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솔직히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니 전혀 모른다. 꽤나 알려져 있는 고진의 글을 나는 기껏해야 [윤리21]을 건성으로 읽고, 그에 따라 '책임' 문제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본적이 있을 뿐이고, 현재는 '트랜스 크리틱'을 초반부 읽어가는 상태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트랜스크리틱"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정도뿐이다. 당연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니 하는 것은 볼 기회도 없었고, 근대문학의 종언이나 한국문학의 상황 같은 문학적  주제는 그다지 내가 관심 갖는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  출간 소식은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과 함께 일단은 보관함에 넣어놓게 만들고(이것은 구매 의지와 소유의 욕망이 생겼다는 의미 ㅎㅎ-5만원모아야지 2천원 마일리지 받으니까 일단은 보관은 해두자. '알뜰한 책사기'의 정신은 쿠폰 때문에 책을 사기도 하는데, 사은품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과 비슷하게..., 어쨋든 천원 쿠폰에 난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저번에 [앎의 나무] 쿠폰기간 지나서 입 맛다시며... 책샀음, 순수이성비판 나왔을 때 쿠폰은 무려 5천원이었는데 놓쳤음. 그래서 난 마음 먹었다. '신간도서 쿠폰은 꼬옥 챙겨서 사리라'고...), 도대체 근대문학의 종언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책제목만 보고) 민중이 있었을 때 문학은 무엇이고,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은 무엇인지는 알아봐야겠다는 호기심을 발동하게 만들었다.

왜?

그것은 위의 세 책의 공통점때문이다.

 협력과 공통의 성과물이라는 공통점!  이것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일테다.(이점에 나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비물질 노동과 다중]은 들뢰즈, 네그리, 하트등의 비물질 노동과 관련된 주제들을 모아서 번역한 일종의 편역서이다. 이 책의 번역에는 <조정환, 서창현, 김상운, 자율평론 번역모임>이다. ('자율평론 번역모임'이란 명칭속엔 또 다양한 사람들이 있겠지?)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는 <조정환 옮김/번역집단 협동번역>으로 되어 있다. (역자후기에는 번역집단의 활동과정, 그리고 이러한 협력의 산물을 만들고자 한, 번역집단의 가능성과 한계의 내용이 실려 있어서 이러한 공통과 협력의 의미에 대하여 곰씹어 볼 수 있게 한다.)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을 합동 평론집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져 저자가 여러 사람이라는 것을 두고 협력의 성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책 소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것은 단지 몇 개의 논문을 모아놓은 논문집이나,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인터뷰집과는 다르게 보인다. 갈무리 출판사에서 나온 위의 두 책을 볼 때, 이것은 협력의 산물로 보인다. 소통을 원하고, 연대를 원하고, 협력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주침, 그리고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과의 마주침! 계속된 마주침의 결과물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각각의 저자들은(역자들은) 여러 시간에 걸쳐 만났을 것이고, 이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 했을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써가고...때로는 마음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졌겠지?

 혼자 지은 건물, 혼자 지은 도로, 그렇게 혼자 지은 도시. 그런 '혼자의 설계도와 건축술'이 일관적일뿐만 아니라 더 완전해 보일지 모른다. 그래서 여러명의 협력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릴뿐만 아니라  일관적이지도 않고 불완전해 보여서 비효율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남과 협력은  기존의 사고를 벗어난 창조적 생각을 그 만큼 더욱 확장시켜주는 것은 아닐까?   행여나 협동과정에 있을지 모르는 한계마저도 실은 다음 도약의 에너지가 되는 것은 아닐까?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갈무리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공통점. 그 중에서의 협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책 [비물질 노동과 다중],[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서 추측해보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나의 추측이 틀린 추측은 아닐것임을 바라면서, 책의 내용을 기대해본다.

책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책을 읽고 리뷰로 쓰고자 한다.

아래의 페이퍼에는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에 관한 한겨레에서의 글이 실려 있는데, 참조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대신 나는 근대 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한겨레의  다른 글을 덧붙인다.(링크는 두개 모두 해둔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1848.html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76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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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에 한국문단은 답하라

최재봉의 문학풍경

“하나의 유령이 한국문단을 배회하고 있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유령이. 미디어, 출판자본, 문학 전공 교수, 편집자,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등등 문학을 둘러싼 모든 권력의 담지자들이 이 유령과 맞서기 위해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의 도입부를 비튼 이 구절은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숙명여대 인문학부)가 영미문학연구회의 기관지 〈안과 밖〉 제22호(2007년 상반기호)에 쓴 글의 일부다. ‘추억과 집착-〈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논의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단 이 글은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한국 문단의 반응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한국 문학의 반성과 갱신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사회적으로 시급한 문제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근대문학의 ‘끝장’을 선언한 가라타니의 주장에 대해 국내의 주류 문단은 시큰둥하지 않으면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권 교수는 그러한 태도가 솔직하지 못하거나 오해에 기반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현실에 대한 대응력을 상실한 제도적인 차원의 관성적인 문학”에 대한 가라타니의 거시적 비판은 받아들이되,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현실과 체제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시도하는 소수파 문인들과 적극적인 비평적 대화를 수행”해야 할 필요를 역설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의 메아리는 비평 전문지 〈오늘의 문예비평〉 여름호에서도 들을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이라는 이 잡지의 기획에는 세 사람의 평론가가 글을 보탰다. 이 가운데서도 문제의 책 〈근대문학의 종언〉과 가라타니의 또 다른 저서 〈언어와 비극〉을 번역한 조영일씨의 글이 흥미롭다. ‘비평의 노년-가라타니 고진과 백낙청’이라는 제목의 이 장문의 글은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가 출현하기까지의 과정을 한국 문단과의 교류 속에서 살펴보고, 비슷한 연배의 평론가인 가라타니와 백낙청의 만남과 헤어짐의 역사를 통해 그 테제가 한국의 주류 문단에 던지는 메시지를 헤아린다.

가라타니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한·일 양국을 오가며 진행된 ‘한일작가회의’에 꾸준히 참석했다. 조씨에 따르면 가라타니는 이미 1993년의 제2차 회의에서 발표한 ‘한국과 일본의 문학’이라는 글에서 ‘문학의 종언’ 테제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문지’(출판사 문학과지성사) 계열 문인들로 이루어진 한국쪽 파트너들은 그의 주장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문지의 ‘문학주의’에 실망한 가라타니는 이후 백낙청 교수로 대표되는 ‘창비’ 쪽과 접촉해 보지만, 결국 마찬가지의 실망을 경험하고 한-일 문학교류에서 손을 떼고 만다. 결론적으로 조씨는 백 교수가 최근 저서 〈한국문학의 보람〉(2006)에서 강조한 ‘한국문학의 보람’이란 곧 가라타니가 경고한 ‘문학의 종언’의 역설적인 증거일 뿐이라고 본다. “완전히 ‘문학화’된(즉 비평이 종언을 고한) 한국문학에서 문학의 적은 영화나 게임이 아니라 문학 자신”이라고 그는 일갈한다. ‘‘창비’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을 자처하는 그가 “‘창비’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역시 해체할 때가 된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 어조에서는 비장함과 아울러 씁쓸한 비애의 정조가 묻어난다.

동맹이냐 해체냐. 가라타니의 테제는 지금 한국 문단을 향해 엄중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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