을 팔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자기재생산메커니즘에 의 논리에 따라 진행한다. 그래서 이제 기술의 중립성은 없다고 마르쿠제는 말하는 것이다. 즉 기술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체로서뿐만 아니라 지배의 수단으로서 정치화 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사회는 이미 기술의 개념과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지배체제이다. 기술적인 세계로서 선진 산업사회는 하나의 정치적세계이며 특정의 역사적 투기를 실현하는 최종단계이다. 그래서 그 투기가 확대되어 가는데 따라, 그것은 언설(Discourse)과 행동,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완전한 세계를 형성한다. 기술의 매개에 의해 문화, 정치 그리고 경제는 모든 선택 가능성을 흡수 또는 거절하는 편재적인 체제로 바뀐다. 이 체제의 생산성과 성장 가능성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기술의 진보를 지배의 얼거리 내에 억제한다. 기술적인 합리성은 정치적 합리화로 바뀌게 된다.”(15쪽)

 마르쿠제에 의하면, 선진산업사회의 사람들은 기술의 통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신민이 되었다. 이들은 스스로 기술적 지배 문화에 순응한다. 이것은 기술적 지배 문화를 이성의 구현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즉, 기술의 통제가 이성의 통제이며, 이는 모든 사회집단과 이해관계를 위한 통제이기 때문에 이 통제에 반대하거나 모순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다른 반동은 허용하지 않는다. 기술적 지배로 합리화된 체제로부터 이탈은 이단이다. 기술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체제의 거부는 정신이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기술적 지배 문화에 동일화하며, 그 여건 안에서 자신들의 발전과 만족을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차원적 사회에서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생산력을 높이고 이것을 토대로 물질적 풍요가 도래하였지만, 상황은 역전되어 오히려 인간은 이러한 물질적 풍요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되고 자신의 창조성과 정체성은 상실되어 버린다. 기술에 따른 물질적 픙요, 그러나 이에 의한 맹목적 추종, 인간성의 상실은 또 다른 지배가 되는 것이다. 

3.마르쿠제의 대안

 그렇다면 이러한 기술적 지배로 벗어나기 위한 마르쿠제의 대안은 무엇인가?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안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마르쿠제는 기술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필요성을 계속적으로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쿠제 또한 이점을 인정한다.『일차원적 인간』 서론에서는 두 가지 모순에서 머뭇거릴 것이라고 말한다.(13쪽) 하나는 선진 산업사회는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있어서의 질적 변혁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억제를 돌파하여 사회를 폭파할 수 있는 세력과 경향이 존재한다. 사회변동을 억제한다는 것과 사회변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마르쿠제 또한 여기에서‘명쾌한 해답을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13쪽)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지점이 마르쿠제에게 존재하는 억압과 해방의 긴장관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낙관적 전망이나 예측을 하지는 않았다. 계몽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달리 마르쿠제는 그 구체적 대안이 없을 지라도 비관적으로 경도되지 않았다. 기술적 지배가 확고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지만 그 안에서 나올 해방의 가능성, 희망의 길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은 이러한 기술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하나의 역설로서 제시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일차원적 인간』을 벤야민의 글을 빌려오면서 결론을 맺고 있다.

“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295쪽)

4.

 그람시의‘지적. 도덕적.이데올로기적. 문화적 리더쉽’에 의한 지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지배’는 마르쿠제의 기술의 지배와 이로 인한 일차원적 인간, 일차원적 사회의 맥락과 유사하다. 이것이 현재에 시사 하는 것은 당시보다 더욱 클 것이다. 20세기 초. 중반보다 기술은 더욱더 발전하여 정보화 사회로 진입했고, 더욱더 빠르게 변모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제의 기술적 지배에 동의한다면, 이러한 정보화 사회에서의 기술적 지배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것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폰, PDA등의 제품은 인간을 다양한 삶의 형식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것은 상품화되고 문화적 컨텐츠를 제공하면서 다른 지배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마르쿠제는 오히려 그러한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기술이 정치화되어 그 중립성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 마르쿠제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물질적 조건의 성숙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자유를 향한 토대로서 본 것이다. 그리고 모순적이지만 이 지점에서 사회변동의 가능성 또한 열리게 되는 것이다. 정보화가 한편으로는 지배의 기제로서 부정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지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들 간의 소통과 유대를 증진시키고 인간의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긍정적 요소가 있다. 이러한 지배와 해방이라는 두 가지 모순적 지점에서, 부정성과 긍정성이라는 양면성의 지점에서, 변화의 가능성과 해방의 길을 놓쳐버리지 말 것을 주창한 것이 마르쿠제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 결론에서 ‘희망’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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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 - 개정 증보판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1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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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질서 있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을 다방면이고도 입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완벽하게 작동하는 사회를 구상했다. 이 구상 속에는‘앎’(지식),‘정의’(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의 문제), 이상적인 정치형태등이 핵심적인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분리된 영역으로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서 통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에서 올바름의 실현, 훌륭한 국가의 기준은 이데아와 관련이 있다. 현실세계 넘어에 있는 참된 실재로서 이데아가 있고, 이데아의 표본대로 실현해가는 것이 올바름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데아를 아는 것으로서 지식 혹은 인식의 문제인 인식론의 문제가 논의되고, 이것을 인식하는 자로서 통치자의 문제가 논의된다. 즉 이러한 인식은 선천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 엄격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야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사람이 통치를 해야 올바름이 실현될 수 있으며 당연히 이런 조건의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교육 문제도 중요하다. 플라톤은 올바름을 실현하는 국가의 필요한 조건으로서 통치자를 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통치자는 올바름의 실현의 중요한 조건이지 그 자체로 올바름의 실현은 아니다. 올바름의 실현은 한 국가, 사회가 각자의 역할과 기능에 충실하여 조화롭게 운영되는 것이 올바름이라 보았고, 그것이 훌륭함의 실현, 곧 덕의 실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훌륭한 국가란 무엇인지, 또한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제기되는 청소년 교육과 이를통해 선발된 통치자의 조건을 정리해보고,  플라톤이 논의한 이상적인 조화로운 사회상에 대하여 설펴본 후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정체형태에 대하여 정리해보려고 한다.  

1.훌륭한 국가-정의

『국가』에서는 먼저 정의의 판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이야기의 끈을 풀어놓는다.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첫째, 그 자체 때문에 반기고자 하는 것인가? 둘째, 그 결과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가? 셋째 그 자체 때문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좋은 것인가? 이 중의 어떤것을 올바름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의 질문에 플라톤은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아하게 마련인 것’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올바름의 추구를 단지 결과의 좋음으로서만 여기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하는가? 즉‘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중에서 이득이 올바르지 못한 것에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즉‘올바른 자는 태형을 당하고 사지를 비틀리는 고문을 당하고’, 반면에 올바른 척하는 자에게 보다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플라톤은 비석의 작은 글씨를 살펴보는 방법상의 비유를 들면서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으로 간주하고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그래서 먼저 국가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국가는 개개인이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동반자 및 협력자로서 한 곳에 모여서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수립된다.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요소는 음식물, 거주지, 의복이다. 다시 말하면 의ㆍ식ㆍ주가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요건이며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협력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국가가 수립된다. 그렇다면 지역적으로,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국가 혹은 정치형태들이 나타나는데, 어떠한 형태에서 올바름을 볼 수 있는가?

 올바름은 시민전체가 최대한 행복해질 때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소수의 집단만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를 행복하게끔 하는 것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주요 계급은 생산계급, 수호자(군인), 통치자(수호자에서 선발된)로 나눌 수 있는데, 국가가 최대한 행복하려면 이 세 그룹이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가 ‘지혜롭고 용기 있으며 절제(절도)있고 또한 올바르게 되었을 때 실현될 수 있으며 이것이 덕의 실현 상태, 즉 훌륭함인 것이다.

 지혜란 분별하는 능력인데, 분별은 앎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진다. 이 앎은 특수한 기술이나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전체와 관련해서 어떤 방식으로 잘 통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별을 해줄 지식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앎이다. 이것이 통치자가 갖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용기란 수호자들과 관련된 것인데, 이것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보전이다. 즉 이들은 자신의 교육 받은 대로(지혜에 입각하여) ‘고통에 처하여서도,  즐거움에 처하여서도, 욕망에 처하여서도, 공포에 처하여서도 이를 버리지 않고 끝끝내 보전하여 지님’을 의미한다.

 절제란 통치자와 피치자의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겠다는 ‘합의’, 혹은 ‘상호 인정’을 통하여‘한마음 한뜻’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용기와 지혜는 각각 수호자와 통치자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절제는 나라 전역에 해당되는 것이다. 피치자가 인정을 하도록 하게 만드는 이념은 일종의 통치의 논리이다. 이 통치의 논리를 피치자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통치자와 피치자의 같은 판단(의견)이 생겨나고 국가는 분쟁이 없고 혼란이 없는 온전한 하나의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통치의 논리를 플라톤은 페니키아의 전설 -황금, 은, 쇠(청동)의 성분을 가지고 사람은 태어난다는 전설(249쪽)- 을 인용하는데, 통치자와 수호자, 피치자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통치자는 금으로 태어난 사람이고, 수호자는 은으로 태어난 사람이며, 피치자는 쇠로 태어난 사람이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각자의 본분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성립된다.

 이렇게 올바르고, 지혜롭고, 용기 있으며, 절제 있는 훌륭한 국가의 성질 및 조건은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이것은 위에 언급한대로 큰 것을 먼저 살펴보고 작은 것을 보면 좀 더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면서도, 한 인간에게서나 국가에서나 훌륭함은 이데아의 본을 닮은 것으로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세 부류가 있었다면 개인에게는 영혼의 세 부류가 있다. 그것은 이성, 격정, 욕구이다. 이성은 영혼이 헤아리게 되는(추론하게 되는)부분이며, 격정은 이성을 보조하는 것으로서 이성의 보조에 충실하다면 올바르지 못한 일을 보았을 때 고통과 두려움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올바름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욕구는 어떤 느낌들이나 병적인 상태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다.(이것은 필요욕구와 불필요 욕구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

 훌륭한 국가가 지혜, 용기, 절제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훌륭한 개인에게도 지혜, 용기, 절제로서 이루어진다. 지혜란 혼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앎이며, 용기란 격정이 두려움과 고통에 굴하지 않고 교육받은(지혜에 입각한) 보전하는 것이며 절제란 이성적 부분(헤아리는 부분)과 비이성적(헤아리지 못하는 부분)부분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여 다툼과 갈등이 없는 것이다.  

2.교육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훌륭한 국가는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여 조화로울 올바르며 이것이 덕의 실현이요, 훌륭함인 것이다. 마차가지로 한 개인에서 훌륭함은 지혜, 용기, 절제가 지혜의 통제아래서 조화로울 때,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지혜, 용기, 절제를 개인이 조화로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과정은 통치자와 수호자, 그 외 보조자(협력자)들을 선발한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시가교육과 체육교육이다. 시가교육이 중요한 이유는‘리듬과 선법은 혼의 내면으로 가장 깊숙이 젖어 들며, 우아함을 대동함으로써 혼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기 때문이며 또한 우아하고 고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훌륭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옳게 싫어할 줄 알게 되고, 아름다운 것들은 칭찬받아 기뻐하며 혼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훌륭한 사람으로 될 수 있다. 시가교육은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하는 교육이며 올바른 것에 대한 의견이나 판단, 근거를 함양하게 하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절제, 용기, 자유로움, 고매함 및 이와 같은 부류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시가 교육 다음으로는 체육교육의 중요성을 논의한다. 체육교육 또한 어렸을 때부터 진행되어야 한다.  최선의 체육교육은 최선의 시가교육과 유사하다. 즉 식사와 일상생활의 전반을 온갖 선법과 온갖 리듬으로 만들어진 것과 유사하다. 즉 체육교육은 단지 육체적 단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혼에서 나온 훌륭한 육체, 건강을 의미한다. 교육에서도 플라톤은 무절제와 다양성보다는 단순성을 지향한다. 왜냐하면 무절제와 다양성은 시가에서는 리듬과 선법의 무질서로 체육에서는 질병을 낳는다. 그래서 단순성은 시가에서는 혼의 절제를 낳고 체육에서는 몸의 건강을 낳는 것이다. 여기에서 단순성이 의미하는 것은 ‘종류의 단순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철저하다는 의미에서, 즉 무절제와 방만함의 대립적인 의미에서의 단순성이다.

 시가교육과 체육교육이 중요되는 것은 이 둘이 적정할 정도만큼 키워지고 서로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혼의 격정적인 면과 지혜로운 면이 조화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통하여 통치자를 선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각 연령단계에서 그들이 신념을 지키려는 마음 상태를 갖는지, 소신을 지키려는지, 유혹되거나 강제당하는 것은 없는지, 잊거나 내팽겨치는 것은 없는지를 지켜보는 가운데 통치자를 선발한다.

 아이들일 때는 계산이나 기하학등의 예비교육을 실시하되 이것은 강제적이지 않게 놀이삼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강제적으로 진행된다면, 혼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세를 전으로 해서 체육교육을 통하여 어떤 사람으로 드러나는 가를 시험하고, 20세가 된 자들 중에서 선발을 진행하고 약 30세까지 변증술을 위한 예비교육을 실시한다. 이 예비교육이란‘실재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인 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변증술적 자질이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이 된다. 그리고 30세가 넘어서 공부에 있어서도 확고하고, 전쟁이나 그 밖의 다른 법적인 의무에서도 확고한 사람들을 다시 선발한다. 그리고 5년동안은 집중적으로 논변하는 기간이다. 이후 15년간은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 및 철학적 수련을 진행하고 50세가 된 후에 최종 선발과정을 거쳐 통치자로 될 수 있는 것이다.   

3.통치자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수립할 수 있으려면,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조화로운 사회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통치자의 역할이 중시된다. 그것은 플라톤이 상정하고 있는 참된 실재로서의 ‘이데아’론과 관련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데아의 인식을 통하여 세상을 정의롭게 실현할 수 있는데, 이것은 통치자에 의해 가능하면서도 통치자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는 동굴의 비유로서 설명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마치 약간의 빛이 들어오는 동굴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사람들은 진실로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될 사람은 동굴밖에 나와 바깥세상을 보고 동굴에 가서 바깥세상을 기준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굴에서 나온 사람은 동굴에 익숙해진 나머지 처음에는 눈이 부시다. 그러나 바깥세상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보다 진실된 것을 보고자 한다면 눈부심이 사라지듯이 보다 올바른 것이 무언인지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통치자는 출생이 좋은 성분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어렸을 때부터 교육으로 훈련되고, 단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2·30대에는 실무와 경험을 갖추고 계속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50대가 되어서 비로소 통치자의 요건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통치자에게 어떤 편리와 안락한 생활을 부여해주지 않았다. 다소 귀족적인 관점에서 사람을 능력과 출신에 따라 구분하였지만 통치자는 통치자로서 금욕과 고된 훈련을 요구 받는다. 그래서 통치자는 사적인 이해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개인 재산을 가져서도 안 되고 가족을 구성하는 것도 안 된다. 또한 후세의 통치자를 위하여 부인 또한 출신과 성분을 고려하여 공유해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통치자는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 중에도 자질이 충분하다면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플라톤은 언급하고 있다.     

4.여러 형태의 정체 비판

앞에서 훌륭한 국가의 모델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루어져 통치되는 형태였다. 이것은 최선자 정체(철인치자)이다. 그러나 내부의 분란이 생기면서 최선자 정체는 쇠락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으로 진행되는 이유는 신적인 창조물을 위해서는 완전수가 포함하는 주기가 있는데, 이것을 놓치게 되면 생리학적으로 더 못한 출산을 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결국 좋은 출산의 시기를 놓치게 되어 훌륭한 인재가 부족해지고 질도 저하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어난 수호자들이 권력을 승계하게 되면서 수호자(통치자)구실을 잘하지 못하게 된다. 이 내분은 쇠와 청동의 성질을 가진 이들이 재산을 축적하는 것으로 향하게 되지만 아직까지 금과 은의 성분의 수호자들이 있어서 서로 분쟁을 일으키다가 중간선에서 합의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최선자 정체에서 과두정체의 중간단계이다. 그런데 여기에격정이 지혜의 보조자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되면서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전쟁을 좋아하는 이들은 지혜보다는 승리와 명예를 추구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명예지배체제가 통치하게 된다.

 최선자 정체에서 명예정체로 쇠락하면서 훌륭함의 실현은 낮아지게 되는데 이것이 더욱더 심화됨에 따라 훌륭함이 가벼이 여겨지게 되는 반면 부는 귀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과두정체가 등장하게 된다. 과두정체는 평가 재산을 기준으로 통치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한자를 통치에서 배제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말미암아 가난한자들과 부자들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고 가난한자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민주정체가 등장한다. 이제 ‘멋대로의 자유’를 추구하게 되면서 질서도 조화도 없게 된다. 이러한 ‘멋대로의 자유’와 멈추지 않는 욕망은 질서도 없고 혼란만 초래하는 것이어서 참주정체를 발생시키게 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정체에 상응하는 훌륭함에서 이탈하는 여러 부류의 인간을 바라 볼 수 있다. 명예지배체제는 격정이 이성으로부터 지배당하지 못함에 따라 맹목적인 용기로 나타나 승리와 명예를 추구 하게 되는 인간의 부류이고, 과두정체는 욕구가 혼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성을 욕구 아래에 두면서 재산의 축적에만 열을 올리는 방법을 강구하는 인간의 부류이며, 민주정체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온갖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하며, 참주정체에서는 가장 올바르지 못한 인간의 부류이다.  

5. 

 플라톤에게 훌륭한 국가란 각각의 기능에 충실하고 그래서 조화롭게 운영되는 사회이다. 이것은 참된 실재로서의 이데아에 바탕을 두고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해병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다양한 방면에 관하여 논의가 전개된다. 그리고 각각의 논의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틀을 발견할 수 가 있다. 즉 리듬과 선율이 조화로운 형식을 갖추어야 하듯, 국가, 교육, 통치자, 각 인간의 역할에 관한 논의들에서도 하나의 체계적인 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하나의 국가 안으로 흡수시켜 조화롭게 운영되는 사회상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국가』는 철학, 윤리, 정치 등의 여러 가지의 주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다양한 문제들을 언급하고, 문학적 비유를 통하여 체계적이고 조화로운 상태의 사회, 즉 국가를 올바른 것이라 보고 이것이 훌륭함, 덕의 실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비록 플라톤이 엘리트적, 귀족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면이 있지만, 아마도 이것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민주정체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 속에서 수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대적 상황에 대한 플라톤이 구상한 사회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플라톤의 민주정체에 대한 비판은 탁월할 정도로 현재의 민주주의제도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있다. 민주정체에서의 일반 시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이것을 가장하여 일부 선도하는 사람들의 정체가 민주정체라고 본 것은 현재 절대적 믿음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반성적 지점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플라톤의 이론이 현재적 가치에선 엉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신화적인 믿음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이후 전개된 서양사상의 착상들과 단초들을 이루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면은 현재에 있어서 민주정체의 문제를 비롯한, 혼란과 무질서의 문제점등 현재에서도 유효한 측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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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론
존 롤즈 지음, 황경식 옮김 / 이학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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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주제와 정의의 역할, 고전적 공리주의와 직관주의에 대한 비판에 이어서 이제 롤즈의 정의론의 본내용으로 들어가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롤즈가 제시하는 정의의 원칙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다시말하면, 그 정의의 원칙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보여주어서 설득하는 방식과 내용은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롤즈의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 상황속에서 당사자들이 롤즈가 제시하는 정의의 원칙을 왜 선택할 수 밖에 없는지, 그것이 왜 최선의 선택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내용을 또 세분화해서 정리를 해야 되겠다. 먼저 계약론적 설명방식과 반성적 평형에 대하여 정리해본다.

2.원초적 입장(the orginal position)

 이미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으로서 롤즈가 원하는 것이란, 사회를 잘 질서 지우기 위해 필요한 사회정의의 원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 및 정당화를 위하여 어떤 절차적 공정성을 보증하는 가상적 상황을 전제하고, 또한 그 안에서 당사자들은 정의의 원칙들을 채택하고 준수할 것이라는 점은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사회협동체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 결의를 통해서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고 사회적 이득의 분배를 정해줄 원칙들을 함께 채택한다고 상상해 볼 수’있게 해주기 때문이다.(45쪽)

 이러한 토대를 기반으로 해서 롤즈가 가상하는 것이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다. 한편으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계약론의 한 형태이며, 원초적 입장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구체화된 형태, 혹은 구체화된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원초적 입장이란 적절한 최초의 원상(status quo)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거기에서 도달하게 된 기본적 합의는 공정’한 것이고,‘정의의 원칙은 최초의 상황에서 합의된 것’이 된다.(47쪽)

 롤즈도‘로크, 루소, 칸트에게서 흔히 알려져 있는 사회계약의 이론을 고도로 추상화함으로써 일반화된 정의관을 제시’(45쪽)하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것은 계약론적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계약론적 전통에서의 ‘자연상태(state of nature)’와 원초적 입장은 유사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자연상태가 특정한 정부형태나 통치형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지만, 롤즈는 특정한 정부형태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정의의 원칙들을 인정하고 설명하기 위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판단을 설명해주고 인간이 정의감을 갖는 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초적 입장에서의 합의는‘일정한 사회를 택한다거나 특정 정부형태의 정부를 선택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도덕원칙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서 상식적이고 경험적인 설득력을 부여하려고 세밀하고도 구체적인 조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간다. 이미 언급했듯이 롤즈의 논증 방식은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 상황을 전제해도 무방하다는 것을 이미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통해 보여주고,이것을 토대로 원초적 입장의 구체적 조건들을 설정하여 이로부터 선택된 정의관이 자신이 제시하는 정의의 두 원칙들로서 고전적 공리주의나 직관주의보다 더 나은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롤즈의 핵심은 여기에 달려 있다. 이것을 얼마나 세밀하고 잘 배열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이 부여될 수 있다. 먼저 롤즈가 제시하는 계약론적 설명방식의 장점을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원초적 입장에서 제시되는 조건들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2-1. 전통적인 계약론과 원초적 입장

  2-1-1.계약론적 설명방식이 갖는 장점

 롤즈에 의하면, 계약론적 설명방식이 갖는 장점은 그것이 정의의 원칙들은 합리적인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는 원칙들로 생각될 수 있고, 그런 식으로 정의관들이 설명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상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1)첫째, 정의론은 합리적 선택의 일부요, 그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나아가서 정의의 원칙들은 사회적 협동에 의해 얻어진 이득에 대한 상충되는 요구들을 다루는 것으로서, 여러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데, ‘계약’이란 말은 이러한 복수성을 암시하고 있고, 이득의 적절한 분배는 모든 당사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들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건을 나타내고 있다.

 (2)둘째, 계약론적 설명 방식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정의의 원칙들에 대한‘공지성(publicity)'이라는 조건인데, 원칙들이 합의의 결과인 이상, 시민들은 타인들도 그 원칙에 따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원칙들이 갖는 공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계약이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3)셋째, 계약론은 오랜 전통을 이루며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계통의 사상과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것은 생각을 정돈하는 데 도움이 되며 자연스러운 경건함에도 부합된다. (51쪽)

 이상의 롤즈의 계약론적 설명방식이 갖는 장점을 정리하면, (1)첫째, 정의의 원칙들은 사회의 이해관계의 상충을 조절하기 위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개인의 고립적 성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인간의 관계와 집단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계약’이라는 것은 이러한 복수성과 모든 당사자들이 원칙에 따라 선택하고 준수할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2)둘째, 계약은 합의하고 지켜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이러한 사실을 계약당사자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전제된다. 이것이 롤즈가 말하는 ‘공지성’인데, 계약론은 이러한 공지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3)셋째, 계약론은 오래된 전통을 이루어져 왔고, 이 오래된 전통과 관련짓는 것은 생각을 정돈하도 경건해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이유를 통해서 롤즈의 논증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데,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이 형이상학적이라는 난점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경험적 사실에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즉 어떤 원칙들을 제시했을 때, 흔히 갖게되는 대립적인 두 가지 난점을 피해가면서 논증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다. 하나는 형식적이고 선험적이라는 비판, 다른 하나는 경험적인 논의를 다룸에 있어서 복잡성과 난해함이 발생하는데, 이를 극복하더라도 경험적인 것의 추상화가 갖는 논증은 그와 부합하지 않는 구체적 사실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 그래서 롤즈가 각각 이 두 가지 다른 편향을 벗어나기 위하여 가상적 입장인 원초적 입장을 채택하면서도 그 안의 조건은 상식적이고 경험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자세히 보여주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한다고 볼 수 있다.

  2-1-2.반성적 평형

 원초적 입장을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직관적이기는 하지만, 원초적 입장을 구성하는 내용이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초적 입장은 원초적 입장을 구성하는 조건을 따저보는 것은 신중한 검토과정에서 삭제되고, 첨가되고, 수정되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 및 방법을 말하는 것이‘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이다. 롤즈는 반성적 평형에 대하여‘이쪽 저쪽을 맞추면서 때로는 계약적 상황의 조건들을 변경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판단을 철회하거나 그것을 원칙들에 따라 조정하기도 하면서, 결국 우리는 합당한 조건들을 표현해주면서도 정리되고 조정된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도 부합하는 최초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가 반성적 평형 이다. 그것을 평형이라고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우리의 원칙과 판단들이 서로 들어맞기 때문이며, 그것을 반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이 따를 원칙이 무엇이며 판단이 도출될 전제조건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질서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평형상태가 반드시 안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사회정의에 대한 신념을 정당화하고 일관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개념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56쪽)

 즉, 반성적 평형은 원초적 입장에 대한 구성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이며, 그래서 원초적 입장은 절차적 정당성을 갖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쪽 저쪽으로’계약적 상황을 변경하기도 하고, ‘판단을 철회’하거나‘조정’한다는 것은 합의를 통하여 도달한 잠정적인 최종적 상태이다. 그래서 그것은 반성적 과정을 거친 합의의 도달과정이며 그래서 잠정적으로는 평형을 유지하는 상태인 것이다.

다음 리뷰에서는 이제 이렇게 하여 구성된 원초적 입장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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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고전적 공리주의,직관주의 비판

 롤즈는 공리주의와 직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론적으로 세밀히 따져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롤즈의 주요한 목적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와의 비교를 통해서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더 나은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 원초적 입장을 통하여 정의의 원칙을 정당화하는 논의로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과 직관주의에 대한 한계점은 각각 일반적인 논의의 수준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비판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공리주의와 직관주의를 일반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하더라도 롤즈의 비판은 그 일반성으로부터 본질적인 핵심을 비판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롤즈가 비판하는 것으로서 공리주의의 종류는 시즈워크에 의해 가장 명료하고 접근하기 쉽게 정식화된 엄밀한 고전적 이론이다. 롤즈에 의하면, 이것은 한 사회의 중요제도가 그에 속하는 모든 개인이 만족의 최대 순수 잔여량을 달성하도록 편성될 경우 그 사회는 정당한 질서를 갖춘 것이며 따라서 정의롭다는 견해이다. 롤즈에 의하면, 이러한 고전적 공리주의에서 사회정의는 집단의 복지라는 집합적 개념에 적용된 ‘합리적 타산(rational prudence)’의 원칙이다. (60쪽) 이것은 일견 매력적인 것이며 또한 합리적인 것인 듯 보임에도 불구하고 치명적 난점을 갖는다. 이것은 ‘옳음’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기각하기 때문에‘좋음’과 ‘좋음’의 문제가 상충되었을 때 답변할 수 없는 난점을 갖는다. 그래서 윤리학의 지평에서의 ‘옳음’과 ‘좋음’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목적론이 갖는 일반적 성격을 비판함으로써 공리의 원칙을 비판한다.

 또한 직관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에서 롤즈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주의를 생각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롤즈는 직관주의는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여러 개의 제1 원칙들이 있으며, 그들 간에 어떻게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인지는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 비추어 상호간의 비중을 잼으로써 결정할 수 밖에 없다는 학설로 본다. 직관주의자들은 정의의 대등한 원칙들간에 적절한 우열을 가려줄, 보다 고차적인 구성적 기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도덕현상의 복합성으로 인해 여러 가지 상이한 원칙들이 요구되므로, 그들을 설명하고 그 비중을 가려줄 단일한 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실질적으로 다원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귀결되고 이에 대하여 롤즈는 단일한 구성적 기준을 보여줌으로써 논박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논의전개를 보여줌으로써 직관주의는 당연히 논박되는 것이라 보는 것이며, 또한 이를 통하여 자신의 논의를 더욱더 강조하고 있다.

 물론 롤즈가 직관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다원주의로 귀결되는, 어떤 하나의 단일한 기준을 거부하는 것을 포기하는 직관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롤즈 또한 ‘직감적으로 생각하건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원초적 입장에서의 직관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몇 가지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2-1.고전적 공리주의 비판

 윤리학에서의 두 주요개념은‘옳음(the right)’과‘좋음(the good)' 이다. 그래서 윤리설의 구조는 이 두 가지 개념을 규정하고 관련짓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그 중에서도 간단한 것은 목적론이다. 롤즈에 의하면, 목적론은 좋음을 옳음과는 상관없이 규정하고 그리고 옳음은 그 좋음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정확히, 옳은 제도나 행위란 쓸 만한 대안들 중에서 최대의 좋음을 산출하는 것이든가 아니면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다른 제도나 행위만큼의 좋음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론은 합리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직관적 호소력을 갖기 쉽다. 물론 합리성이란 어떤 것을 극대화하는 것이며 도덕에 있어서 그것은 좋음(선)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최대의 선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사회가 편성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문제가 발생한다. 즉 목적론에서는 좋음이 옳음과 상관없이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1)첫째, 옳음이란 이같이 이미 명시된 선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라는 가설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2)둘째, 이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옳음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사물의 좋음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 옳음이란 이미 명시된 선을 극대화시키는 것이거나, (2) 옳음 그 자체의 기준 없이도 좋음(선)으로서 가치평가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고전적인 형식에 있어서의 공리의 원칙은 좋음(선)을 욕구의 만족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러한 입장은 어떤 것이 사회협동체의 적합한 조건인가는 그 여건 아래서 개인들의 합리적인 욕구들에 대한 만족의 최대 총량을 달성해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의해 정해진다. 이러한 입장은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난점을 갖는데, 그것은 이러한 공리의 원칙이 원칙적으로 어떤 사람들의 보다 큰 이익이 다른 사람들의 보다 적은 손실의 정당화를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리의 원칙에 충실하다보면 다수가 보다 큰 좋음(선)을 명분으로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롤즈에 의하면, 여러 선을 분배하는 그 자체도 또 하나의 선으로, 어쩌면 보다 상위의 선으로 간주된다면, 그리고 이러한 이론이 우리들에게 최대의 선을 산출하도록 지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고전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목적론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분배의 문제는 옳음의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배의 문제는 옳음의 문제로 귀결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2-2.직관주의의 한계와 제한적 수용

 롤즈에 의하면, 직관주의적 이론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1)첫째, 이 이론은 특정한 유형의 경우에 있어서 상반되는 지침을 주는 상충하는 제1원칙의 다원성으로 이루어진다.

 (2)둘째, 이러한 원칙들의 순위를 가려 줄 명확한 방법이나 우선성 규칙이 없다.

 그래서 직관에 의해서, 가장 그럴 듯하게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의해서 조정점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우선성 규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얼마간 변변찮은 것이어서 판단을 내리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직관주의는 다원주의로 귀결될 수 있으며 그래서 직관주의를 다원주의라고 할 수도 있게 된다.

 직관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대한 판단에서 제1원칙은 다름 아닌 다수라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직관주의는 이러한 다원성을 일정한 방식으로 조정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런 다원성이 더 옳은 것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롤즈에 의하면, 직관주의자는 오히려 도덕 현상의 복잡성 때문에 우리의 판단에 대한 완전할 설명을 하려는 노력은 소용이 없고, 대등한 여러 원칙들이 있다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할 때 처럼 평범한 이야기가 되고 말거나, 모든 것을 공리의 원칙으로 해결할 때처럼 오류 내지는 지나친 단순화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79쪽) 그래서 롤즈는 직관주의를 논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러 원칙들이 합당하게 가려질 비중을 설명할, 인정받을 만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즉 ‘직관주의에 대한 반박은, 직관주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종류의 구성적 기준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롤즈는‘직관주의’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성 문제를 기각하고 다원주의로 귀결되는 직관주의에 대하여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롤즈에 의하면, 오히려 직관주의는‘숙고된 판단을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직관에 대하여 제한을 두고 있다. 롤즈에 의하면, 직관은

 (1)첫째, 그것은 정의의 원칙들이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되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들은 어떤 선택적 상황의 결과인 것인데, 합리적인 존재인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이러한 원칙들의 우선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정의의 원칙들은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선택될 것이라는 사실에서 그 정당성의 근거를 찾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받아들여지는 근거 속에서 그 경중이 구분될 어떤 지침이나 제한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둘째, 서열적 순서, 축차적인 순서로서 배열된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즉 제 1원칙이 충족되어야 제 2원칙에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직관주의와 다른 점은 한꺼번에 경중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열적 배열을 함으로써 모든 원칙들의 경중을 한꺼번에 가리지 않아도 되며, 그 순서상 앞선 것은 뒤따르는 것에 비해 이른바 절대적인 비중을 가지며 예외 없이 타당하게 된다. 그래서 롤즈는 특수 경우로서 실제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규제하는 원칙보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우선시킴으로써 이런 식으로 순서를 매기고자 한다. (82~85쪽)

 다시 롤즈의 논의를 정리하면, 롤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서 직관에의 의존이 두 가지로 집중된다고 밝히는데, (1)첫째, 우선 사회의 체제 내에서 그 체제를 판단하게 될 입장을 선정하고, 다음에 이 입장에 있는 대표적인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특정 체제의 기본구조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묻게 된다. 그렇다면 직관에의 의존은 직관주의적 입장의 총합-배분의 이분법에서와는 다른 성질을 띠게 되고 그 정도도 훨씬 줄어들게 된다. (2)둘째, 우선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직관적인 판단에의 의존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키는 일이다. 어떤 종류이든 간에 직관에 전부 의존하는 것을 피할 수 있거나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실제적인 목적은 공통된 정의관을 제시하기 위한 판단에 있어 합리적으로 믿을 만한 합의에 도달하는 일이다.(86~87쪽)

 다음페이퍼에서는 원초적입장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계약론적 설명방식과 반성적 평형을 살펴봄으로써 롤즈의 원초적 입장의 가상적 상황이 무엇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인지, 어떻게 찾아가는 것인지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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