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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벨 죽이기 ㅣ 죽이기 시리즈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0년 8월
평점 :
배우 윤복희가 열연한 어린이 뮤지컬 '피터팬'이 떠올랐다. 어머니 손을 잡고 찾은 극장, 몇 살이었는 지도 모를 까마득한 과거지만 화려한 무대 위를 멋지게 날아 오르는 피터팬의 퍼포먼스와 불쌍한 아이들을 '나쁜 어른'의 상징인 후크 선장으로부터 지켜내는 스토리에 흠뻑 빠졌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고바야시 야스미(小林泰三)의 <팅커벨 죽이기(ティンカ-ベル殺し)> 표지를 바라보며 잠시 젖은 회상이다.

"후크 선장이 누군데?"
"기억 안 나?"
"난 죽인 놈들은 잊어버리거든."
"나를 만나면 팅커벨은 기뻐할까."
"팅커벨이 누군데?"
고바야시 야스미의 <팅커벨 죽이기> 첫 장. 시간이 한참 지나 만난 어른이 된 웬디와 피터팬의 대화는 이제 곧 아련했던 동심을 처참히 짓밟아 버릴 심산이다.
<팅커벨 죽이기>는 우리가 기억하는 피터팬의 모험이 끝난 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피터팬은 숙적 후크 선장과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여섯 명의 잃어버린 소년들은 웬디 가족의 양자가 된 상황. 어른이 되길 거부한 피터 팬이 웬디와의 약속을 뒤늦게 기억하고 다시 함께 네버랜드로의 모험을 떠나는 장면부터 출발한다.
변치않은 어린이의 모습으로 악당을 무찌르고, 가련한 잃어버린 소년들을 이끌며 네버랜드를 수호하는 피터팬은 잊자. 상대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으며 살인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악행에 대한 죄의식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독재자 피터팬이 <팅커벨 죽이기>에 존재한다.
'꿈의 나라' 네버랜드는 피터팬과 잃어버린 소년들, 해적단, 붉은피부족 들의 살육이 늘상 벌어진다. 제임스 매튜 배리의 원작에 등장하는 피터팬의 모습또한 다르지 않다고 하니 독자들의 잘못된 상상이었을 뿐, 고바야시 야스미가 원작에 충실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결코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온 걸 환영한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사악한 웃음을 짓는 피터팬. 상상만으로도 오싹한 기운을 전한다. <팅커벨 죽이기>는 의문의 '팅커벨 살해사건'을 현실 세계와 네버랜드를 넘나들며 풀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잔혹한 도시괴담이기도 하다.
피터팬과 웬디가 네버랜드로 떠나는 즈음, 지구의 이모리 겐은 눈 덮힌 산골 료칸에서 열리는 초등학교 동창회로 향한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죽이기' 시리즈에 등장하는 도마뱀 빌, 그리고 빌의 아바타인 이모리의 시선이 교차되면서 현실과 네버랜드를 오간다.
꿈인듯 현실인듯 네버랜드에 살고 있는 누군가-혹은 무엇-와 기억을 공유하는 동창회 참석자들. 그들은 각각 네버랜드에 존재하는 캐릭터의 아바타다. 네버랜드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임을 당하는. 그러나 현실에서의 죽음은 그저 꿈처럼 리셋될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몸으로 지구에 살고 있지만 네버랜드에서 발생한 '팅커벨 살해 사건'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으며, 뭔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휘말린 느낌이다.

<팅커벨 죽이기>는 미스터리 자체로서도 흥미를 끈다. '쌍둥이 트릭'이 절묘하게 사용되면서 팅커벨을 죽인 진범을 찾아가는 과정이 현실과 네버랜드에서 동시에 전개된다. '탐정이자 형사이며 재판관'을 자처하지만 피터팬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요정을 관장하는 마브 여왕은 피터팬을 가리켜 '켄싱턴 연못 속 섬에 만든, 결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낙원에 머물고 있는 저주받은 존재일 지도 모른다'고 했다.
말미에 소개되는 '제임스 매튜 배리와 피터팬에 대하여'는 원작과 <팅커벨 죽이기>를 비교하면서 이해도를 높이는데 기여한다. 배리의 생애와 각 작품의 줄거리를 통해 <팅커벨 죽이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작동하는 요소를 맞춰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그리고 도마뱀 빌과 이모리의 모험은 <팅커벨 죽이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