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원적 인간: 선진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 연구 한마음신서 9
H.마르쿠제 / 한마음사 / 199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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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쿠제에 의하면, 선진 산업사회는 기술적 지배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지배에 의하여 획일화된 가치로 창조성과 상상력을 통제하는 사회가 바로 일차원적 사회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대학생인 우리들 스스로에게 비추어 볼 수 있다. 대학은 급격히 변했고, 또 변해왔던 시간보다 더 빠르게 변화해 가고 있다. 그 변화는 바보 같은 열정도, 바보 같은 사랑과 낭만을 과거의 것으로 묻어버렸다. 학점은 목적 그 자체가 되어 버렸고, 취직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알았는가의 문제는 기각된 채, 학점만이 중요해졌다. 자신의 미래의 계획은 타산적으로 계획되고 그 계획에 도달하기 위한 생존경쟁은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왜 그런가? 우리는 취직을 해야 되고, 절박한 취직의 욕구에는 학점이라는 전제조건이 따라 붙는다. 어디 그 뿐인가? 토익과 토플을 비롯한 어학 자격증, 기술자격증을 구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아마도 마르쿠제의 논의대로 말해보면, 이러한 현상은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 일차원적 사회의 대학생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 구석구석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레져와 여가, 오락, 문화의 다양성이 증대되었다고 하지만, 실상 그 안에서의 향유는 기술적 지배의 결과물이며 체제 내로 흡수하기 위한 관리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중독, TV 홈쇼핑 중독, 컴퓨터 게임 중독등등 알고 보면, 우리는 TV와 컴퓨터가 없다면 알콜 중독자가 알콜에 목말라 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은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저서인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나타난다. 자연의 인간지배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겠다는 계몽의 기치는 오히려 인간의 인간지배의 수단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문화산업을 만들어 낸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러한 이성의 변질, 즉 도구적 이성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을 중심을 둔 나머지 비관적이며 우울하기만 하다. 어떠한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에 반면, 마르쿠제는 기술적 지배의 일차원적 사회와 이에 대한 해방의 대립구도가 계속된 긴장관계로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마르쿠제의 기술적 지배에 대한 비판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과 유사하면서도 희망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1. 선진산업사회의 지배(억압)의 양상

 지배 혹은억압’이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육체적 구속 및 감금상태를 쉽게 떠올리 수 있다. 그러나 마르쿠제에서의 지배 혹은 억압은 이러한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 이것은 안토니오 그람시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또한 언급했던 것이다. 그람시가‘지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리더쉽’에 의한 헤게모니적 지배를 이야기 한 것은 억압과 지배의 양상을 보이지 않게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계몽의 지배’를 제시하고, 이를 은폐하는 허위의식, 기만으로서의 ‘문화산업’을 이야기한 것은 선진산업사회의 지배양상을 고발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문학은‘기술적’능력이라곤 없어서 돈도 되지 않고, 취업도 되지 않는다. 세계 최대의 굴지의 기업이자 국내 최대의 기업인 삼성은 IT 산업의 육성을 위해 정보통신기술자로서 대학생을 육성은 하지만, 인문학에 투자하지는 않는다. 학문조차도 돈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 위계적으로 서열화 되는데, 그것은 곧 돈으로 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아무런 기술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인문학은 이러한 이유로 천대받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이것 또한 기술의 억압이 아닌가? 선진산업사회의 억압이 아닌가?

 마르쿠제는 이러한 현상을 선진산업사회의 비합리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선진 산업사회는 위험을 영속시킴으로써 한층 풍요해지고 거대해지며 살기 좋아진다. 사회의 정치적 요구는 개인의 욕구와 원망으로 바뀌고, 그것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기업과 공공의 복지를 조장하며, 이렇게 해서 전체가 더할 나위 없이 이성을 구현하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전체적으로 볼 때 비합리적이다. ”(8쪽)

한층 풍요로워진 선진산업사회는 정치적 요구 대신에 개인의 욕구를 조장하고, 그것을 총족시켜 주는 것 처럼 공공복지를 강조하는 것은 이성을 구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비합리적인 이유는 ‘생산성의 발전은 인간적인 욕구와 능력의 자유로운 발달을 해치며, 그 평화는 끊임없이 전쟁의 위협을 통해 유지되고, 그 성장은 생존경쟁을 완화하기 위한 현실적 가능성을 억압’(8쪽)하는데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억압은 이전의 억압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억압은 자연적이고 기술적인 미성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압도적인 능률과 생활수준이 폭력보다는 기술을 통해 억압하고 이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기술의 진보는 지배와 통합의 모든 체제로 확대됨으로써,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을 융합시키고, 고역과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전망의 이름으로 모든 저항을 타파 또는 논파하는 듯이 보이는 생활형태를 만들어’(10쪽) 낸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사회변혁을 억제하려고 하고, 이 사회변혁의 억제는 선진산업사회가 수행한 것 중에서 아마도 가장 특이한 업적이라고 마르쿠제는 말한다.

이러한 지배와 억압을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사회라고 말한다. 일차원적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의식.언어.예술은 모두 일차원적이라는 것이다. 기술적 지배로 인하여 사람들의 의식과 언어, 예술이 다양하지 못하고 관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다차원적이지 못하고 획일화된 일차원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일차원적 사회는 반대세력을 흡수하여 사회변동을 저지하고 다른 사회제도를 만드는 사회적 변형의 길을 봉쇄한다. 이것이 선진 산업사회의 가장 큰 성과이다. 기술의 지배는 새로운 통제의 형태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선진산업사회의 기술의 지배의 의미

  과거의 지배처럼 현대 산업사회도 지배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이 지배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이라고 마르쿠제는 단정한다. 무제한의 생산으로 조절된 산업체제의 중대한 결정은 기술자와 과학자에 의해 수행된다. 이것이 바로 기술이다. 그들은 새로운 상품을 고안하고 소비자에게 인위적인 욕망을 심어줌으로써 상품을 팔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자기재생산메커니즘에 의 논리에 따라 진행한다. 그래서 이제 기술의 중립성은 없다고 마르쿠제는 말하는 것이다. 즉 기술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체로서뿐만 아니라 지배의 수단으로서 정치화 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사회는 이미 기술의 개념과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지배체제이다. 기술적인 세계로서 선진 산업사회는 하나의 정치적세계이며 특정의 역사적 투기를 실현하는 최종단계이다. 그래서 그 투기가 확대되어 가는데 따라, 그것은 언설(Discourse)과 행동,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완전한 세계를 형성한다. 기술의 매개에 의해 문화, 정치 그리고 경제는 모든 선택 가능성을 흡수 또는 거절하는 편재적인 체제로 바뀐다. 이 체제의 생산성과 성장 가능성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기술의 진보를 지배의 얼거리 내에 억제한다. 기술적인 합리성은 정치적 합리화로 바뀌게 된다.”(15쪽)

 마르쿠제에 의하면, 선진산업사회의 사람들은 기술의 통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신민이 되었다. 이들은 스스로 기술적 지배 문화에 순응한다. 이것은 기술적 지배 문화를 이성의 구현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즉, 기술의 통제가 이성의 통제이며, 이는 모든 사회집단과 이해관계를 위한 통제이기 때문에 이 통제에 반대하거나 모순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다른 반동은 허용하지 않는다. 기술적 지배로 합리화된 체제로부터 이탈은 이단이다. 기술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체제의 거부는 정신이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기술적 지배 문화에 동일화하며, 그 여건 안에서 자신들의 발전과 만족을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차원적 사회에서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생산력을 높이고 이것을 토대로 물질적 풍요가 도래하였지만, 상황은 역전되어 오히려 인간은 이러한 물질적 풍요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되고 자신의 창조성과 정체성은 상실되어 버린다. 기술에 따른 물질적 픙요, 그러나 이에 의한 맹목적 추종, 인간성의 상실은 또 다른 지배가 되는 것이다. 

3.마르쿠제의 대안

 그렇다면 이러한 기술적 지배로 벗어나기 위한 마르쿠제의 대안은 무엇인가?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안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마르쿠제는 기술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필요성을 계속적으로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쿠제 또한 이점을 인정한다.『일차원적 인간』 서론에서는 두 가지 모순에서 머뭇거릴 것이라고 말한다.(13쪽) 하나는 선진 산업사회는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있어서의 질적 변혁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억제를 돌파하여 사회를 폭파할 수 있는 세력과 경향이 존재한다. 사회변동을 억제한다는 것과 사회변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마르쿠제 또한 여기에서‘명쾌한 해답을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13쪽)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지점이 마르쿠제에게 존재하는 억압과 해방의 긴장관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낙관적 전망이나 예측을 하지는 않았다. 계몽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달리 마르쿠제는 그 구체적 대안이 없을 지라도 비관적으로 경도되지 않았다. 기술적 지배가 확고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지만 그 안에서 나올 해방의 가능성, 희망의 길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은 이러한 기술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하나의 역설로서 제시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일차원적 인간』을 벤야민의 글을 빌려오면서 결론을 맺고 있다.

“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295쪽)

4.

 그람시의‘지적. 도덕적.이데올로기적. 문화적 리더쉽’에 의한 지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지배’는 마르쿠제의 기술의 지배와 이로 인한 일차원적 인간, 일차원적 사회의 맥락과 유사하다. 이것이 현재에 시사 하는 것은 당시보다 더욱 클 것이다. 20세기 초. 중반보다 기술은 더욱더 발전하여 정보화 사회로 진입했고, 더욱더 빠르게 변모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제의 기술적 지배에 동의한다면, 이러한 정보화 사회에서의 기술적 지배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것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폰, PDA등의 제품은 인간을 다양한 삶의 형식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것은 상품화되고 문화적 컨텐츠를 제공하면서 다른 지배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마르쿠제는 오히려 그러한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기술이 정치화되어 그 중립성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 마르쿠제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물질적 조건의 성숙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자유를 향한 토대로서 본 것이다. 그리고 모순적이지만 이 지점에서 사회변동의 가능성 또한 열리게 되는 것이다. 정보화가 한편으로는 지배의 기제로서 부정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지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들 간의 소통과 유대를 증진시키고 인간의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긍정적 요소가 있다. 이러한 지배와 해방이라는 두 가지 모순적 지점에서, 부정성과 긍정성이라는 양면성의 지점에서, 변화의 가능성과 해방의 길을 놓쳐버리지 말 것을 주창한 것이 마르쿠제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 결론에서 ‘희망’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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