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행
호시노 도모유키 외 지음 / 문학세계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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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상상력이다. 일본 미니시리즈 '기묘한 이야기(世にも奇妙な物語)'보다 더욱 '기묘한' 단편이 이어진다. 호시노 도모유키(星野智幸) 스스로 '지금 인간 세상이 품고 있는 어두운 면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있다'고 표현한 소설집 <인간은행>은 세상을 인정사정없이 뒤엎어버린듯한 느낌마저준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인간은행', '선배 전설' 등 11개의 단편은 노인, 환경, 빈부격차, 실업, 출산 등 지구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상상마저 넘어선 현재를 그리고 있다.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쓴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의 표현이 과하지 않다고 느낄 정도다.



사람을 돈으로 계산해 인간 활동 자체를 화폐로 변환하는 시스템(인간은행), 노인 간병 문제를 '에코화'라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외면하는 사회(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남녀 구분이 없어지고 인간과 꽃이 융합한 새로운 인류(스킨 플랜트), 홍수로 침수된 반지하에 갇혀 스스로 흙과 동일한 존재로 변하는 인간(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 등 현실이 가진 경계를 완전히 무시한 스토리가 읽는이를 당황하게 만든다.


"이 사람, 돈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돈입니다."


진카(人貨), 즉 인간 화폐. '인간은행'은 사람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준 뒤 이를 갚지 못하면 돈이 되어 노동으로 대신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돈으로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람으로 계산하는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주인공 간토는 '화폐'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부정하는 편이다. 가진 재산을 모조리 써버리고 소유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뒤 인간은행을 찾게 된다. 우연히 성공하게 된 옛 동료와의 동업으로 빌린 돈을 다 갚게 되지만, 여전히 '화폐'는 그에게 난해하다. 스스로 화폐가 되어 자유를 느끼는 후가 씨를 만나면서 인간화폐라는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된다.


'선배 전설'은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로 고통받고 있는 현실과 오버랩된다. 집을 소유한 사람보다 홈리스가 더욱 정당화되는 사회가 낯설지만 신기하게도 설득력마저 갖는다. '집부수기'라는 운동의 시초로 전설이 된 선배는 집이라는 관념에 묶여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집을 지키기 위해 정말 무엇을 잃어가고 사는지' 깊은 고민을 던진다. 베드룸 로커라는 베개와 이불만 있는 거리의 시설에서 많은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그때는 2050년 즈음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외친다. "꼭 길바닥으로 나와보십시오!"



이상기온으로 고통받는 일본. 사람들은 존재마저 혼돈한다. 단편 '핑크'는 연일 40도가 넘어서는 고온현상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자정기능을 이야기한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연못을 보던 나오미는 신기한 모습을 본다. 연못으로 뛰어드는 새, 연못에서 날아오르는 물고기. 더위를 피해 물 속으로, 뜨거운 물을 피해 공중으로 향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집단 광기와도 같은 회오리춤이 희망으로 전해진다.


'스킨 플랜트'에서는 사람의 몸에 심은 씨앗이 자라 과일이 되고 채소가 된다. 멋내기 유행의 정도를 넘어 자신의 몸에서 생산한 작물을 섭취하는 지경까지 이르러자 사람들은 이제 꽃을 피워보길 원한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꽃피우기지만 욕망은 누를 수가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꽃피우기는 성공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을 안게 된다. 바로 한 번 꽃을 피운 사람의 몸은 성적 기능이 종료된다는 점이다. 자칫 인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꽃피우기. 그러나 서서히 인간과 꽃이 하나로 동화하면서 씨를 뿌려 지구 어디에서건 열매와 같은 인간이 탄생한다.



이렇듯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은행>에 실린 이야기 하나하나는 실제 일어날 수 있는 미래일 수도,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지못하는 아득한 과거일 수도 있겠다. 그는 "등장인물들은 인간에게 실망하고 인간계를 등진다"면서 "하지만 그것은 아직 보지 못한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마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모미 쵸아요' 편은 작가가 실제 한국 방문에서 경험한 일을 쓴 수필과도 같다. 일본보다 더욱 빨리 변화하는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부러움이 전해진다. 길거리에서 여자한테 혼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진차 한구쿠나무자(진짜 한국남자)'로 비쳐진 작가. 그래서 "한국에서 배우고 에너지를 얻겠다"는 호시노 도모유키의 다짐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인간은행>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기만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의 가능성을 마음대로 그려보는 자유를 준다. 역자의 표현대로 '먼 별에서 날아온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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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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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로 시작해 <고양이>로 이어지고, <인간>에서 <신>까지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야기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은 언제나 신선하다. 희곡의 형식을 가진 <심판>의 등장인물은 달랑 4명, 장소는 분명히 지구는 아닌 저 세상 어딘가일 뿐 명확하지 않다. 단지 무대는 재판정, 지상의 삶을 보여줄 스크린, 재판정이 아닌 쉴 공간 등 커튼에 의해 세 구역으로 구분돼있다.


'영혼 번호 103-683', 1947년 프랑스에서 출생해 2007년 프랑스에서 사망한 아나톨 피숑에 대한 심판이 벌어지는 곳. 지상에서 판사로 살다 폐암에 걸려 수술 도중 죽음을 당한 아나톨, 그를 위한 변호사 카롤린, 아나톨의 삶이 지닌 잘못을 지적할 검사 베르트랑, 그리고 재판장 가브리엘이 무대에 등장한다.




"당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새로 왔어요?"

"제가 새로 온 게 아니라, 당신이 '새로운' 체계에 온 거에요."


아직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아나톨의 물음에 카롤린은 그저 '삶의 연장'으로 보면 될 것이라고 답한다. <심판>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존중하는 '유머'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한 사람-혹은 우리 사회-에 대한 심판을 위해 치열한 논쟁이 이어지는 곳곳에 네 명의 캐릭터는 맘껏 재치있는 멘트를 날려 준다. 예를 들자면 하루 세 갑의 담배로 몸을 혹사시켰다는 추궁에 아나톨은 "멘솔이었다"며 줄곧 항변하는 식이다.


약간은 고집스럽고 괴팍한 성격의 아나톨과 그를 심판하는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엉뚱함은 <심판>에 '인간적인 매력'을 더해 준다. 재판이 진행되는 중간중간 베르트랑과 카롤린은 전생에 못다한 싸움을 이어간다. 검사와 변호사로 일하기 전 그들은 지상에서 부부였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엄격하고 명확해야할 재판장 가브리엘은 때로는 소녀같은 감성을 드러내며 '제대로 심판이 될까'라는 의심마저 갖게 한다.



<심판>은 <신>에서처럼 '거대한 눈'이나 <제3인류>와 같은 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주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결혼, 취업, 교육, 정부 등 인간의 관습이나 제도의 허점에 집중한다. 책에서 주 35시간 근무라는 프랑스의 근로기준은 아나톨의 죽음에 직간접 영향을 끼쳤다.


과거에도 그랬듯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심판>에서 '윤회'와 함께 '신'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반복되는 도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영원한 죽음, 혹은 불변의 삶을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완전한 존재에 이르지 못한 아나톨은 <심판>에서 '멍청이'로 표현된다.


"세상에는 멍청이가 가득하단다. 상처도 쉽게 받아 면전에서 멍청이라는 얘기도 해줄 수없지. 진실을 들려주면 못 견디는 거. 이게 바로 멍청이들의 근본 특성이지. 진실을 알려 주면 알려 준 사람을 원망하면서...... 멍청이들은 칭찬이라면 죽고 못 살아. 이게 그들의 두 번째 특성이지."


"자 그럼, 여기 인사법대로, '다시 만나요'."


천상의 '심판'을 받아들인 아나톨이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삶을 요리에 비유하자면 유전 25%, 카르마 25%, 자유의지 50%가 재료로 들어간다는 설명이다. 우선 성별을 고른 뒤 국적, 강점과 핸디캡에 이어 '사용 가능한' 부모를 결정한다. 다시 태어나게 될 스스로가 그렇다.




네 사람이 진행하는 '심판'은 놀이처럼 경쾌하게 진행된다. 그 속에서 독자는 인간의 삶에 대해 새롭게 들여다보게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만든 무대의 스크린을 쳐다보듯이. 너무나 인간적인 천상의 재판장 가브리엘이 정의한 삶은 특별할 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멍청이'일지도 모르겠다.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 죽는 거에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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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벨 죽이기 죽이기 시리즈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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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복희가 열연한 어린이 뮤지컬 '피터팬'이 떠올랐다. 어머니 손을 잡고 찾은 극장, 몇 살이었는 지도 모를 까마득한 과거지만 화려한 무대 위를 멋지게 날아 오르는 피터팬의 퍼포먼스와 불쌍한 아이들을 '나쁜 어른'의 상징인 후크 선장으로부터 지켜내는 스토리에 흠뻑 빠졌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고바야시 야스미(小林泰三)의 <팅커벨 죽이기(ティンカ-ベル殺し)> 표지를 바라보며 잠시 젖은 회상이다.



"후크 선장이 누군데?"

"기억 안 나?"

"난 죽인 놈들은 잊어버리거든."


"나를 만나면 팅커벨은 기뻐할까."

"팅커벨이 누군데?"


고바야시 야스미의 <팅커벨 죽이기> 첫 장. 시간이 한참 지나 만난 어른이 된 웬디와 피터팬의 대화는 이제 곧 아련했던 동심을 처참히 짓밟아 버릴 심산이다.


<팅커벨 죽이기>는 우리가 기억하는 피터팬의 모험이 끝난 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피터팬은 숙적 후크 선장과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여섯 명의 잃어버린 소년들은 웬디 가족의 양자가 된 상황. 어른이 되길 거부한 피터 팬이 웬디와의 약속을 뒤늦게 기억하고 다시 함께 네버랜드로의 모험을 떠나는 장면부터 출발한다.


변치않은 어린이의 모습으로 악당을 무찌르고, 가련한 잃어버린 소년들을 이끌며 네버랜드를 수호하는 피터팬은 잊자. 상대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으며 살인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악행에 대한 죄의식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독재자 피터팬이 <팅커벨 죽이기>에 존재한다. 


'꿈의 나라' 네버랜드는 피터팬과 잃어버린 소년들, 해적단, 붉은피부족 들의 살육이 늘상 벌어진다. 제임스 매튜 배리의 원작에 등장하는 피터팬의 모습또한 다르지 않다고 하니 독자들의 잘못된 상상이었을 뿐, 고바야시 야스미가 원작에 충실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결코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온 걸 환영한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사악한 웃음을 짓는 피터팬. 상상만으로도 오싹한 기운을 전한다. <팅커벨 죽이기>는 의문의 '팅커벨 살해사건'을 현실 세계와 네버랜드를 넘나들며 풀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잔혹한 도시괴담이기도 하다.


피터팬과 웬디가 네버랜드로 떠나는 즈음, 지구의 이모리 겐은 눈 덮힌 산골 료칸에서 열리는 초등학교 동창회로 향한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죽이기' 시리즈에 등장하는 도마뱀 빌, 그리고 빌의 아바타인 이모리의 시선이 교차되면서 현실과 네버랜드를 오간다.


꿈인듯 현실인듯 네버랜드에 살고 있는 누군가-혹은 무엇-와 기억을 공유하는 동창회 참석자들. 그들은 각각 네버랜드에 존재하는 캐릭터의 아바타다. 네버랜드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임을 당하는. 그러나 현실에서의 죽음은 그저 꿈처럼 리셋될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몸으로 지구에 살고 있지만 네버랜드에서 발생한 '팅커벨 살해 사건'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으며, 뭔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휘말린 느낌이다.



<팅커벨 죽이기>는 미스터리 자체로서도 흥미를 끈다. '쌍둥이 트릭'이 절묘하게 사용되면서 팅커벨을 죽인 진범을 찾아가는 과정이 현실과 네버랜드에서 동시에 전개된다. '탐정이자 형사이며 재판관'을 자처하지만 피터팬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요정을 관장하는 마브 여왕은 피터팬을 가리켜 '켄싱턴 연못 속 섬에 만든, 결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낙원에 머물고 있는 저주받은 존재일 지도 모른다'고 했다.


말미에 소개되는 '제임스 매튜 배리와 피터팬에 대하여'는 원작과 <팅커벨 죽이기>를 비교하면서 이해도를 높이는데 기여한다. 배리의 생애와 각 작품의 줄거리를 통해 <팅커벨 죽이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작동하는 요소를 맞춰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그리고 도마뱀 빌과 이모리의 모험은 <팅커벨 죽이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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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전쟁 (30만부 돌파 기념 특별 합본판)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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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자적인 핵 개발을 둘러싼 미묘한 국제정세와 정치 상황을 그려냈던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1993년 출간과 동시에 큰 반향을 끌어냈다.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주축으로 조국의 자주국방을 위한 노력이 실제 상황으로 느껴질만큼 큰 감동을 얻어냈으며, 주변 강국의 책략은 냉혹한 현실을 다시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됐다.


<미중전쟁>은 한반도 핵문제를 넘어 세계 질서 재편이라는 큰 주제 속에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북한의 체제존립을 위한 핵 개발이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거대한 음모와 맞물려 대한민국을 비롯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의 뒤엉킨 이해관계가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출판사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싸드>의 종결판으로, 25년 작가 인생을 걸고 쓴 김진명의 충격적인 팩트 소설"로 소개했다.


책은 특히 트럼프, 시진핑, 푸틴, 김정은 등 실존 인물을 그대로 등장시켜 현실감을 높였으며, 그들이 바라보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가감없는 시선도 그대로 적시된다. 김진명이 가진 국제정세에 대한 특유의 감각과 논리적인 해법은 <미중전쟁>을 통해 다시 한번 위력을 발휘한다.



"용기와 결단없이 해결할 수 있는 난제는 없다." 작가의 말에 이미 <미중전쟁>의 결론은 드러난다. 북핵문제, 외교문제에 있어서 분명한 시각이나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저 눈치만 보는 문재인 정권을 지적하면서 '눈치만 보다가는 우리가 설 자리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만다'는 지극히 간단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국제자금세탁을 조사하기 위해 비엔나에 위치한 세계은행 오스트리아지부를 찾은 김인철. 워싱턴 세계은행 본부 특별요원으로 근무하던 인철은 국제적인 펀드매니저의 석연찮은 자살 사건을 접하게 되고, 그가 운용하던 엄청난 자금의 실체와 주인을 밝히기 위한 추적을 시작한다.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에서는 미군 폭격기의 눈을 피해 수소폭탄 실험을 진행하고 마침내 강산이 미친 듯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김정은은 개발 완성의 축배를 든다. "오늘부로 우리는 미 제국주의자 놈들과 똑같은 힘을 가졌소. 조선반도 100년 숙원을 푸는 거야."


"북한에 대한 공격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건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입니다." 

"정신 나간 거 아닌가? 자기네 국민을 지키려고 방사포를 때려잡는데 대통령이 반대해?"



그즈음 워싱턴 백악관 워룸에서는 트럼프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위해 북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준비한다. "최고 수준의 전면공격을 선택하겠어. 내가 워룸에 다시 들어노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한 시간 안에 북한의 모든 걸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거야."


'슈퍼 차이나'의 꿈. 미국의 반대편에 서있는 시진핑은 중국몽 실현을 위한 '일대일로'에 따라 중국을 태양으로 하는 새로운 우주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이어간다. 세계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에 맞선 '빅2'로서 유라시아에 막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중국. 그리고 이러한 중국 옆에는 공존과 견제를 거듭하며 '과거의 영광'을 노리는 러시아의 치밀한 셈법이 작동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미국, 중국, 러시아의 관계라는 가시적인 세계 이면에는 또 다른 거대한 세계가 존재한다. 실제 세상을 설계하고 작동하는 힘. 미국이라는 성배를 지키고 수호하기를 자처하는 이른바 '성배기사단'이라는 결사체는 세계의 정치, 경제, 금융, 군수, 언론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 즉 '달러와 석유'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은 전쟁마저도 도구로 삼는다.



전쟁을 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슬픈 나라 미국. 이같은 미국과 혈맹인 대한민국의 선택이 <미중전쟁> 전면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나간다. 김진명의 예리한 관찰력과 예측이 책의 긴장감을 드높인다. 미국 편을 들자니 중국이 압박하고, 중국에 잘보이자니 미국이 멀어지는 그야말로 '남는게 없는 장사'를 거듭하는 대한민국. 게다가 북한 눈치까지 살펴야하는 정권의 고민이 깊어 진다. '전쟁의 논리'를 이겨낼 수 있는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찾아가는 과정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소설 <미중전쟁>은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북한에 대해선 핵 포기가 없는 한 어떤 타협도 대화도 없다는 원칙, 미국에 대해선 어떤 군사작전도 반드시 우리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원칙, 중국에 대해선 이 순간 이후 어떤 치졸한 보복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그것을 굳게 지켜나갈 때에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북핵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강조한다. 앞서 밝혔듯 '용기와 결단'없는 '해결'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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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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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경고한다. 이 책은 읽으면 안 된다."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 해설이다. 작품의 의미를 다시 풀이해주고,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 '작품 해설'이기 마련인데 마리 유키코(真梨幸子)의 책에는 대놓고 '읽지 마라'는 경고가 새겨져 있다. 심지어 본문보다 해설을 먼저 보라는 권고까지 붙어 있다. 당혹스럽지만, 그 이유가 짐작된다.


여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마리 유키코의 <이사(引っ越し)>. 문, 수납장, 책상, 상자, 벽, 끈 등 이사와 관련된 소재가 각각의 이야기를 주도한다. 보편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건이라기보다 엽기적이고 흉악한, 또는 이해하기 힘든 사연이 단편마다 숨어 있다.



마리 유키코는 이야미스(イヤミス)장르의 여왕으로 불린다. 이야미스는 '싫어'라는 뜻의 일본말 '이야'와 '미스터리'를 붙여 만들어진 조어다. 간단히 말하면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읽어 버리는', 즉 '처음부터 끝까지 손 놓지 못하고 읽히지만, 뒷맛이 개운치 못한 이야기'라 하겠다. <이사>의 옮긴이는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가차 없이 그려내기에 읽고나면 기분이 찜찜하고 불쾌해지는 미스터리'라고 설명했다. <고백>, <N을 위하여>, <야행관람차> 등으로 유명한 작가 미나토 가나에(湊かなえ)도 대표적인 이야미스 장르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는 급히 새로 옮길 집을 찾고 있는 기요코의 사연에서 시작된다. 첫번째 단편 '문'. 모처럼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 여기저기 둘러보는 기요코. 그러나 벽에 남은 아주 작은 구멍들과 함께 '비상구'라고 적힌 문 뒤에 숨은 작은 방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헷갈리는 상황 속에서 기요코는 "와, 돌아버리겠네."를 연발한다. 부동산직원 아오시마는 기요코가 흘린 손수건을 챙겨 든다.


수상한 엄마 나오코의 이사 준비를 그린 '수납장'. 미혼모의 딸인 나오코는 오랜 시간 방치해 둔 골판지 상자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가져가야할 지, 버려야할 지. 상당히 개인적이고 은밀하지만 결코 꺼내볼 일이 없었을 상자를 열어보면서 '처분, 보관, 그리고 보류'로 구분하고 추억에 빠지는 나오코. 하지만 딸 가오리는 알고 있다. '엄마가 또 뭔가를 저질렀다'는 것을. 멘션관리인 아오시마는 나오코의 밤늦은 이사준비를 지켜 본다.



신체 일부가 없는 신원미상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기사에서 출발하는 '책상'은 아오시마 운송이라는 작은 회사 전화상담 직원으로 취업한 마나미가 등장한다. 남편의 벌이로 충분치 않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시작한 부업이지만 마나미는 사장과 그의 누나 아쓰코의 행동이 미심쩍다. 결국 마나미는 '누군지 모를 당신에게'로 시작하는 선배 직원이 책상 속에 숨겨둔 편지를 읽게 되고, 퇴직을 결심하게 된다. 


"내 상자, 내 상자는 무사할까." 33층에 이르는 대형 회사의 대규모 배치전환-부서이동과 비슷한 의미로 보인다-과정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파견사원으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유미에의 사연이다. 정사원을 향한 파견직원 아줌마들의 고의적인 괴롭힘으로 유미에는 자신의 골판지 상자를 잃어버리게 되고, 친구 교코에게 의지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교코는 겉과 달리 유미에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다. 파견사원 우두머리격인 아오시마는 유미에를 어느 한 곳으로 몰아간다.


다섯번째 단편 '벽'은 회사, 그리고 집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의 불평, 이어지는 소란과 폭력. 늘 같은 악몽에 시달리는 하야토. 꿈 속에서 "엄마! 그만해, 하지 마!", "아빠! 안 돼, 안 돼. 그 이상은 안된다고!"를 외친다. 회사 동기 이토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어느날 과한 부부싸움 소리를 듣게된 이토는 부인의 안전이 걱정돼 경찰을 소환하면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회사 동료 아오시마의 귀엣말이 예사롭지 않다. "대신 해줄까요?" 친절하면서 소름돋는다.


마지막 이야기 '끈'. '무서운 이야기'와 '이사'를 좋아하는 방랑자 사야카의 또 다른 취미는 포털사이트의 '거리뷰' 돌아보기다. 인터넷을 통해 실제라면 가보지 않을 곳을 직접 걷는 듯 모험을 즐긴다. '거리뷰'를 통해 자신이 사는 멘션 곳곳을 둘러보던 사야카가 비상구 앞에서 여러 개의 검은 끈을 발견하게 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멘션 관리인 아오시마는 여성용 손수건 또는 뭔가를 들고 그녀를 줄곧 지켜본다.



<이사>에 실린 여섯 가지 이야기는 하나로 연결돼있다. 특히 모든 단편에 등장하면서 점차 본색을 드러내는 캐릭터 '아오시마'의 정체는 책의 재미를 더해 준다.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우리 주위에 늘상 놓여있는 문, 수납장, 책상, 상자, 벽, 끈들은 '매우 꺼림직한' 대상으로 바뀌어져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책을 덮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도 계속 읽겠다는 사람은 알아서 책임을 지도록 하라'는 작품 해설의 경고는 틀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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