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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ㅣ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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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의도로 조금씩 리뷰를 쓰고 있는데, 아니 이거 왠걸! 알라딘에서 마이리뷰에 선정되었다고 적립금을 지급해주었다. 감사하기도 하거니와 알라딘에서 서재의 공간을 대폭 개정하고, 책읽는 사람들을 위한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 공간을 만드려고 하는데, 이것이 상업적이든 아니든간에 이는 좋은 일이다. 아마도 이것이 알라딘의 특색이 되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표현과 소통의 장으로서 자리매김될 수 있기를... 아마도 이런 공간에서 각자 생각을 표현하고, 소통하고, 그렇게 맺어지는 유대관계는 창조적 사유를 열어젖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도구적 이성'에 길들여진 현대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과장이 심했다면 이해해주시길...ㅎㅎ) 어쨋든 조금씩 예전에 정리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들, 예전에 정리했던 것들을 끄집어 내어 리뷰를 써보고자 한다.
이 책의 구성은 ['계몽의 개념'과 2개의 부연설명(오디세이, 줄리엣)과 '문화산업-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 반유대주의의 요소들(?), 스케치와 구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책을 빌려준 상태라서 정확하지는 않음) 이들은 '계몽'을 역사적으로 거슬러올라가서 비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성'에 대한 비판이다. '계몽의 개념'에서는 대부분 철학자들의 논의를 두서없이 비판하고, 부언설명의 오디세이에서는 이미 역사적 시원부터 계몽이 있었음을, 정확히 계몽의 기만이 내재해 있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문화산업은 대중을 기만하기 위한 계몽으로서의 현대의 병폐로 나타난 것이라 주장하는 것 같다. 그리고 '스케치와 구상들'은 짧은 단편 및 메모들로 이들의 생각을 조금씩 알수 있게 해준다.
책의 내용이 난해하고 그래서 읽는이로 하여금 어렵게 만들고, 책읽기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만드는 이유는, 심지어 책한번 읽어볼라 했는데, 책을 던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만들어주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처음의 책의 출발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스위스 망명시절에 대화한 것을 녹취한 것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저자들이 체계적인 서술과 내용을 의도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내용은 두서없고 친절한 설명은 온데 간데 없고, 어려운 철학용어는 막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 내용 참조) 그것은 이들의 의도가 '계몽'비판, 즉 도구적 이성의 비판이 핵심 골자인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서술까지도 이들은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증주의적 논리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에 자신들마져도 노출시킬 수 없고(자신들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서술을 한다면, 자신들도 이성적 사고에 따른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들의 논의가 자신들도 비판하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자신들의 논의의 근거가 상실된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의도와 생각을 강하게 부여하기 위한 전술이다. (그것은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일상언어로 전환하면서 철학적 탐구를 경구처럼 이리저리 나열한 것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책은 난해하고 체계적 서술을 거부하더라도 그것은 재구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스케치와 구상들'에서의 '대화' 라는 제목을 가진 글은 이들의 의도를 한결 수월하게 파악하게 해주는 것 같다. 이것을 매개로 해서 계몽의 변증법의 핵심적인 두가지 내용만 살펴보자. 하나는 계몽 비판의 내용이고, 하나는 문화산업의 내용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참고할만 책과 내용들을 짤막하게 덧붙이고자 한다.
1/
인간은(정확히 서구 유럽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근대로 이행했다. ‘자유’, 평등‘을 대표적인 기치로 내걸며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들이 일어났고,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인간들의 삶을 (상대적으로) 편리하고 풍요롭게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1,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사회주의권에서는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의 관료적 독재체제라는 당초의 사회주의의 이상을 상실해 버린 체제가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로의 이행의 기반이었던 ’이성‘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계몽의 변증법』은 이성이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비판과 회의라는 의미는 근대적 사유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계몽 비판‘은 근대의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에 한정되지 않고 서양적 사유에 내재해 있는 사유의 원리로서 ’계몽‘비판 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성비판의 출발점은 니체일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의 서문에서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1903-1969), 아도르노(Theodor. W. Adorno1895-1973)는 ‘우리가 이 과제에 착수하면서 염두 해 둔 것은 다만,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12p)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류가 야만 상태에 빠진 이유는 ‘이성은 다른 모든 도구를 제작하는데 소용되는 보편적인 도구’(62p)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윤추구를 위한 효율적인 것으로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기술의 발달에만 눈이 멀어서 인간 고유의 가치는 상실되고 오히려 인간에게 획일화된 가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증주의’와 절대적 ‘체계’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학문체계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나아간다. 『계몽의 변증법』또한 체계적인 서술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상도 상품으로, 또한 언어는 상품을 위한 선전’이 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는 과정은 현재의 체계를 따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계적 서술에 대한 거부는 읽는 사람에게 난해함을 느끼게 한다.(이들이 비판하는 체계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그래서 꼼꼼히, 아니면 그냥 무심코-궁시렁 거리면서 읽어야 하는게 좋은 방법인 듯하다)
2/『계몽의 변증법』의 ‘스케치와 구상들’에서 나오는 대화(353-355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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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너는 ①의사가 되고 싶지 않니?
B:의사라는 직업은 매일매일 죽어가는 사람을 다루는데 그 때문에 의사들은 유연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제도화가 점점 진전되면서 의사들은 환자보다는 병원 경영과 병원의 위계질서를 대변한다고 여겨져. 종종 ②의사는 자신이 삶과 죽음의 주재자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지. 그는 소비자의 편이 되기보다는 대기업의 경영인처럼 되는 거야. 자동차를 파는 문제라면 다르겠지만 다루는 상품이 생명이고, 소비자는 고통 받는 인간들이라 할 때, 나는 이런 상황 속에 몸을 담기가 싫어. 가정의라는 직업은 훨씬 무해하겠지만 오늘날 가정의 제도는 점점 쇠퇴해가고 있어
A:③네 생각은 의사가 없다는 거야? 아니면 옛날의 돌팔이 의사가 되돌아와야 한다는 거야 ?
B:내 말은 나 자신이 의사가 된다는 생각이 끔찍하다는 것이고, 그것도 특히 큰 병원의 명령권을 가진 수석의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야. 병자들을 아무 손도 서보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의사와 병원이 있다는 것이 물론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나도 공공연한 비난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냐. 강도나 살인자의 존재는 그들을 교도소로 보내는 제도의 존재보다 훨씬 더 큰 악이지. ④정의는 이성적인 것이야. 나는 이성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성이 택한 형태를 올바로 인식하고 싶은 것뿐이야.
A: 내말에는 모순이 있어. 너 자신 의사나 재판관이 만드는 이점을 이용하고 있어. 너에게도 그들처럼 잘못이 있어. 너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위해 해주고 있는 일에 너 자신은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거야. 너 자신의 존재 자체가 네가 빠져 달아나고 싶어 하는 원칙들의 전제를 이루고 있는 거야
B: 나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냐, 그렇지만 ⑤모순은 필연적이지. 모순은 그 자체가 사회라는 객관적 모순에 대한 답이야. 오늘처럼 분화된 노동분업 사회에서는 어느 한 지점을 잡더라도 모든 사람의 죄가 딸려 올라오는 공포가 드러나지. 이러한 자각이 퍼져 나가고, 최소한 일부 사람들이라도 그러한 공포를 자각한다면 정신병원이나 교도소는 인간화 될 수 있고 법정은 언젠가는 결국 불필요한 것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만 이것이 내가 작가가 되려는 이유는 절대 아냐. ⑥나는 다만 모든 사람이 처해 있는 끔직한 상황을 좀 더 분명히 하려는 것뿐이야.
A: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생각하고 아무도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면 의사도 판사도 없게 되고 그러면 세계는 더 끔찍할 걸?
B:바로 그것이 나에게도 의문점이야.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나처럼 생각한다면, 악(惡)에 대한 해독제뿐 아니라 악 자체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은 아직은 단순한 희망사항이기 때문이지. ⑦인류 전체는 아니고 나의 사유 속에서 전체 인류를 나 자신으로 대체시킬 수는 없는 것이지. 나의 개개 행동들이 보편적 모범이 될 수 있으리라는 도덕의 원리는 의심스러운 것이야. 그러한 원리는 역사성이라는 계기를 무시하는 것이지. ⑧의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나의 태도가 왜 의사가 아예 없어야 된다는 견해와 등가물이 되어야 하지? 현실에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고 실제로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어 오늘날 직업에 부여된 한계 속에서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에게는 경의를 표하겠어. 아마 그들은 내가 너에게 설명한 비판점들을 완화 시키는 데 기여할 거야. 반대로 그들은 그들이 가진 온갖 지적 전문성과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측면을 가중시킬 수도 있는 거야. 내가 상상하고 있는 나의 존재 방식, 나의 공포와 인식욕은 내가 비록 직접적으로는 아무도 도울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의사의 직업만큼이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A: 그렇지만 네가 의학공부를 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고 또한 그 사람은 네가 없다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래도 너는 의학 공부를 할 생각이 없니?
B:너는 ⑨궁극적인 결론을 얻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엉뚱한 에를 끌어 들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비록 비실용적인 고집과 모순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⑩건강한 인간 오성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
------------------------------------------------------------------(강조와 번호는 인용자)
인간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주술적인 것으로 위안을 삼았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며 자연으로부터 지배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계몽으로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21p)해 온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으로서 인간을 만든다는 계몽은 고삐 풀린 말처럼 자기 파괴 운동으로 나아간다. 이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성은 기술과 이윤만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고 이러한 도구로서의 이성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는다. ‘기계는 오늘날 인간을 먹여 살리기는 하지만, 인간을 불구’(73p)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정당화하기 위한 허위의식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은 초기에 인간이 주술적 힘으로서 자연에 대한 공포에 벗어나려고 했던 미신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제 계몽은 신화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①의 ‘의사’라는 직업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옛적에(?) 인간의 병과 생명을 주술로서 다스리고자 했다면, 이제는 과학으로서 치료한다. 즉 의사는 주술로부터 벗어난 계몽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의사는 본래 인간의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를 상실한 채, 환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서만 생각하면서 병원 경영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계몽이 신화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제 의사는 예전의 주술사로 돌아가 자신이 ② ‘삶과 죽음의 주재자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를 정당화하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현재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A는 ③발전된 문명(의사)을 부정하는 것이냐, 아니면 옛날의 주술사(돌팔이 의사)가 되돌아와야 되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B는 이러한 두 가지 물음에서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B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수단으로서의 이성의 형태를, 즉 현재의 슬픈 상황을 ④올바르게 바라보고 싶을 뿐이라고 응답한다. A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거기서 빠져나가려는 것 자체는 모순이 아니냐고 묻는데, B는 모순에 대한 답은 모순이라고 답한다. ⑤이것은 아도르노의 ‘특정한(규정된) 부정bestimmte Negation’의 의미라고 생각되는데, 아도르노의 특정한 부정이란, 헤겔의 대립의 지양 속에서 나오는 전체로서의 긍정은 또 하나의 신화란 것이다. 그래서 아도르노의 경우는 ‘특정한 부정을 통해 나온 결과는 긍정적으로 완결되지 않으며 궁극적인 것도 아니다. 궁극적인 것은 다만 비판으로서의 특정한 부정자체다. 모순에 대한 지적에서는 특정적이지만, 결과는 불특정적이다. 결과는 미래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54p역자주 참조) (그래서 B는 의사가 아닌 ⑥작가가 되려고 한다. 작가는 구속적이지 않고 자신의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의미에서, 특정한 부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직업으로서 제기된 것 같다.) ⑦은 ⑤의 또 한번의 강조이다. “헤겔은 물론 ‘부정’이라는 전체 과정의 의식적인 결과, 즉 ‘체계의 총체성’이나 ‘역사의 총체성’을 결론에 가서는 또다시 절대화함으로써 ‘금기’를 위반하고는 그 자신 ‘신화’에 빠지게 되었다.”(53p)는 것이다. ⑧⑨는 획일화된 사고방식, 획일화된 대답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⑩은 당시의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비판아래서 저자들이 미약하게나마 갖는 희망인 듯하다. 저자들은 ‘계몽에 대한 비판은, 맹목적인 지배에 연루된 상태에서 계몽을 풀어내줄 계몽의 긍정적 개념을 마련’(18p)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책을 읽어가다보면, 비관과 우울만의 색채가 가득한 느낌이다. 긍정과 희망은 거의 찾아볼수 없을 것 같다. 희망은 희망이 없는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일까? 벤야민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생각난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에서)
3/ 문화산업 비판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계몽이 신화로 돌아가는 의미, 즉 이성의 수단화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정당화 하는 허위의식은 문화산업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계몽에 대한 비판은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문화의 동일성 비판
『계몽의 변증법』에 의하면, 현재에 이르러 종교의 권위가 상실되고 기술과 사회의 분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사회의 다양화, 문화의 다양화가 초래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오히려 문화는 더욱더 동질화 시켜가기 때문이다. 영화와 잡지는 전체적으로나 획일화된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업의 고층 건물, 삭막한 주거 집단과 사무실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기업이 만들어낸 기념물 일뿐이다. ‘닭장 같은 집들에 사는 개개의 인간들은’ 마치 각각이 진정한 문화의 대표자인 것 같은 착각을 하지만, 허위의식으로서 계몽은 주술이 했던 것처럼 신화로 되돌아간다. 대중문화를 생산해내는 주체는 이미 대중이 아니다. 대중매체는 ‘허접 쓰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사용’(184p)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자들은 마치 대중의 동일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일한 상품을 대량생산해야 한다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문화 산업의 문제를 기술적 문제로 이전시켜 버린다. 이러한 기술적 문제로 관점을 변화시켜놓는 것은 마치 그것이 대중의 욕구에 호응한다는 거짓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기술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은 사회에 대한 경제적 강자의 지배력이라는 사실’에 다름 아니며 ‘기술적 합리성이란 지배의 합리성’(185p) 자체이기 때문인데, 이것을 마치 대중의 욕구 인 듯 포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상 독점아래에 있는 대중문화는 모두 획일적인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대중매체는 이윤만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나아가서 ‘허접 쓰레기들을 정당화화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
예측가능성
문화의 동일성, 정확히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획일화된 이데올로기 유포로서의 문화는 이제 ‘예측 가능함’의 희열을 맛보게 한다. 철딱서니 없는 재벌 딸을 거칠게 다루어서 사랑하게 만드는 수법, 액션영화의 비극적 결말이나 이와 상반되게 총알은 항상 주인공의 몸을 피해가는 신비성은 모두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 음악에서 가벼운 음악은 단련된 귀로서 처음 몇 마디에 노래의 리듬을 짐작할 수 있으며 자신의 추측이 맞아 들어갈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존스토리가 이들의 내용을 문화의 동일성과 예측가능성으로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다. 존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마르크스주의' 참조)
기타 문화산업 비판의 내용
*오늘날 문화 소비자들의 자발성이나 상상력이 위축된 이유를 그 어떤 심리적 메커니즘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제작물 자체가 -그 특성이 가장 강한 것은 유성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개관적 속성에 따라 그러한 능력을 불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192p)
*산업사회의 폭력은 사람들 마음속에서나 언제나 작용한다. 문화산업의 생산물은 여가 시간에 조차 소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노린다. 개개의 문화 생산물은 모든 사람들을 일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휴식시간에도 잡아 놓는 거대한 경제 메커니즘의 일환이다. 어떤 영화나 방송프로그램이건 언뜻 보면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작용을 사람들에게 가하려 한다. 문화 산업은 하자 없는 규격품을 만들 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하려든다.(193p)
*오늘날 영화의 책임자들에게서는 진지하게 진실성이란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사가 그들의 이데올로기다.(208p)
*현실의 불행한 사람들처럼 만화 영화 속의 도날드 덕이 채찍질 당하는 데서 관중들은 스스로가 받는 벌에 익숙해진다.(210p)
*문화산업은 그들의 소비자에 대해 자신이 끊임없이 약속하고 있는 것을 기만한다. 줄거리나 겉포장이 제공하는 즐거움을 계속 바꾸어가면서 ‘약속’은 끝없이 연장된다. 모든 관람의 필수요건인 약속은 유감스럽게도 사물의 정곡에 도달하지 못하는 기만적인 것으로서 손님은 배를 채우기 보다는 단순히 메뉴판을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212p)
*화해에서 나온 웃음이든 경악에서 나온 웃음이든 두려움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웃음이 동반된다. 웃음이 시사하고 있는 것은 육체적 위험으로부터의 해방이나 ‘논리’의 올가미로부터의 해방이다. 화해의 웃음이 마수로부터 빠져 나온 것에 대한 메아리라면 쓴 웃음은 두려운 힘에 사로잡힌 공포를 극복 하려는 데서 나온다. 쓴웃음은 빠져 달아날 수 없는 힘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다. 재미는 뜨거운 온천욕이다. 유흥(Amusement) 산업은 끊임없이 재미를 처방해 준다. 유흥 산업에서 웃음은 행복을 기만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행복의 순간들은 웃음을 알지 못한다.(213p)
*문화 산업의 위치가 확고해지면 확고해질수록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더욱더 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문화 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만들어내고 조종하고 교육시키며 심지어는 재미를 몰 수 할 수도 있다.(218p)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문화 산업은,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인간들의 직접적 연대인 관리되는 대중의 후생복지를 반영한다.(227p)
*대중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냉소적이고 측은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만듦으로써 진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해 자신을 방어한다. 대중문화는 검열을 거친 무미건조한 행복을 흥미 있는 것으로 만들며 나아가 흥미를 손쉬운 것으로 만든다. 대중문화는 모두에게 강인하고도 진실된 인간 운명이 아직도 가능하며 그러한 운명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위안을 준다. 빈틈없이 완결된 삶-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삶을 재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에 반드시 뒤따르는 고통을 철저히 묘사 할수록 그러한 삶은 위대하고 강력한 것으로 돋보이게 된다.(229p)
*문화란 옛날부터 혁명적 또는 야만적 본능을 길들이는 데, 기여해왔다. 산업사회에서의 문화는 문화의 이러한 역할에 다른 무엇을 첨가한다. 산업사회의 문화는 사람들이 겨우겨우 감당해나가는 가혹한 삶의 조건을 부단히 연습시키는 역할을 한다.(230p)
*끊임 없이 새롭게 이 사회에 대한 도덕적 순종을 표시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성년식 때 신부(神父)가 두드리는 박자에 맞춰 웃음 띤 얼굴을 하고서는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소년들을 연상시킨다.후기 자본주의 시대에서 삶이란 지속적인 세례의식이다.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그를 때리는 폭력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흐느적 거림을 조롱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규칙으로 만드는 재즈적인 분절법의 원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상적 저음 가수의 내시 같은 음성, 턱시도를 입고 수영장에 빠지는, 상속녀의 잘생긴 정부는 체계가 그에게 무엇을 강요하든 거기에 자신을 맞춰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다.(231p)
*대량 생산된 사치품들을 값싸게 공급하고 부풀려서 칭찬을 해대는 광범위한 사기에 의해 예술의 상품적 성격자체에 변화가 초래된다. 예술이 상품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진짜 새로운 것은 그러한 사실을 내놓고 떠들고 다니며, 예술자신이 자율성을 포기하고 상품의 일원이 되었음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236p)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어떤 무엇이 아니라 교환될 수 있는 무엇일때만 가치를 갖는다. 예술의 사용가치, 즉 예술의 존재는 ‘물신’으로 여겨지며, 예술작품의 수준이라고 오해되는 예술의 사회적 평가라는 물신이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용가치나 질(質)이 된다.
*헐 값에 대량판매가 교양이라는 특권을 폐기 시켰다는 것은 대중에게 예전에는 접근이 거부되었던 영역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현재의 사회조건 아래서는 교양의 상실과 야만적 무질서의 증가를 의미한다.(241p)
*수용자와 예술사이의 거리가 없어지게 됨에 따라 예술이나 수용자는 모두 물건 비슷한 것이 되고 소외는 완성된다.(242p)
*19세기부터 있어온 건물들은 부끄럽게도 소비 상품과 주거용 모두를 위해 이용될 수 있도록 건축되었음을 보여주는 데, 그러한 건물들은 땅바닥으로부터 지붕 꼭대기 까지 포스터와 간판으로 온통 덮혀 있다.(245p)
*기술면에 있어서나 경제면에 있어서나 선전과 문화 산업은 하나로 용해된다.(246p)
*소비자는 자신이 말하는 언어를 통해 그 자신 문화의 선전적 성격에 일정한 기여를 한다. 언어가 단순한 전달기능으로 완벽히 해소되어 버리고, 말이 실체를 지닌 의미의 담지자이기 보다는 질(質)을 상실한 기호가 되어버릴 수록, 언어는 더욱더 순수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게 되지만, 언어는 그럴수록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것이 된다. 전체 계몽의 과정의 한 요소로서 언어의 ‘탈신화화’는 주술로 돌아간다. 말과 말속에 담긴 내용은 각각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될 때 비로소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이다.(246p)
*언어는 그 반대 극단인 주술적 언어와 유사해진다.(247p)
4/ 요약
『계몽의 변증법』은 인간의 이성이 인간을 주인으로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현상에 대한 회의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이성이 인간을 자유와 행복을 기치로 내걸며 등장했지만, 실제로 인간을 수단화시키고 이윤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초기에 인간은 자연의 두려움과 공포를 허구적인 신화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성은 신화로부터 인간을 구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이성은 ‘고삐 풀린 말’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추구를 위한 효율성만을 추구하며 자기 파괴운동으로 나아가고 거짓으로서 정당화한다. 거짓으로서의 구체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문화산업이다. 그래서 문화산업은 대중을 기만하는 계몽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신화로부터 구하고자 했던 계몽은 이제 다시 신화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책이 난해하고, 내용들이 뒤엉켜있어 산만하지만, 그러나 이들의 비판이 부적절하다고만 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들의 ‘계몽비판’이 또 다시 ‘계몽’의 범주로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체계적 서술은 ‘계몽’적 서술과 맞닿아 있는 형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체계적 서술과 탄탄한 논리로 비판을 가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설득과 강요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고 강요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계몽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즉 세계대전의 잔인함과 폭력성, 유태인에 대한 탄압, 소련의 변질속에서 혁명적 가능성과 전망을 찾아내기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저자들에게서 베어나는 우울함과 쓸쓸함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어디서 찾아내야 하는가? 어디서 대안을 찾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론 저자들은 ‘계몽에 대한 비판은, 맹목적인 지배에 연루된 상태에서 계몽을 풀어내줄 계몽의 긍정적 개념을 마련’(18p)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대답이 되지 못한 채 각자의 깨달음 정도에 맡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비록 계몽의 범주에 말려들더라도 희망과 대안은 다시 인간에게서 찾아야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즉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현재의 사회가 인간들을 왜곡하고 있다면, 현재 관계 속에서 개인들이 왜곡되고 있다면, 이러한 관계들을 피할 수가 없다면, 오히려 이 지점에서 다시 인간의 관계들을 재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복잡하고 다양화된 사회로 접어들면서 획일화와 체계라는 것들이 거부되고 소위 ‘반이성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획일화와 체계가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고 그것이 또 하나의 억압과 왜곡이라면 그것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의 삶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타자에 대한 관계성을 잃어버리게 한다면, 이것 또한 적절하지 못하다. 그래서 각자의 삶으로만 회귀하는 것만이 아닌 관계 속에서 저항을 말할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5/ 참조할 내용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 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살림- 이 책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접한 자신의(노명우) 유학생활의 경험과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유학을 떠난 자신의 자괴감 속에서 접한 계몽의 변증법의 충격을 자신의 상황과 관련하여 솔직하게 말해주는 내용이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왠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관, 우울과 저자(노명우)의 어떤 자괴감이 묘하게 이미지 안에서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살림의 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해설서로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위르겐 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에서 5장이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내용이다. 처음에는 <계몽의 변증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 다음으로는 니체와 같은점과 다른점을 구분하여 이들을 비판한다. 결국 하버마스의 비판은 이들이 총체화된 이데올로기 비판을 진행하면서 수행모순에 빠진다는 논지이다. (다른 페이퍼에 언급했지만, 이 책 번역은 정말 꽝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1>, 장춘익 역, 나남 출판사- 에서 4.'루카치로부터 아도르노:물화로서의 합리화'도 참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도구적 이성비판'에서 루카치의 물화개념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권용선, <이성의 신화다:계몽의 변증법>, 그린비- 이것은 안 읽어봐서 잘모르겠지만, 참조가 될 것 같다.
-그 외 논문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 써놓은 것이 있었는데도,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런 이런...모쪼록 조금이라도 책을 사고 읽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