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초파리
마틴 브룩스 지음, 이충호 옮김 / 이마고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리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곤충이며, 신의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 곤충이 아닐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인간의 이기적 관점에서 비롯된 편견일 뿐이다. 사실 파리는 부패물의 해결사이자, 양서류의 먹이로서 당당히 생태계 먹이사슬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뿐만 아니라 'M. 리 고프'의 명저 <파리가 잡은 범인>에 의하면, 파리의 정직성이야말로 미해결의 범죄를 풀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이다!

진화생물학자들과 유전학자들은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파리만큼 인간에게 기여하는 곤충도 없다는 것이다. 그 기여란 바로 진화의 열쇠를 푸는 일이다. 진리에 목마른 인간들에게 이는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자연의 비밀을 벗기기 위해 잔인한 실험을 묵묵히 견뎌내는 파리들을 보게 된다면, 누구라도 동정심을 가질게 뻔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파리는 흔히 볼 수 있는 쉬파리보다 훨씬 작은 초파리이다. 초파리를 보고싶거든, 잘 익은 포도 한 송이면 된다. 연락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여든다! 만일 그들이 붉은 눈을 가지고 있고 포도씨보다 작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초파리이다. 자, 그렇다면 이 작은 곤충을 매개로 펼쳐지는 진화생물학과 유전학의 신비한 세계로 여행을 떠나 보자. '마틴 브룩스'의 '초파리'의 세계로 말이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되는 진화의 과정은 너무도 점진적이어서, 화석을 통한 관찰밖에 방법이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2주에 한 번 꼴로 번식해 1년여에 걸쳐 약 30-40세대의 자손을 보는 초파리라면 어떨까? 초파리에서라면 세대에 걸쳐 누적되는 진화의 과정이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학자들은 초파리에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수집과 관찰 등의 박물학적 전통에 매몰돼 있던 당시의 진화론자들이 실험생물학으로 전향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한 학문적 변절이라면 용기있는 행동이 아니던가? 이 책의 주인공 모건이 바로 그런 인물이며, 과감한 용기의 대가로 유전학의 선구적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모건이 선택했던 실험대상은 초파리였고, 초파리들은 진화가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생생히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다윈의 진화론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멘델의 유전학이 초파리를 통해서야 연결고리를 찾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건과 그의 제자들의 기발한 실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행한 다양한 초파리실험들은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놀라운 아이디어의 경연장처럼 보인다.

X선을 쬐어 다리가 머리에 붙거나 유전자가 조작돼 바보가 되거나 거세되거나 등등, 초파리가 선택할 수 있는 돌연변이는 다양한 편이지만, 정상적인 몸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잔인한 실험의 대가때문인지, 인간이 얻는 지식은 정말 엄청난 것들이다! 시간감각을 관장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것, 심리적인 메카니즘이 유전자로부터 기원한다는 것, 모체(암컷)에 침입한 정자의 놀라운 배반행위 등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당신이 암컷 초파리로 내세에 환생한다면, 성행위를 자제하라! 그래야 당신의 수명이 연장될 테니!

초파리가 선택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진리의 세계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듯 하다. 초파리의 진화원리와 유전자의 세계가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자만심과 편견에 찬물을 끼얹는듯 하다. 자신의 유전자를 재생산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는 자연의 격전장은 인간의 생각만큼 고요한 곳이 아니다. 저자 마틴 브룩스는 자신의 정자를 더 많은 암컷에 이식하기 위해 투쟁하는 수컷곤충들의 놀라운 진화과정을 생동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 뿐이 아니다. 양질의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쉽게 씌어졌다는 점이 최대 강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유전학자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적절히 가미하여, 자칫하면 지루할 뻔했던 이 책의 여정에 흥미있는 볼거리들을 제공한다. 진화생물학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정말 유익한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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