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그리고 들뢰즈

 

1/칸트

*형이상학 전장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초판 머리말에서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서는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그의 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165, A7-번역판본 쪽수, 번역판에 같이 표기된 쪽수) 이성은 ‘혼돈과 당착’속에 빠져있는데, 자신(이성)이 이용하는 원칙들이 모든 경험의 한계 밖에서 경험의 시금석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착오’ 의 장(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끝없는 싸움의 전장이 바로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칸트는 당시의 ‘형이상학의 전장’ 을 한편으로는 교조주의자들의 전제적 지배로 인한 무정부상태의 퇴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주의자들로 인한 시민들의 통합의 분열로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성의 혼돈과 당착이라는 문제를 회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착오조차도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교조주의자들의 전제적 지배와 회의주의자들의 분열을 엄밀히 처방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성을 꼼꼼히 조사하고 탐구하여 이성의 권한과 한계를 밝히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이성을 ‘법정’에 세운다. 이 ‘법정’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이다.  순수이성비판이란, “책들과 체계들에 대한 비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능력 일반을, 이성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추구함직한 모든 인식과 관련해서 비판함”을 뜻한다.(168, A12) 그래서 형이상학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결정하고, 형이상학의 원천과 범위, 한계를 규정하되, 이것들을 모두 원리로부터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을 ‘법정’에 세워서 인간의 인식능력을 꼼꼼히 조사하여 이성의 권한과 한계를 규정하고, 이것을 토대로 새로운 형이상학을 정초하는 것이며, 또한 그래서 이성의 전제적 지배와 회의주의자들의 분열조장에 대하여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핵심과제라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 그 동안 불확실성과 모순의 상태에 머물렀던 이유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별조차 착상하지 못하고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의 성패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해결하는냐, 아니면 이 과제가 설명하여 알기를 요구하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229, B19)

*사고방식의 전환-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칸트의 이 과제는 기존의 사고방식의 전환에서부터 시작된다. 칸트 이전까지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 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그러나 대상들을 통하여 인식이 확장될 무엇인가를 개념들에 의거해 선험적으로 이루려는 시도는 이러한 가정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즉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란,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일치성) 여부에 따라 파악되었는데, 이 주관과 객관의 관계에서 주관은 객관을 따라야 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그러나 객관을 따라야 하는 것으로, 객관을 중심으로 진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사례로 들면서 사고방식의 전환을 꾀한다. 그것은 주관이 객관을 따르는 방식을 역전시켜 객관이 주관을 따르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확정”해야 하는 것으로(182, B17), “대상이(감관의 객관으로서) 우리 직관능력의 성질을 따른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잘 부합한다는 것이다.(183, B17) 이것이 바로 “사물로부터 우리 자신이 그것들 안에 집어넣은 것만을 선험적으로 인식한다는 사고방식의 변화된 방법”이다. 이것은 천체가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의 관점을 역전시켜서 지구가 천체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따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전환)’ 라고 한다.

 칸트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변화된 방법의 토대에서 주관(주체)의 선험적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한다. 여기서 칸트가 발견하는 것은 순수직관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순수지성개념들로서 범주들이다. 공간과 시간은 (주관의) 인상들의 수용성에 기반한 대상들이 현상하는 조건으로서 직관의 형식이며, 순수지성개념들은 공간과 시간의 형식에서 현상한 것(질료?)을 (주관의) 사고들의 자발성에 기반한 사고하는 범주들이다. 그리고 이에 현상(직관)과 지성을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상상력을 (2권 원칙의 분석학) 덧붙일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어려움

 (이것은 아직 개인적인 문제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칸트는 인식능력을 꼼곰히 조사하기 위하여, 각 인식능력을 분해해서 순수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탐구하였다. 여기에서 순수함이란 당연히 경험을 배제하고, 어떤 다른 요소도 혼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야 경험에 선행하면서도,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그렇지만 경험과 곁에 있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식조건을 찾아낼 수 있고, 그래야 주체의 인식능력에서의 필연성과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선험적 종합판단을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칸트라고 생각해보자! (주관의 표상에서) 순수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했을까? 잘개 쪼개서 근원까지 추적해야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남아있는 순도100%의 인식 조건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발견해낸 것이 직관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이다. 그리고 '순수지성개념들로서 범주들'이다.

여기까지는 어려움 없이 진행될 수 있다. 혹은 이것은 자신이 가정해도 되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다음부터의 문제이다. 이것을 어떻게 일관성있게 연결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쉽지 않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은 난 2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순수지성개념들의 초월적 연역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감성과 지성의 조화문제이다. 여기서 상상력의 논란이 발생한다.  이 두 가지의 문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였고, 그런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먼저 전자의 문제는 칸트스스로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순수지성개념의 연역이라는 제목하에 수행한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 나는 이 일에 가장 많은 노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희망한대로 보상 없는 노고는 아니었다.”(171, A16)

 무엇이 그리 어려웠을까? 쉽게 말하면, 직관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없이는 대상이 현상할 수 없다는 것이 명료해 보여서 이를 해명하기는 쉽지만, 직관은 감성의  결과이고 이것은 지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순수지성개념들의 범주들 없이도 대상은 현상할 수 있기 때문에 대상과 범주들이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명료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자발적 활동으로서 사고가 어떻게 대상과 관계를 맺는것은 우연에 불과하고, 인식의 필연성이 입증되지 않는다. 또한 그 이유는, 공간과 시간 없이는 대상이 현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공간과 시간의 객관적 실재성을 확보하기가 쉽지만, 지성의 범주들은 대상이 직관에 주어지는 조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상들은 지성의 기능과 반드시 관계 맺지 않고도 현상할 수 있다. 그래서 지성이 선험적인 조건을 함유함이 없이도 현상할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해명하는 것이 '순수지성개념들의 초월적 연역'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감성과 지성의 관계문제이다. 이 둘이 어떻게 조화롭게 활동하느냐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칸트는 '상상력'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번역자도 밝히고 있다시피 논란거리중에 하나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자


상상력은 지성이 사고할 직관을 지어내 제공한다는 점에서 감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범주들에 따라서 직관을 형상화(형상적 종합)한다는 점에서는 지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규정됨으로써, 상상력이라는 것이 감성과 지성과는 다른 제 3의 심성기능인지, 아니면 저 둘의 매개기능인지, 아니면, ‘상상력’이라 통칭은 되지만, 실상은 여러 기능들인지에 대한 논란의 소재가 된다.” (360, 옮긴이 주석 131번 참조)

그래서 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주제로 '초월적 연역'의 문제와 '상상력'의 문제를 상정하고 이를 추적해간다면, 순수이성비판의 이해가 훨씬 명료해지고 흥미롭지 않을까 한다. 이 문제가 왜 발생하는지, 또 칸트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는지를 이해한다면, 칸트의 전체적인 사고의 윤곽은 잡힐 것이다. (초월적 가상, 오류추리에 이율배반의 문제를 덧붙일 수 있겠다.)

2/들뢰즈

*이 두가지 문제와 들뢰즈

들뢰즈는 이 두가지의 문제를 꼬집어서 비판하고 칸트의 주장을 역전(?)시킨다. 간략히 말하면, 첫번째 문제에 대한 칸트의 해결은 선험적-근원적 종합적 통일의 원칙으로서 '나는 사고한다'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구체적으로 하겠다.) 이 때의 '나'는 통칭 선험적 자아라고 할 수 있고, 직관속에서 현상하는 '나'는 현상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선험적 자아, 즉 '나는 사고한다'의 표상은 인식할수는 없지만(증명할 수는 없지만)모든 표상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를 들뢰즈는 임의적 전제이라고 비판한다.  들뢰즈에게서 중요한 것은 현상적 자아이다. 이것은 분할된 자아, 분열된 자아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살펴보자

"심지어 사변적 영역에서조차 새로운 형식의 동일성, 능동성을 띤 종합적 동일성을 통해 그 균열은 곧바로 메워진다. 반면 수동적 자아는 단지 수용성에 의해 정의되고,이런 자격에서 어떠한 종합적 능력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우리는 변용들을 겪는 능력인 수용성은 어떤 귀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수동적 자아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 자체가 수동적인 어떤 종합(응시-수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보았다...칸트적 창의성이 회복될 가능성은 바로 이 수동적 자아를 전혀 다르게 평가하는 데, 있다." (김상환역, 205)

여기에서 수동적 자아는 위에서 언급한 현상적 자아를 말한다. 들뢰즈에게는 모든 표상과 팔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고 가정되는 '나는 사고한다'는 동일성의 틀안으로 묶는 임의적 전제에 불과하다. 오히려 변용들을 겪는 수동적 자아, 나의 균열이 중요하다. (간략히 이야기 했지만, 이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각각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그 다음으로 상상력의 문제를 살펴보자.  이것은 <들뢰즈의 철학>(서동욱, 민음사)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능력들의 일치란 우선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지성과 감성의 일치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칸트가 이미 도식 작용론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편지 다시 일치의 문제가 제기되는가? 문제는 상상력이 지성에 종속된 능력이기 때문에 매개 역할을 해줄 수 없다는 데 있다.....칸트는 인간의 인식에는 감성과 지성이라는 두개의 줄기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 만족하고, <이 두 줄기는 아마도 하나의 공통적인,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뿌리에서 솟아 나온다>고 추측하는데서 멈추고 만다." (36~37쪽)

인용글에서의 편지는 당시의 문제제기를 했던 마이몬의 편지를 말한다. 

이렇게 선험적 자아의 문제(이것은 곧 순수지성개념들의 연역과 연관된다.)와 상상력의 문제는 들뢰즈도 문제삼는 것이다. 여기에서 칸트의 내용과 들뢰즈의 내용에서 구체적인 부분들이 많이 생략되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한바는 그 내용을 다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나에겐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런 앎도 없다. 다만, 호기심과 흥미로움을 갖고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정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의 주제에 관하여 개인적인 문제의식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3/참고자료

일단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관련 참고자료 몇 가지

 이 책의 역자 해제는 약 100쪽이다. 한권의 얇은 해설서로 내도 될 듯하다. 역자 해제는 순수이성비판의 서술구조에 맞게 각 그 내용을 압축적으로 요약해주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읽으면서 참조하면 도움이 많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또한 번역표도 따로 정리되어 있어서 번역어 관련 사항을 참조하는데 좋다.  

칸트의 해설서는 가장 좋다는 평을 받는 것 같다. 두껍지 않으면서도 잘 가이드 한다는 느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칸트의 원전을 직접인용하는 것이 많아서 해설서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좋다. 쉽게 읽는 칸트시리즈<판단력비판>, <정언명령>도 함께 참고해볼 만하다.

이것은 번역자 백종현의 칸트 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부분적으로 참조할 내용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듯하다. 그리고 <칸트 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카울바하, 서광사>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백종현이 번역하였다.  

초월적 연역의 문제는 정리하는데로 페이퍼에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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