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문학사상 세계문학 12
J.D.샐린저 지음, 윤용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3년 7월
평점 :
절판


잡다한 일상의 삶에 지쳐 있었기에, 서정적이고 동화적인 부담없는 소설을 읽고 싶었다. 생택쥐베리의 '어린왕자'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 같은 소설 말이다. 그래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고르게 되었다. 물론 이 책에 대해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으므로, 이것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제목에서 와닿는 목가적인 이미지가 전부였던 것 같다. 만약 조금이라도 내용을 알고 있었더라면 다른 책을 휴식처로 삼았을 것이다. 허무적이고 존재의 본질을 찾아 심연한 내면세계를 허우적거리는 소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의 가벼움을 일깨워주는 소설들은, 역설적으로 그 가볍다는 회의가 존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결코 목가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허위로 가득찬 가식적 현실세계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한 소년의 절규를 대변한 이상향이다. 주인공 '홀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춘기 소년이다. 그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할 인간관계의 형식적 틀마저 거부한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틀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조차 없이, 자신 또한 그 덫에 매몰되고 만다는 자아의 한계에 있다. 따라서 '홀든'은 인간관계의 형식적 틀을 고수하려는 - 도덕적으로 타락한 내면을 감춘 - 타자 뿐만 아니라, 그러한 타락 앞에서 전혀 속수무책인 자신의 한계를 직설적으로 고발한다. 물론 그 고발은 저자 J.D.샐린저의 몫이지만 말이다. 아마 '홀든'이 고백한 무능력, 무기력함, 성적 콤플렉스, 용기 결여 등은 주인공 자신의 치부이자, 작가 자신의 참회적인 고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 독자들이 작가의 그러한 고백에 놀라는 이유도, 홀든의 경험과 우리의 그것이 너무도 유사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이 '홀든'에게 최악인 것은 아니다. 아직 인간관계의 형식적 틀에 매몰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의 동심의 세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홀든이 보기에 그것만이 타락한 이 세계를 바로잡아 줄 유일한 희망이다. '홀든'은 그 희망의 빛을 수호하고자 몸부림 친다. 그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뛰노는 아이들이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게끔, 감시하리라는 굳은 의지는 그러한 소박한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떠나고자 갈구했던 서부지방의 오두막 근처에, 아이들이 - 홀든의 동생인 피비나 호밀밭을 노래한 소년으로 상징화 된 - 뛰노는 호밀밭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홀든은 서부의 오두막으로 가리란 계획을 포기했다. 아마 서부로 떠나기엔, 현실세계의 장벽이 홀든에게 너무도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저자 '샐린저'에게 은둔벽이 있는 것도 그가 현실이 주는 무게에 굴복하기 말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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