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초월적 감성학’의 내용을 번역자(백종현)의 해제를 참조하여(37~45쪽)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공간/시간 표상은 개념이 아니라 직관이며 그것도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이다.

②공간/시간 표상은 선험적이고 따라서 경험에 선행하므로, 그것들의 출처는 주관 안에서 찾아야만 하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주관적이다.

③그럼에도 이 주관적인 표상들은 그것들이 경험적인 그러니까 객관 관련적인 직관의 형식적인, 임의적이 아니라 필수적인 조건으로, 다시 말해  현상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한에서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1)순수직관으로서의 공간/시간

  공간과 시간은 경험적 개념, 개념도 아니고 경험적 표상도 아니다. 그것들은 한낱 순수한 직관들이다.“직관은 개별표상”으로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다.”직관은 대상과 무매개적으로 또는 “곧바로”,이른바 “직각적”으로 관계 맺는다.

  공간/시간이 개별표상인 이유는  단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 공간/시간은 만물을 “자기 안에”포용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단 하나의”, “하나뿐인”대상으로 표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간/시간이 순수한 이유는 아무런 감각도 섞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의 촉발 없이도 이미 공간/시간 표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공간/시간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하고 “선험적”인 직관이다. 그래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표상을 직관이라 규정하고, 이런 의미에서 공간/시간도 직관이라 한다면, 공간/시간이 무엇인가를 표상한다기 보다는 공간/시간이 마치 하나의 대상인 것처럼 표상된다는 것을 뜻한다.


2)공간/시간 표상의 주관성 
  공간/시간이라는 표상의 근원, 원천, 출생처는 주관 자신, 인간의 표상능력 자체에 있다. 이 두 표상의 출처는 표상하는 주관안에서 밖에 찾을 수 없다.

3)주관적 표상인 공간/시간의 경험적 직관형식으로서의 객관적 실재성 
  (1)감성의 일람작용과 형식 
    선험적이고 주관적 표상이지만, 현상의 재료가 되는 잡다한 것을 정리하는 틀이다. 공간적으로는 서로 곁하여, 시간적으로는 상호 연속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칸트는 “감각기능(감관)에 의한 선험적인 잡다의 일람작용”이라고 일컫는다.

 

 (2)공간/시간의 경험적 실재성과 초월적 관념성 
    ①공간/시간은 주관적 표상들이면서도 모든 직관의, 감관에 의한 직관/상상력에 의한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다. 즉 공간/시간은 직관의 형식으로서 경험적으로(감관에 의해서든 상상력에 의해서든)직관된 것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직관된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②형식적인 직관은 형식을 주는, 그래서 통일적인 직관함을 말한다. “모든 공간/시간 개념들이 가능하게 되는 지성의 종합은 여러 경험적 직관들을 하나의 일정한 대상과 관련하여 통일적으로 결합하기 위해서는 이 직관하는 통괄을 전제한다. 그래서 공간/시간은 현상, 곧 우리에 대한 대상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제일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③공간/시간은 경험적 직관의 형식들이다. 현상은 일정한 공간/시간 관계의 제약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시간은 현상들의 규정들이며, 그것도 현상들의 기초에 놓여 있다는 의미에서의 현상들의 본질적 규정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간/시간은 현상들, 곧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현상하는 객관들과 관련하여 실재적이다.

 그래서 공간/시간은 그 자체로는 주관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관념적”인 것이지만, 현상하는 객관들과 관련해서는 실재적, 즉 객관적으로-실재적이다. 그래서 칸트는 공간/시간은 “경험적 실재성”과 함께“초월적 관념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간/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할 수 없다. 공간/시간은 주관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일 뿐, 그것이 사물 자체의 성질이거나 존재 조건임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공간/시간은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이라는 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실체적으로도 속성적으로도 귀속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초월적 관념성”을 갖는다.


  (3) 현상의 ‘형식’과 ‘질료’로부터 얻는 결론
공간/시간은 직관이 가능하기 위한 제일의 선험적인, 주관적인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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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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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콤함

 주인공 오은수의 삶은 달콤한가? 책 표지의 저 처녀는 왜 우산을 들고 날고 있을까? 정이현의 글은 그렇게 유쾌발랄하지만은 않다. 내면의 갈등은 시니컬하게, 회색빛깔로 표출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제목과 표지는 역설을 말하는 걸까? 그렇지도 않다. 표지는 여자들의 구매를 다소 자극할 수 있도록 발랄함을 띠고 있고, 글의 전개가 시종일관 내면의 갈등과 회색빛으로만 흐르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역설이나 반어로 '달콤함'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신문 연재와 판매를 위한 마켓팅적 전략이 있다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상업성과 마켓팅으로만 기울어져 있지는 않다.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는 두개의 글 [타인의 고독]과 [순수]를 비교해볼 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면의 갈등을 사람들의 일상에서 비추어보려 했다는 점과, 또한 내면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재치있는 말투와 '화기애애'한 장면으로 말미암아 읽는이의 긴장을 이완시킨다는 점이다.  물론 이 세개의 글에서 정이현의 본질적인 색깔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주제나 소재의 측면에서는 지루한 느낌도 들지만, 이야기 전개의 다양함으로 아직까지는 커버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같은 주제나 소재가 계속 반복되면, 그것은 작가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                                             

  30을 넘어선 나이에 결혼을 할것인가 말것인가의 갈등, 직업을 바꾸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쉽사리 그만두지 못하는 갈등, 그래서 안정된 삶에 쉬이 뛰어들수 있는 용기도 없어서 사랑은 불안하지만, 표출되는 욕구마저 피할 수도  없어서, 그래서 사랑하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 주인공 오은수와 윤태오의 짤막한 사랑. 그러나  일상에서의 소소한 유쾌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야 겨우 '달콤함'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때로는 은수의 어이없는 착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안이사에게 혹시나 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려는데, 알고봤더니 안이사가 우거지 사업을 하는 것을 알게되는 장면, 혹시나 연락했던 예전 거래처 사람의 사랑놀음에 가볍게 이용당하는 장면등등), 은수, 재인, 유희와의 오래된 친구들과의 일상적 만남과 수다놀이, 그리고 친구관계의 미묘한 비밀놀이 등은 긴장감 보다는 가벼운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즐거움, 유쾌함 밑에서는 내면의 갈등과 방황의 어둠이 줄곧 흐르고 있다. 설레이는 사랑의 달콤함이 잠시이듯, 섹스의 달콤함과 오르가즘이 순간이듯, 그것은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처럼 잠시동안이며, 이내 녹아 흘러내리는 그런 달콤함일터이다.  

2/서른살의 사춘기-회색지대에서

 10대의 사춘기를 대학입시와 함께 보내고 나서 20살에 대학을 입학하고(한 두번 찐한 사랑도 있겠지), 20대 중반에 졸업하고(무엇을 할지 몰라 휴학을 몇번하기도 했겠지), 회사에 취직하는 삶을 패턴을(청년실업을 거쳐서), 서른이 될 즈음, 서른을 갓넘어설 때 돌아다본다. 대부분은 결혼을 하지만, 이에 자신없는 사람들은 다시 또 한번의 사춘기를 맞는다. 특히 여자에게는 (이것은 여자에게 방어심리를 더욱더 많이 제공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에게 특히 더 심하다.) 결혼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때로는 누군를 만날 자신이 없고, 누구와 같이 살 자신이 없어서, 때로는 사랑하는 건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어서, 그렇게 인생의 선택을 내맡기지 못하는 갈등의 지대에서 주이공 오은수는 갈등하고, 방황한다. 이것을 두고 아마도 '서른살의 사춘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은수는 연하의 태오가 좋지만, 은수가 보기에 태오는 어리다. 여기서 어려보이는 것은 사회생활 수년차의 일상적인 사회인의 시각에서의 어려보임이다. 태오는 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니, 은수의 입장에서는 장래가 걱정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은수는 태오에게 몸을 맡기지만 장래의 인생을 맡기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은수는 태오의 육체만을 탐닉하는 여자는 아니다. 은수는 태오에게 편안함을 느끼며 사랑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태오와는 결혼을 할생각이 없기에, 아마도 이별이 올거라 예감하는 은수, 그래서 사랑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애매함은 결혼과 사랑이라는 선택의 영역에서의 갈등의 결과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회시스템으로 (맞벌이 부부에, 결혼하고, 애를 낳고,...그렇게 평범하게 살것을 요구하는) 편입될 것인가 말것인간의 갈등의 지대속에 펼쳐지는 심리상태이다.

 또한 책에서는 은수의 주변을 둘러싼 친구들, 재인과 유희의 선택의 경로를 보여주는데, 재인은 갑작스레 결혼을 올리지만, 곧 이혼을 한다. 유희는 연봉좋은 회사를 그만두고 뮤지컬 배우로 전향한다. 유희는 직업을 바꾸고, 재인은 생각지도 않던 결혼을 한다. 일상에서 흔히 고민하는 결혼과 직업선택의 내용이다. 유희와 재인의 사이에, 모호한 영역에 은수는 놓여있다.

 유희는 거칠고 직설적이지만, 뒷탈이 없다. 재인은 다소 소심하고 여려 보인다. 그래서 유희는 과감히 뮤지컬배우로 전향하지만, 재인은 결혼으로 일반적 사회시스템으로의 편입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재인은? 회사의 일상을  때로는 비굴하게 상사의 비위에 적당히 맞추며, 그런 자신의 모습에 원칙적인 후배에게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마감한다.

태오와는 하루하루의 이별을 예감하는 사랑과 섹스를 즐기지만, 김영수와 선을 보러 나가 계속적으로 만난다. 때로는 겹쳐지는 약속에 은수는 놓여진다. 연하의 젊은 태오냐, 안정적인 영수냐에 놓여져 있는 은수. 게다가 오랜친구였던 유준의 사랑고백에 당황하기까지. 그렇게 중첩되는 관계와 쉬이 선택할 수 없는 주변의 배치. 이러한 회색지대에서 서른살 사춘기 처녀의 은수는 혼란스러워하고, 혼미해진다. 결국 태오와는 헤어지게되고 영수와 결혼을 작정한다. 그러나 이미 결혼은 성사 불가능하다는 복선이 깔려져 있다. (영수의 상황이 다소 전체적인 내용에서 사족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은수는 (주인공은 32살?이지만 서른살 즈음이라는 의미에서) 서른살 처녀로서 사춘기의 방황과 그 속에서의 짤막한 달콤함, 좌절감을 맛보고 다시 또 다른 일상으로 복귀한다.  



3/두 가지 시선의 세 인물의 캐릭터


[달콤한 나의 도시],[순수],[타인의 고독]을 볼 때, 정이현은 두 가지 시선을 가지고 각각 세인물을 배치한다. [타인의 고독]에서는 여자가 화자가 아니고 남자가 화자이지만, 그 맞은편에는 여자의 시선도 있다.(나와 양주희)  [순수]에서는 여자가 화자이지만 그 맞은편에는 각각 세명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남자의 시선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화자의 맞은편의 다른 하나의 시선은 수동적이다.) [타인의 고독]에서는 '나와 주희'의 관계만이 설정되어 있어서 주변의 이야기는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는 여자의 시선으로 은수, 유희, 재인이 배치되어 있고, 남자의 시선으로는 태오, 유준, 영수가 있다. (유희와 재인의 캐릭터는 짤막하게 이야기했고) 태오는 연하의 남자로서 영화의 꿈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은수의 시선에서는 불안정하고 어리기만한 사회물 먹지 않은 철부지로 보일 뿐이다. 유준은 유복한 집에서 놀고 먹는 할량이다. 유준은 오래된 친구이다. 그러나 유준의 친구같은 장난스런 고백에 당황스러워하는 은수의 시선에서는 유준은 부유한 게으름뱅이일뿐이다. 영수는 매너좋고 안정적인 벤처회사의 대표이지만, 어렷을적 상처가 깊이 패인인물이다. 은수의 시선에서는 결혼을 해도 되겠다는 배경을 가진 인물이다. 은수는 자기 자신, 유희, 재인이라는 세명의 여자의 시선에서도 둘러쌓여 있고, 태오, 유준, 영수라는 남자의 시선으로부터도 둘러쌓여있다. 그 안에서 은수는 갈팡질팡한다.  

 

4/선물


 원래 난 소설을 잘 읽지는 않는데, 인물속의 유준마냥 은수처럼 느끼는 친구에게 책 하나 사줄께 없을까 생각하던 찰나에 우연히 알라딘에서 마주쳤다. 책에서 애인과 친구의 구별은, 애인과는 섹스하고 키스를 하지만, 친구와는 섹스와 키스를 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던가?  친구에게 갖는 마음이 편안함과 나를 걱정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인지 아니면 또 다른 욕망인지를 되돌아본다. 유준은 쉽게 그 경계를 허물어 버렸지만, 쉬이 허물수 없는 묘한 경계선....

 

5/

거의 다 썼는데, 인터넷 갑자기 다운되다니 낭패다, 오기로 다시쓴다. 뭐! 삶이 그런 거 아닌가?ㅎ 막바지 무렵에 낭패보기도 하고, 낭패 속에서 다시 새로운 삶으로 재도약 하기도 하고.............  책 속의 재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나, 늦은 나이에 뮤지컬 배우로 전향한 유희나, 결혼 직전까지 가다가 아무것도 아닌 채, 다시 다른 일상으로 복귀하는 주인공 오은수나...머 그런거겠지. 그렇게 반복하지만, 그 반복은 동일한 반복이 아닌 새로움을 만드는 반복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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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그리고 들뢰즈

 

1/칸트

*형이상학 전장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초판 머리말에서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서는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그의 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165, A7-번역판본 쪽수, 번역판에 같이 표기된 쪽수) 이성은 ‘혼돈과 당착’속에 빠져있는데, 자신(이성)이 이용하는 원칙들이 모든 경험의 한계 밖에서 경험의 시금석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착오’ 의 장(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끝없는 싸움의 전장이 바로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칸트는 당시의 ‘형이상학의 전장’ 을 한편으로는 교조주의자들의 전제적 지배로 인한 무정부상태의 퇴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주의자들로 인한 시민들의 통합의 분열로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성의 혼돈과 당착이라는 문제를 회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착오조차도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교조주의자들의 전제적 지배와 회의주의자들의 분열을 엄밀히 처방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성을 꼼꼼히 조사하고 탐구하여 이성의 권한과 한계를 밝히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이성을 ‘법정’에 세운다. 이 ‘법정’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이다.  순수이성비판이란, “책들과 체계들에 대한 비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능력 일반을, 이성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추구함직한 모든 인식과 관련해서 비판함”을 뜻한다.(168, A12) 그래서 형이상학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결정하고, 형이상학의 원천과 범위, 한계를 규정하되, 이것들을 모두 원리로부터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을 ‘법정’에 세워서 인간의 인식능력을 꼼꼼히 조사하여 이성의 권한과 한계를 규정하고, 이것을 토대로 새로운 형이상학을 정초하는 것이며, 또한 그래서 이성의 전제적 지배와 회의주의자들의 분열조장에 대하여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핵심과제라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 그 동안 불확실성과 모순의 상태에 머물렀던 이유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별조차 착상하지 못하고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의 성패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해결하는냐, 아니면 이 과제가 설명하여 알기를 요구하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229, B19)

*사고방식의 전환-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칸트의 이 과제는 기존의 사고방식의 전환에서부터 시작된다. 칸트 이전까지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 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그러나 대상들을 통하여 인식이 확장될 무엇인가를 개념들에 의거해 선험적으로 이루려는 시도는 이러한 가정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즉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란,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일치성) 여부에 따라 파악되었는데, 이 주관과 객관의 관계에서 주관은 객관을 따라야 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그러나 객관을 따라야 하는 것으로, 객관을 중심으로 진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사례로 들면서 사고방식의 전환을 꾀한다. 그것은 주관이 객관을 따르는 방식을 역전시켜 객관이 주관을 따르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확정”해야 하는 것으로(182, B17), “대상이(감관의 객관으로서) 우리 직관능력의 성질을 따른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잘 부합한다는 것이다.(183, B17) 이것이 바로 “사물로부터 우리 자신이 그것들 안에 집어넣은 것만을 선험적으로 인식한다는 사고방식의 변화된 방법”이다. 이것은 천체가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의 관점을 역전시켜서 지구가 천체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따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전환)’ 라고 한다.

 칸트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변화된 방법의 토대에서 주관(주체)의 선험적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한다. 여기서 칸트가 발견하는 것은 순수직관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순수지성개념들로서 범주들이다. 공간과 시간은 (주관의) 인상들의 수용성에 기반한 대상들이 현상하는 조건으로서 직관의 형식이며, 순수지성개념들은 공간과 시간의 형식에서 현상한 것(질료?)을 (주관의) 사고들의 자발성에 기반한 사고하는 범주들이다. 그리고 이에 현상(직관)과 지성을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상상력을 (2권 원칙의 분석학) 덧붙일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어려움

 (이것은 아직 개인적인 문제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칸트는 인식능력을 꼼곰히 조사하기 위하여, 각 인식능력을 분해해서 순수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탐구하였다. 여기에서 순수함이란 당연히 경험을 배제하고, 어떤 다른 요소도 혼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야 경험에 선행하면서도,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그렇지만 경험과 곁에 있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식조건을 찾아낼 수 있고, 그래야 주체의 인식능력에서의 필연성과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선험적 종합판단을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칸트라고 생각해보자! (주관의 표상에서) 순수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했을까? 잘개 쪼개서 근원까지 추적해야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남아있는 순도100%의 인식 조건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발견해낸 것이 직관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이다. 그리고 '순수지성개념들로서 범주들'이다.

여기까지는 어려움 없이 진행될 수 있다. 혹은 이것은 자신이 가정해도 되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다음부터의 문제이다. 이것을 어떻게 일관성있게 연결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쉽지 않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은 난 2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순수지성개념들의 초월적 연역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감성과 지성의 조화문제이다. 여기서 상상력의 논란이 발생한다.  이 두 가지의 문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였고, 그런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먼저 전자의 문제는 칸트스스로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순수지성개념의 연역이라는 제목하에 수행한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 나는 이 일에 가장 많은 노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희망한대로 보상 없는 노고는 아니었다.”(171, A16)

 무엇이 그리 어려웠을까? 쉽게 말하면, 직관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없이는 대상이 현상할 수 없다는 것이 명료해 보여서 이를 해명하기는 쉽지만, 직관은 감성의  결과이고 이것은 지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순수지성개념들의 범주들 없이도 대상은 현상할 수 있기 때문에 대상과 범주들이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명료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자발적 활동으로서 사고가 어떻게 대상과 관계를 맺는것은 우연에 불과하고, 인식의 필연성이 입증되지 않는다. 또한 그 이유는, 공간과 시간 없이는 대상이 현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공간과 시간의 객관적 실재성을 확보하기가 쉽지만, 지성의 범주들은 대상이 직관에 주어지는 조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상들은 지성의 기능과 반드시 관계 맺지 않고도 현상할 수 있다. 그래서 지성이 선험적인 조건을 함유함이 없이도 현상할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해명하는 것이 '순수지성개념들의 초월적 연역'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감성과 지성의 관계문제이다. 이 둘이 어떻게 조화롭게 활동하느냐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칸트는 '상상력'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번역자도 밝히고 있다시피 논란거리중에 하나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자


상상력은 지성이 사고할 직관을 지어내 제공한다는 점에서 감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범주들에 따라서 직관을 형상화(형상적 종합)한다는 점에서는 지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규정됨으로써, 상상력이라는 것이 감성과 지성과는 다른 제 3의 심성기능인지, 아니면 저 둘의 매개기능인지, 아니면, ‘상상력’이라 통칭은 되지만, 실상은 여러 기능들인지에 대한 논란의 소재가 된다.” (360, 옮긴이 주석 131번 참조)

그래서 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주제로 '초월적 연역'의 문제와 '상상력'의 문제를 상정하고 이를 추적해간다면, 순수이성비판의 이해가 훨씬 명료해지고 흥미롭지 않을까 한다. 이 문제가 왜 발생하는지, 또 칸트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는지를 이해한다면, 칸트의 전체적인 사고의 윤곽은 잡힐 것이다. (초월적 가상, 오류추리에 이율배반의 문제를 덧붙일 수 있겠다.)

2/들뢰즈

*이 두가지 문제와 들뢰즈

들뢰즈는 이 두가지의 문제를 꼬집어서 비판하고 칸트의 주장을 역전(?)시킨다. 간략히 말하면, 첫번째 문제에 대한 칸트의 해결은 선험적-근원적 종합적 통일의 원칙으로서 '나는 사고한다'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구체적으로 하겠다.) 이 때의 '나'는 통칭 선험적 자아라고 할 수 있고, 직관속에서 현상하는 '나'는 현상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선험적 자아, 즉 '나는 사고한다'의 표상은 인식할수는 없지만(증명할 수는 없지만)모든 표상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를 들뢰즈는 임의적 전제이라고 비판한다.  들뢰즈에게서 중요한 것은 현상적 자아이다. 이것은 분할된 자아, 분열된 자아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살펴보자

"심지어 사변적 영역에서조차 새로운 형식의 동일성, 능동성을 띤 종합적 동일성을 통해 그 균열은 곧바로 메워진다. 반면 수동적 자아는 단지 수용성에 의해 정의되고,이런 자격에서 어떠한 종합적 능력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우리는 변용들을 겪는 능력인 수용성은 어떤 귀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수동적 자아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 자체가 수동적인 어떤 종합(응시-수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보았다...칸트적 창의성이 회복될 가능성은 바로 이 수동적 자아를 전혀 다르게 평가하는 데, 있다." (김상환역, 205)

여기에서 수동적 자아는 위에서 언급한 현상적 자아를 말한다. 들뢰즈에게는 모든 표상과 팔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고 가정되는 '나는 사고한다'는 동일성의 틀안으로 묶는 임의적 전제에 불과하다. 오히려 변용들을 겪는 수동적 자아, 나의 균열이 중요하다. (간략히 이야기 했지만, 이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각각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그 다음으로 상상력의 문제를 살펴보자.  이것은 <들뢰즈의 철학>(서동욱, 민음사)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능력들의 일치란 우선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지성과 감성의 일치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칸트가 이미 도식 작용론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편지 다시 일치의 문제가 제기되는가? 문제는 상상력이 지성에 종속된 능력이기 때문에 매개 역할을 해줄 수 없다는 데 있다.....칸트는 인간의 인식에는 감성과 지성이라는 두개의 줄기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 만족하고, <이 두 줄기는 아마도 하나의 공통적인,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뿌리에서 솟아 나온다>고 추측하는데서 멈추고 만다." (36~37쪽)

인용글에서의 편지는 당시의 문제제기를 했던 마이몬의 편지를 말한다. 

이렇게 선험적 자아의 문제(이것은 곧 순수지성개념들의 연역과 연관된다.)와 상상력의 문제는 들뢰즈도 문제삼는 것이다. 여기에서 칸트의 내용과 들뢰즈의 내용에서 구체적인 부분들이 많이 생략되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한바는 그 내용을 다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나에겐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런 앎도 없다. 다만, 호기심과 흥미로움을 갖고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정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의 주제에 관하여 개인적인 문제의식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3/참고자료

일단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관련 참고자료 몇 가지

 이 책의 역자 해제는 약 100쪽이다. 한권의 얇은 해설서로 내도 될 듯하다. 역자 해제는 순수이성비판의 서술구조에 맞게 각 그 내용을 압축적으로 요약해주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읽으면서 참조하면 도움이 많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또한 번역표도 따로 정리되어 있어서 번역어 관련 사항을 참조하는데 좋다.  

칸트의 해설서는 가장 좋다는 평을 받는 것 같다. 두껍지 않으면서도 잘 가이드 한다는 느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칸트의 원전을 직접인용하는 것이 많아서 해설서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좋다. 쉽게 읽는 칸트시리즈<판단력비판>, <정언명령>도 함께 참고해볼 만하다.

이것은 번역자 백종현의 칸트 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부분적으로 참조할 내용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듯하다. 그리고 <칸트 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카울바하, 서광사>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백종현이 번역하였다.  

초월적 연역의 문제는 정리하는데로 페이퍼에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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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솔직히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니 전혀 모른다. 꽤나 알려져 있는 고진의 글을 나는 기껏해야 [윤리21]을 건성으로 읽고, 그에 따라 '책임' 문제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본적이 있을 뿐이고, 현재는 '트랜스 크리틱'을 초반부 읽어가는 상태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트랜스크리틱"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정도뿐이다. 당연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니 하는 것은 볼 기회도 없었고, 근대문학의 종언이나 한국문학의 상황 같은 문학적  주제는 그다지 내가 관심 갖는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  출간 소식은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과 함께 일단은 보관함에 넣어놓게 만들고(이것은 구매 의지와 소유의 욕망이 생겼다는 의미 ㅎㅎ-5만원모아야지 2천원 마일리지 받으니까 일단은 보관은 해두자. '알뜰한 책사기'의 정신은 쿠폰 때문에 책을 사기도 하는데, 사은품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과 비슷하게..., 어쨋든 천원 쿠폰에 난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저번에 [앎의 나무] 쿠폰기간 지나서 입 맛다시며... 책샀음, 순수이성비판 나왔을 때 쿠폰은 무려 5천원이었는데 놓쳤음. 그래서 난 마음 먹었다. '신간도서 쿠폰은 꼬옥 챙겨서 사리라'고...), 도대체 근대문학의 종언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책제목만 보고) 민중이 있었을 때 문학은 무엇이고,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은 무엇인지는 알아봐야겠다는 호기심을 발동하게 만들었다.

왜?

그것은 위의 세 책의 공통점때문이다.

 협력과 공통의 성과물이라는 공통점!  이것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일테다.(이점에 나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비물질 노동과 다중]은 들뢰즈, 네그리, 하트등의 비물질 노동과 관련된 주제들을 모아서 번역한 일종의 편역서이다. 이 책의 번역에는 <조정환, 서창현, 김상운, 자율평론 번역모임>이다. ('자율평론 번역모임'이란 명칭속엔 또 다양한 사람들이 있겠지?)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는 <조정환 옮김/번역집단 협동번역>으로 되어 있다. (역자후기에는 번역집단의 활동과정, 그리고 이러한 협력의 산물을 만들고자 한, 번역집단의 가능성과 한계의 내용이 실려 있어서 이러한 공통과 협력의 의미에 대하여 곰씹어 볼 수 있게 한다.)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을 합동 평론집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져 저자가 여러 사람이라는 것을 두고 협력의 성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책 소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것은 단지 몇 개의 논문을 모아놓은 논문집이나,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인터뷰집과는 다르게 보인다. 갈무리 출판사에서 나온 위의 두 책을 볼 때, 이것은 협력의 산물로 보인다. 소통을 원하고, 연대를 원하고, 협력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주침, 그리고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과의 마주침! 계속된 마주침의 결과물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각각의 저자들은(역자들은) 여러 시간에 걸쳐 만났을 것이고, 이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 했을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써가고...때로는 마음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졌겠지?

 혼자 지은 건물, 혼자 지은 도로, 그렇게 혼자 지은 도시. 그런 '혼자의 설계도와 건축술'이 일관적일뿐만 아니라 더 완전해 보일지 모른다. 그래서 여러명의 협력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릴뿐만 아니라  일관적이지도 않고 불완전해 보여서 비효율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남과 협력은  기존의 사고를 벗어난 창조적 생각을 그 만큼 더욱 확장시켜주는 것은 아닐까?   행여나 협동과정에 있을지 모르는 한계마저도 실은 다음 도약의 에너지가 되는 것은 아닐까?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갈무리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공통점. 그 중에서의 협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책 [비물질 노동과 다중],[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서 추측해보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나의 추측이 틀린 추측은 아닐것임을 바라면서, 책의 내용을 기대해본다.

책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책을 읽고 리뷰로 쓰고자 한다.

아래의 페이퍼에는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에 관한 한겨레에서의 글이 실려 있는데, 참조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대신 나는 근대 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한겨레의  다른 글을 덧붙인다.(링크는 두개 모두 해둔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1848.html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76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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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에 한국문단은 답하라

최재봉의 문학풍경

“하나의 유령이 한국문단을 배회하고 있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유령이. 미디어, 출판자본, 문학 전공 교수, 편집자,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등등 문학을 둘러싼 모든 권력의 담지자들이 이 유령과 맞서기 위해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의 도입부를 비튼 이 구절은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숙명여대 인문학부)가 영미문학연구회의 기관지 〈안과 밖〉 제22호(2007년 상반기호)에 쓴 글의 일부다. ‘추억과 집착-〈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논의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단 이 글은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한국 문단의 반응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한국 문학의 반성과 갱신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사회적으로 시급한 문제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근대문학의 ‘끝장’을 선언한 가라타니의 주장에 대해 국내의 주류 문단은 시큰둥하지 않으면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권 교수는 그러한 태도가 솔직하지 못하거나 오해에 기반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현실에 대한 대응력을 상실한 제도적인 차원의 관성적인 문학”에 대한 가라타니의 거시적 비판은 받아들이되,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현실과 체제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시도하는 소수파 문인들과 적극적인 비평적 대화를 수행”해야 할 필요를 역설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의 메아리는 비평 전문지 〈오늘의 문예비평〉 여름호에서도 들을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이라는 이 잡지의 기획에는 세 사람의 평론가가 글을 보탰다. 이 가운데서도 문제의 책 〈근대문학의 종언〉과 가라타니의 또 다른 저서 〈언어와 비극〉을 번역한 조영일씨의 글이 흥미롭다. ‘비평의 노년-가라타니 고진과 백낙청’이라는 제목의 이 장문의 글은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가 출현하기까지의 과정을 한국 문단과의 교류 속에서 살펴보고, 비슷한 연배의 평론가인 가라타니와 백낙청의 만남과 헤어짐의 역사를 통해 그 테제가 한국의 주류 문단에 던지는 메시지를 헤아린다.

가라타니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한·일 양국을 오가며 진행된 ‘한일작가회의’에 꾸준히 참석했다. 조씨에 따르면 가라타니는 이미 1993년의 제2차 회의에서 발표한 ‘한국과 일본의 문학’이라는 글에서 ‘문학의 종언’ 테제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문지’(출판사 문학과지성사) 계열 문인들로 이루어진 한국쪽 파트너들은 그의 주장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문지의 ‘문학주의’에 실망한 가라타니는 이후 백낙청 교수로 대표되는 ‘창비’ 쪽과 접촉해 보지만, 결국 마찬가지의 실망을 경험하고 한-일 문학교류에서 손을 떼고 만다. 결론적으로 조씨는 백 교수가 최근 저서 〈한국문학의 보람〉(2006)에서 강조한 ‘한국문학의 보람’이란 곧 가라타니가 경고한 ‘문학의 종언’의 역설적인 증거일 뿐이라고 본다. “완전히 ‘문학화’된(즉 비평이 종언을 고한) 한국문학에서 문학의 적은 영화나 게임이 아니라 문학 자신”이라고 그는 일갈한다. ‘‘창비’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을 자처하는 그가 “‘창비’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역시 해체할 때가 된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 어조에서는 비장함과 아울러 씁쓸한 비애의 정조가 묻어난다.

동맹이냐 해체냐. 가라타니의 테제는 지금 한국 문단을 향해 엄중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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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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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의도로 조금씩 리뷰를 쓰고 있는데, 아니 이거 왠걸! 알라딘에서 마이리뷰에 선정되었다고 적립금을 지급해주었다. 감사하기도 하거니와 알라딘에서 서재의 공간을 대폭 개정하고, 책읽는 사람들을 위한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 공간을 만드려고 하는데, 이것이 상업적이든 아니든간에 이는 좋은 일이다. 아마도 이것이 알라딘의 특색이 되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표현과 소통의 장으로서 자리매김될 수 있기를...  아마도 이런 공간에서 각자 생각을 표현하고, 소통하고, 그렇게  맺어지는 유대관계는 창조적 사유를 열어젖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도구적 이성'에 길들여진 현대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과장이 심했다면 이해해주시길...ㅎㅎ) 어쨋든 조금씩 예전에 정리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들, 예전에 정리했던 것들을 끄집어 내어 리뷰를 써보고자 한다.

 이 책의 구성은 ['계몽의 개념'과 2개의 부연설명(오디세이, 줄리엣)과 '문화산업-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 반유대주의의 요소들(?), 스케치와 구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책을 빌려준 상태라서 정확하지는 않음) 이들은 '계몽'을 역사적으로 거슬러올라가서 비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성'에 대한 비판이다. '계몽의 개념'에서는 대부분 철학자들의 논의를 두서없이 비판하고, 부언설명의 오디세이에서는 이미 역사적 시원부터 계몽이 있었음을, 정확히 계몽의 기만이 내재해 있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문화산업은 대중을 기만하기 위한 계몽으로서의 현대의 병폐로 나타난 것이라 주장하는 것 같다. 그리고 '스케치와 구상들'은 짧은 단편 및 메모들로 이들의 생각을 조금씩 알수 있게 해준다.

 책의 내용이 난해하고 그래서 읽는이로 하여금 어렵게 만들고, 책읽기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만드는 이유는, 심지어 책한번 읽어볼라 했는데, 책을 던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만들어주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처음의 책의 출발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스위스 망명시절에 대화한 것을 녹취한 것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저자들이 체계적인 서술과 내용을 의도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내용은 두서없고 친절한 설명은 온데 간데 없고, 어려운 철학용어는 막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 내용 참조) 그것은 이들의 의도가 '계몽'비판, 즉 도구적 이성의 비판이 핵심 골자인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서술까지도 이들은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증주의적 논리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에 자신들마져도 노출시킬 수 없고(자신들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서술을 한다면, 자신들도 이성적 사고에 따른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들의 논의가 자신들도 비판하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자신들의 논의의 근거가 상실된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의도와 생각을 강하게 부여하기 위한 전술이다. (그것은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일상언어로 전환하면서 철학적 탐구를  경구처럼 이리저리 나열한 것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책은 난해하고 체계적 서술을 거부하더라도 그것은 재구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스케치와 구상들'에서의 '대화' 라는 제목을 가진 글은 이들의 의도를 한결 수월하게 파악하게 해주는 것 같다.  이것을 매개로 해서 계몽의 변증법의 핵심적인 두가지 내용만 살펴보자. 하나는 계몽 비판의 내용이고, 하나는 문화산업의 내용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참고할만 책과 내용들을 짤막하게 덧붙이고자 한다.  

1/

 인간은(정확히 서구 유럽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근대로 이행했다. ‘자유’, 평등‘을 대표적인 기치로 내걸며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들이 일어났고,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인간들의 삶을 (상대적으로) 편리하고 풍요롭게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1,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사회주의권에서는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의 관료적 독재체제라는 당초의 사회주의의 이상을 상실해 버린 체제가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로의 이행의 기반이었던 ’이성‘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계몽의 변증법』은 이성이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비판과 회의라는 의미는 근대적 사유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계몽 비판‘은 근대의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에 한정되지 않고 서양적 사유에 내재해 있는 사유의 원리로서 ’계몽‘비판 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성비판의 출발점은 니체일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의 서문에서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1903-1969), 아도르노(Theodor. W. Adorno1895-1973)는 ‘우리가 이 과제에 착수하면서 염두 해 둔 것은 다만,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12p)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류가 야만 상태에 빠진 이유는 ‘이성은 다른 모든 도구를 제작하는데 소용되는 보편적인 도구’(62p)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윤추구를 위한 효율적인 것으로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기술의 발달에만 눈이 멀어서 인간 고유의 가치는 상실되고 오히려 인간에게 획일화된 가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증주의’와 절대적 ‘체계’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학문체계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나아간다. 『계몽의 변증법』또한 체계적인 서술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상도 상품으로, 또한 언어는 상품을 위한 선전’이 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는 과정은 현재의 체계를 따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계적 서술에 대한 거부는 읽는 사람에게 난해함을 느끼게 한다.(이들이 비판하는 체계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그래서 꼼꼼히, 아니면 그냥 무심코-궁시렁 거리면서 읽어야 하는게 좋은 방법인 듯하다)

2/『계몽의 변증법』의 ‘스케치와 구상들’에서 나오는 대화(353-355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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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너는 ①의사가 되고 싶지 않니?

B:의사라는 직업은 매일매일 죽어가는 사람을 다루는데 그 때문에 의사들은 유연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제도화가 점점 진전되면서 의사들은 환자보다는 병원 경영과 병원의 위계질서를 대변한다고 여겨져. 종종 ②의사는 자신이 삶과 죽음의 주재자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지. 그는 소비자의 편이 되기보다는 대기업의 경영인처럼 되는 거야. 자동차를 파는 문제라면 다르겠지만 다루는 상품이 생명이고, 소비자는 고통 받는 인간들이라 할 때, 나는 이런 상황 속에 몸을 담기가 싫어. 가정의라는 직업은 훨씬 무해하겠지만 오늘날 가정의 제도는 점점 쇠퇴해가고 있어

A:③네 생각은 의사가 없다는 거야? 아니면 옛날의 돌팔이 의사가 되돌아와야 한다는 거야 ?

B:내 말은 나 자신이 의사가 된다는 생각이 끔찍하다는 것이고, 그것도 특히 큰 병원의 명령권을 가진 수석의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야. 병자들을 아무 손도 서보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의사와 병원이 있다는 것이 물론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나도 공공연한 비난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냐. 강도나 살인자의 존재는 그들을 교도소로 보내는 제도의 존재보다 훨씬 더 큰 악이지. ④정의는 이성적인 것이야. 나는 이성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성이 택한 형태를 올바로 인식하고 싶은 것뿐이야. 

A: 내말에는 모순이 있어. 너 자신 의사나 재판관이 만드는 이점을 이용하고 있어. 너에게도 그들처럼 잘못이 있어. 너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위해 해주고 있는 일에 너 자신은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거야. 너 자신의 존재 자체가 네가 빠져 달아나고 싶어 하는 원칙들의 전제를 이루고 있는 거야 

B: 나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냐, 그렇지만 ⑤모순은 필연적이지. 모순은 그 자체가 사회라는 객관적 모순에 대한 답이야. 오늘처럼 분화된 노동분업 사회에서는 어느 한 지점을 잡더라도 모든 사람의 죄가 딸려 올라오는 공포가 드러나지. 이러한 자각이 퍼져 나가고, 최소한 일부 사람들이라도 그러한 공포를 자각한다면 정신병원이나 교도소는 인간화 될 수 있고 법정은 언젠가는 결국 불필요한 것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만 이것이 내가 작가가 되려는 이유는 절대 아냐. ⑥나는 다만 모든 사람이 처해 있는 끔직한 상황을 좀 더 분명히 하려는 것뿐이야.

A: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생각하고 아무도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면 의사도 판사도 없게 되고 그러면 세계는 더 끔찍할 걸?

B:바로 그것이 나에게도 의문점이야.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나처럼 생각한다면, 악(惡)에 대한 해독제뿐 아니라 악 자체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은 아직은 단순한 희망사항이기 때문이지. ⑦인류 전체는 아니고 나의 사유 속에서 전체 인류를 나 자신으로 대체시킬 수는 없는 것이지. 나의 개개 행동들이 보편적 모범이 될 수 있으리라는 도덕의 원리는 의심스러운 것이야. 그러한 원리는 역사성이라는 계기를 무시하는 것이지. ⑧의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나의 태도가 왜 의사가 아예 없어야 된다는 견해와 등가물이 되어야 하지? 현실에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고 실제로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어 오늘날 직업에 부여된 한계 속에서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에게는 경의를 표하겠어. 아마 그들은 내가 너에게 설명한 비판점들을 완화 시키는 데 기여할 거야. 반대로 그들은 그들이 가진 온갖 지적 전문성과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측면을 가중시킬 수도 있는 거야. 내가 상상하고 있는 나의 존재 방식, 나의 공포와 인식욕은 내가 비록 직접적으로는 아무도 도울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의사의 직업만큼이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A: 그렇지만 네가 의학공부를 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고 또한 그 사람은 네가 없다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래도 너는 의학 공부를 할 생각이 없니?

B:너는 ⑨궁극적인 결론을 얻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엉뚱한 에를 끌어 들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비록 비실용적인 고집과 모순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⑩건강한 인간 오성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

------------------------------------------------------------------(강조와 번호는 인용자)

 인간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주술적인 것으로 위안을 삼았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며 자연으로부터 지배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계몽으로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21p)해 온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으로서 인간을 만든다는 계몽은 고삐 풀린 말처럼 자기 파괴 운동으로 나아간다. 이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성은 기술과 이윤만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고 이러한 도구로서의 이성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는다. ‘기계는 오늘날 인간을 먹여 살리기는 하지만, 인간을 불구’(73p)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정당화하기 위한 허위의식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은 초기에 인간이 주술적 힘으로서 자연에 대한 공포에 벗어나려고 했던 미신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제 계몽은 신화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①의 ‘의사’라는 직업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옛적에(?) 인간의 병과 생명을 주술로서 다스리고자 했다면, 이제는 과학으로서 치료한다. 즉 의사는 주술로부터 벗어난 계몽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의사는 본래 인간의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를 상실한 채, 환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서만 생각하면서 병원 경영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계몽이 신화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제 의사는 예전의 주술사로 돌아가 자신이 ② ‘삶과 죽음의 주재자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를 정당화하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현재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A는 ③발전된 문명(의사)을 부정하는 것이냐, 아니면 옛날의 주술사(돌팔이 의사)가 되돌아와야 되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B는 이러한 두 가지 물음에서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B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수단으로서의 이성의 형태를, 즉 현재의 슬픈 상황을 ④올바르게 바라보고 싶을 뿐이라고 응답한다. A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거기서 빠져나가려는 것 자체는 모순이 아니냐고 묻는데, B는 모순에 대한 답은 모순이라고 답한다. ⑤이것은 아도르노의 ‘특정한(규정된) 부정bestimmte Negation’의 의미라고 생각되는데, 아도르노의 특정한 부정이란, 헤겔의 대립의 지양 속에서 나오는 전체로서의 긍정은 또 하나의 신화란 것이다. 그래서 아도르노의 경우는 ‘특정한 부정을 통해 나온 결과는 긍정적으로 완결되지 않으며 궁극적인 것도 아니다. 궁극적인 것은 다만 비판으로서의 특정한 부정자체다. 모순에 대한 지적에서는 특정적이지만, 결과는 불특정적이다. 결과는 미래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54p역자주 참조) (그래서 B는 의사가 아닌 ⑥작가가 되려고 한다. 작가는 구속적이지 않고 자신의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의미에서, 특정한 부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직업으로서 제기된 것 같다.) ⑦은 ⑤의 또 한번의 강조이다. “헤겔은 물론 ‘부정’이라는 전체 과정의 의식적인 결과, 즉 ‘체계의 총체성’이나 ‘역사의 총체성’을 결론에 가서는 또다시 절대화함으로써 ‘금기’를 위반하고는 그 자신 ‘신화’에 빠지게 되었다.”(53p)는 것이다. ⑧⑨는 획일화된 사고방식, 획일화된 대답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⑩은 당시의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비판아래서 저자들이 미약하게나마 갖는 희망인 듯하다. 저자들은 ‘계몽에 대한 비판은, 맹목적인 지배에 연루된 상태에서 계몽을 풀어내줄 계몽의 긍정적 개념을 마련’(18p)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책을 읽어가다보면, 비관과 우울만의 색채가 가득한 느낌이다. 긍정과 희망은 거의 찾아볼수 없을 것 같다. 희망은 희망이 없는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일까? 벤야민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생각난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에서)

3/ 문화산업 비판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계몽이 신화로 돌아가는 의미, 즉 이성의 수단화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정당화 하는 허위의식은 문화산업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계몽에 대한 비판은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문화의 동일성 비판

『계몽의 변증법』에 의하면, 현재에 이르러 종교의 권위가 상실되고 기술과 사회의 분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사회의 다양화, 문화의 다양화가 초래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오히려 문화는 더욱더 동질화 시켜가기 때문이다. 영화와 잡지는 전체적으로나 획일화된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업의 고층 건물, 삭막한 주거 집단과 사무실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기업이 만들어낸 기념물 일뿐이다. ‘닭장 같은 집들에 사는 개개의 인간들은’ 마치 각각이 진정한 문화의 대표자인 것 같은 착각을 하지만,  허위의식으로서 계몽은 주술이 했던 것처럼 신화로 되돌아간다. 대중문화를 생산해내는 주체는 이미 대중이 아니다. 대중매체는 ‘허접 쓰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사용’(184p)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자들은 마치 대중의 동일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일한 상품을 대량생산해야 한다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문화 산업의 문제를 기술적 문제로 이전시켜 버린다. 이러한 기술적 문제로 관점을 변화시켜놓는 것은 마치 그것이 대중의 욕구에 호응한다는 거짓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기술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은 사회에 대한 경제적 강자의 지배력이라는 사실’에 다름 아니며 ‘기술적 합리성이란 지배의 합리성’(185p) 자체이기 때문인데, 이것을 마치 대중의 욕구 인 듯 포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상 독점아래에 있는 대중문화는 모두 획일적인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대중매체는 이윤만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나아가서 ‘허접 쓰레기들을 정당화화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

  예측가능성

 문화의 동일성, 정확히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획일화된 이데올로기 유포로서의 문화는 이제 ‘예측 가능함’의 희열을 맛보게 한다. 철딱서니 없는 재벌 딸을 거칠게 다루어서 사랑하게 만드는 수법, 액션영화의 비극적 결말이나 이와 상반되게 총알은 항상 주인공의 몸을 피해가는 신비성은 모두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 음악에서 가벼운 음악은 단련된 귀로서 처음 몇 마디에 노래의 리듬을 짐작할 수 있으며 자신의 추측이 맞아 들어갈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존스토리가 이들의 내용을 문화의 동일성과 예측가능성으로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다. 존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마르크스주의' 참조)  

기타 문화산업 비판의 내용

*오늘날 문화 소비자들의 자발성이나 상상력이 위축된 이유를 그 어떤 심리적 메커니즘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제작물 자체가 -그 특성이 가장 강한 것은 유성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개관적 속성에 따라 그러한 능력을 불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192p) 

*산업사회의 폭력은 사람들 마음속에서나 언제나 작용한다. 문화산업의 생산물은 여가 시간에 조차 소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노린다. 개개의 문화 생산물은 모든 사람들을 일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휴식시간에도 잡아 놓는 거대한 경제 메커니즘의 일환이다. 어떤 영화나 방송프로그램이건 언뜻 보면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작용을 사람들에게 가하려 한다. 문화 산업은 하자 없는 규격품을 만들 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하려든다.(193p)

*오늘날 영화의 책임자들에게서는 진지하게 진실성이란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사가 그들의 이데올로기다.(208p)

*현실의 불행한 사람들처럼 만화 영화 속의 도날드 덕이 채찍질 당하는 데서 관중들은 스스로가 받는 벌에 익숙해진다.(210p)

*문화산업은 그들의 소비자에 대해 자신이 끊임없이 약속하고 있는 것을 기만한다. 줄거리나 겉포장이 제공하는 즐거움을 계속 바꾸어가면서 ‘약속’은 끝없이 연장된다. 모든 관람의 필수요건인 약속은 유감스럽게도 사물의 정곡에 도달하지 못하는 기만적인 것으로서 손님은 배를 채우기 보다는 단순히 메뉴판을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212p)

*화해에서 나온 웃음이든 경악에서 나온 웃음이든 두려움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웃음이 동반된다. 웃음이 시사하고 있는 것은 육체적 위험으로부터의 해방이나 ‘논리’의 올가미로부터의 해방이다. 화해의 웃음이 마수로부터 빠져 나온 것에 대한 메아리라면 쓴 웃음은 두려운 힘에 사로잡힌 공포를 극복 하려는 데서  나온다. 쓴웃음은 빠져 달아날 수 없는 힘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다. 재미는 뜨거운 온천욕이다. 유흥(Amusement) 산업은 끊임없이 재미를 처방해 준다. 유흥 산업에서 웃음은 행복을 기만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행복의 순간들은 웃음을 알지 못한다.(213p)  

*문화 산업의 위치가 확고해지면 확고해질수록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더욱더 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문화 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만들어내고 조종하고 교육시키며 심지어는 재미를 몰 수 할 수도 있다.(218p)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문화 산업은,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인간들의 직접적 연대인 관리되는 대중의 후생복지를 반영한다.(227p)

*대중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냉소적이고 측은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만듦으로써 진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해 자신을 방어한다. 대중문화는 검열을 거친 무미건조한 행복을 흥미 있는 것으로 만들며 나아가 흥미를 손쉬운 것으로 만든다. 대중문화는 모두에게 강인하고도 진실된 인간 운명이 아직도 가능하며 그러한 운명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위안을 준다. 빈틈없이 완결된 삶-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삶을 재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에 반드시 뒤따르는 고통을 철저히 묘사 할수록 그러한 삶은 위대하고 강력한 것으로 돋보이게 된다.(229p)

*문화란 옛날부터 혁명적 또는 야만적 본능을 길들이는 데, 기여해왔다. 산업사회에서의 문화는 문화의 이러한 역할에 다른 무엇을 첨가한다. 산업사회의 문화는 사람들이 겨우겨우 감당해나가는 가혹한 삶의 조건을 부단히 연습시키는 역할을 한다.(230p)

*끊임 없이 새롭게 이 사회에 대한 도덕적 순종을 표시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성년식 때 신부(神父)가 두드리는 박자에 맞춰 웃음 띤 얼굴을 하고서는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소년들을 연상시킨다.후기 자본주의 시대에서 삶이란 지속적인 세례의식이다.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그를 때리는 폭력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흐느적 거림을 조롱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규칙으로 만드는 재즈적인 분절법의 원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상적 저음 가수의 내시 같은 음성, 턱시도를 입고 수영장에 빠지는, 상속녀의 잘생긴 정부는 체계가 그에게 무엇을 강요하든 거기에 자신을 맞춰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다.(231p)

*대량 생산된 사치품들을 값싸게 공급하고 부풀려서 칭찬을 해대는 광범위한 사기에 의해 예술의 상품적 성격자체에 변화가 초래된다. 예술이 상품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진짜 새로운 것은 그러한 사실을 내놓고 떠들고 다니며, 예술자신이 자율성을 포기하고 상품의 일원이 되었음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236p)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어떤 무엇이 아니라 교환될 수 있는 무엇일때만 가치를 갖는다. 예술의 사용가치, 즉 예술의 존재는 ‘물신’으로 여겨지며, 예술작품의 수준이라고 오해되는 예술의 사회적 평가라는 물신이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용가치나 질(質)이 된다.

*헐 값에 대량판매가 교양이라는 특권을 폐기 시켰다는 것은 대중에게 예전에는 접근이 거부되었던 영역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현재의 사회조건 아래서는 교양의 상실과 야만적 무질서의 증가를 의미한다.(241p)

*수용자와 예술사이의 거리가 없어지게 됨에 따라 예술이나 수용자는 모두 물건 비슷한 것이 되고 소외는 완성된다.(242p)

*19세기부터 있어온 건물들은 부끄럽게도 소비 상품과 주거용 모두를 위해 이용될 수 있도록 건축되었음을 보여주는 데, 그러한 건물들은 땅바닥으로부터 지붕 꼭대기 까지 포스터와 간판으로 온통 덮혀 있다.(245p)

*기술면에 있어서나 경제면에 있어서나 선전과 문화 산업은 하나로 용해된다.(246p)

*소비자는 자신이 말하는 언어를 통해 그 자신 문화의 선전적 성격에 일정한 기여를 한다. 언어가 단순한 전달기능으로 완벽히 해소되어 버리고, 말이 실체를 지닌 의미의 담지자이기 보다는 질(質)을 상실한 기호가 되어버릴 수록, 언어는 더욱더 순수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게 되지만, 언어는 그럴수록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것이 된다. 전체 계몽의 과정의 한 요소로서 언어의 ‘탈신화화’는 주술로 돌아간다. 말과 말속에 담긴 내용은 각각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될 때 비로소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이다.(246p)

*언어는 그 반대 극단인 주술적 언어와 유사해진다.(247p)

4/  요약

『계몽의 변증법』은 인간의 이성이 인간을 주인으로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현상에 대한 회의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이성이 인간을 자유와 행복을 기치로 내걸며 등장했지만, 실제로 인간을 수단화시키고 이윤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초기에 인간은 자연의 두려움과 공포를 허구적인 신화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성은 신화로부터 인간을 구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이성은 ‘고삐 풀린 말’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추구를 위한 효율성만을 추구하며 자기 파괴운동으로 나아가고 거짓으로서 정당화한다. 거짓으로서의 구체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문화산업이다. 그래서 문화산업은 대중을 기만하는 계몽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신화로부터 구하고자 했던 계몽은 이제 다시 신화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책이 난해하고, 내용들이 뒤엉켜있어 산만하지만, 그러나 이들의 비판이 부적절하다고만 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들의 ‘계몽비판’이 또 다시 ‘계몽’의 범주로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체계적 서술은 ‘계몽’적 서술과 맞닿아 있는 형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체계적 서술과 탄탄한 논리로 비판을 가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설득과 강요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고 강요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계몽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즉 세계대전의 잔인함과 폭력성, 유태인에 대한 탄압, 소련의 변질속에서 혁명적 가능성과 전망을 찾아내기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저자들에게서 베어나는 우울함과 쓸쓸함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어디서 찾아내야 하는가? 어디서 대안을 찾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론 저자들은 ‘계몽에 대한 비판은, 맹목적인 지배에 연루된 상태에서 계몽을 풀어내줄 계몽의 긍정적 개념을 마련’(18p)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대답이 되지 못한 채 각자의 깨달음 정도에 맡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비록 계몽의 범주에 말려들더라도 희망과 대안은 다시 인간에게서 찾아야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즉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현재의 사회가 인간들을 왜곡하고 있다면, 현재 관계 속에서 개인들이 왜곡되고 있다면, 이러한 관계들을 피할 수가 없다면, 오히려 이 지점에서 다시 인간의 관계들을 재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복잡하고 다양화된 사회로 접어들면서 획일화와 체계라는 것들이 거부되고 소위 ‘반이성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획일화와 체계가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고 그것이 또 하나의 억압과 왜곡이라면 그것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의 삶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타자에 대한 관계성을 잃어버리게 한다면, 이것 또한 적절하지 못하다. 그래서 각자의 삶으로만 회귀하는 것만이 아닌 관계 속에서 저항을 말할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5/ 참조할 내용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 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살림- 이 책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접한 자신의(노명우) 유학생활의 경험과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유학을 떠난 자신의 자괴감 속에서 접한 계몽의 변증법의 충격을 자신의 상황과 관련하여 솔직하게 말해주는 내용이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왠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관, 우울과 저자(노명우)의 어떤 자괴감이 묘하게 이미지 안에서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살림의 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해설서로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위르겐 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에서 5장이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내용이다. 처음에는 <계몽의 변증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 다음으로는 니체와 같은점과 다른점을 구분하여 이들을 비판한다. 결국 하버마스의 비판은 이들이 총체화된 이데올로기 비판을 진행하면서 수행모순에 빠진다는 논지이다. (다른 페이퍼에 언급했지만, 이 책 번역은 정말 꽝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1>, 장춘익 역, 나남 출판사- 에서 4.'루카치로부터 아도르노:물화로서의 합리화'도 참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도구적 이성비판'에서 루카치의 물화개념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권용선, <이성의 신화다:계몽의 변증법>, 그린비- 이것은 안 읽어봐서 잘모르겠지만, 참조가 될 것 같다.

-그 외 논문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 써놓은 것이 있었는데도,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런 이런...모쪼록 조금이라도 책을 사고 읽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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