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마호로 역 시리즈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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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스트라이크'를 피우는 다다, '말보로 멘솔'의 교텐. 두 남자의 아주 특별하고도 평범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엄청나면서도 소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본에서 무려 150만 부(시리즈 누적) 판매 기록을 올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미우라 시온(三浦しをん)의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まほろ駅前多田便利軒)>이다. '문제적 주인공' 두 남자의 우정과 심부름집을 둘러싼 사건이 그려진다.


배경이 되는 마호로(まほろ)시는 도쿄 인근의 중소도시 정도로 추정된다. 일본소설에서 마호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로 자주 등장하는 의미라고도 한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에서는 마치다(町田)역 배경이 주로 소개되면서 발빠른 일본답게 JR마치다역 앞에는 마호로 데크까지 조성됐다. 또 책에서는 심부름집을 뜻하는 '벤리야(便利屋/べんりや)'에서 '가게, 점포'의 '야(屋)' 대신 '집'의 '켄(軒)'이 쓰였다.


자동차 영업사원 출신의 다다는 마호로 역 앞에서 작은 심부름집을 운영하고 있다. 사장 겸 직원, 1인 회사다. 버스회사가 운행시간을 속이고 있다고 의심하는 의뢰인으로부터 정류소에서 운행시각을 점검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다다. 하루 종일 체크했지만 버스 운행시간은 정확했다. 일을 마무리할 즈음 어라, 또 다른 의뢰인이 보호를 맡긴 치와와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고 당황한다. 강아지를 찾아 나선 다다는 강아지를 품에 안은 교텐을 발견하게 되고, 두 남자의 '불편한 동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뭐, 여행도 하고 울고 웃고 그러겠지."

"여행요? 어디로요?"

"아주아주 먼 곳, 사람마음속만큼이나 먼 곳..."


연초 병문안 심부름을 갔던 다다가 소네다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주위에서는 '기쿠씨의 예언'이라고 했다. 다다는 이 예언대로 본의아니게 '사람 마음 속으로'의 여행을 교텐과 함께 떠난다.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어도, 교텐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 '나 좀 따라다니지 마'라고 말하자니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여자같고, '얼른 일거리라도 찾아보는 게 어때?'라고 말하자니 엄마 같다. 그래서 다다의 심부름집에 교텐은 눌러앉게 된다.


지역 밀착형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다다와 갑자기 굴러 들어온 수수께끼투성이 교텐 그리고 새 주인을 찾아야 할 치와와에게는 달리 돌아갈 곳이 없었다. 태어나서 자란 동네, 도쿄 교외에 위치한 인구 30만 명의 마호로 시 이외에는. 할 말은 많지만, 꾹 참고 작업에 임하는 것이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사람의 경영마인드라고 다다는 생각한다. 물론 '천방지축' 교텐은 그렇지 않다.


가슴 깊은 곳,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을 지닌 다다. 원래대로 회복될 리 없는 잘린 손가락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교텐. 두 남자는 완전히 다르지만 비슷한 상처와 교감의 접점이 있다. 그래서 둘은 말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안다. 그럼에도 다다는 늘 눈치가 없고, 교텐은 늘 제멋대로다.


분명 생각없이 행동하는 것 같지만 교텐의 어록은 뭔가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주인이 버린 치와와의 새 주인을 결정할 때 던진 "누군가한테 필요한 존재라는 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의미야"라거나, 마호로 역 뒷골목 여성을 스토커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작전을 펼치면서 "바퀴벌레는 냉장고 밑에서 완전히 기어 나왔을 때 탁 때려 잡아야 하는 거야!"라는 말이 그렇다.


창고 정리, 개집 수리, 등하굣길 바래다주기, 가구 재배치 등 잡다한 모든 일이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의 업무 영역이다. 그런데 위험한 아르바이트에 빠진 초등학생을 구해주고, 부모님을 살해한 여고생과 친구의 사연을 해결하는 등 심각한 형사사건에도 어쩔 수 없이 개입하는 용감한 두 남자다.


교텐이 주문한 두 개의 가도마쓰(門松/새해에 문 앞에 세우는 대나무와 소나무 줄기로 된 장식)처럼 다시 심부름집의 두 기둥이 되는 다다와 교텐-물론 교텐은 후불로 주문했고, 다다는 늦게 발견하면서 잠시 분노하지만-이 새로운 모험 또는 일상을 기대하게 하면서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은 마무리 된다.


"너무 오래 여행하면 돌아갈 곳을 잃어버려."


소네다 할머니는 연말 다시 다다에게 당부한다. "이제 그만 여행이 끝나길 기대하며 종착점에 도착하지만, 그곳에는 언제나 새로운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잃어버린 것은 완전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기억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 다다가 교텐을 만난 한 해의 교훈이다. "행복은 모양을 바꾸어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살며시 찾아온다"는 다다의 말에 공감한다. 두 남자의 우정과 행복을 향한 발걸음이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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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 '무진기행' 김승옥 작가 추천 소설
다자이 오사무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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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인간 실격(人間失格)>은 1948년 3월 발표, 지난 50여 년간 140회 이상 개판됐을 만큼 일본문학에 있어 대표작으로 꼽힌다. 사소설(私小說)이라는 일본 특유의 소설 형식을 개척한 작가로도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 실격>을 통해 자신을 위한 정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사소설은 자신의 경험을 허구화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써나가는 소설을 의미한다.


"너무나도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왔다."


청년 오바 요조의 수기는 강렬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인간 실격>은 요조가 남긴 세 편의 수기와 '나'로 표현되는 화자의 수기에 대한 감상으로 구성됐다. "나는 확신한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작가의 말처럼 요조는 작가 스스로이며, 요조를 바라보는 '나'역시 또 다른 작가로 읽힌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턱없이 부족한 가족의 사랑, 젊은 날의 방황과 여성 편력, 약물 중독과 수차례 자살기도, 강제입원, 그리고 절망적 결말까지 요조에게는 다자이 오사무의 삶이 투영됐다. 수기에 앞서 사진을 통해 본 요조의 인상을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상하게 남들을 역겹게 만드는 표정,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야릇한 표정의 아이', '괴담을 보는 듯 불쾌감이 느껴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묘한 미모의 청년', '어딘지 소름이 끼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이한 얼굴을 가진 사내'.


"나는 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는 것에 관하여 전혀 모른다. 나 혼자만 다른 인간인듯 불안과 공포를 느낄 뿐이었다." 요조의 첫 번째 수기는 어린 시절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내면의 고민을 털어놓지 못하고, 익살로 자신마저 속이려 드는 철저한 고독을 설명한다. 모든 언어와 행위는 자인하듯 '익살'로 숨겨진 '위선'이었다.


두 번째 수기에서 요조는 종학교 친구 다케카즈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들키게 된다. "일부러 그랬지?" 한마디에 요조는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가족과 고향에서 벗어난 고등학교 시절 요조는 도시의 친구로부터 술, 담배, 여자, 전당포, 좌익사상을 배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면서 '아무것도 선택조차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면서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한 유부녀와 동반자살을 꾀하지만 이마저 실패한다.


"서로 속이면서도 이상하게도 상처입는 사람도 없이,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정말로 완벽한,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예가 인간 생활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 비결만 알았더라면 나는 인간을 이처럼 두려워하거나, 혹은 필사적인 익살 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자살사건으로 더욱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된 요조는 점점 깊은 절망으로 빠져 든다. 여러 여성의 집을 전전하다 진정으로 '순수'를 느끼게 해준 한 젊은 여성과 결혼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의 어린 아내가 겁탈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다시 술과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또 한 번의 자살시도도 미수에 그치고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면서 '그야말로 폐인' 그 자체인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 실격>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하면서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청년의 고백이다. 끝내 지독한 파멸의 길을 가는 청년 요조의 내면이 다자이 오사무에 의해 날카롭고도 섬세하게 파헤쳐졌다. "어쩌면 세상이란 건 개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잠시, 요조는 "단지, 모든 것은 지나가 버렸다"는 한 가지 진리만을 느끼며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이다.(*)


*문화충전200%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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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산모 수첩
야기 에미 지음, 윤지나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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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시바타에게 '이름없는 업무'가 던져졌다. 누군가에 의해 사용된 담배꽁초가 담긴 컵이 치워지지 않은 채 회의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늘 그래왔듯 과장은 아무 생각없이 시바타에게 정리를 주문했다. 34살의 직장인 시바타는 이 부서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못하겠어요."

"갑자기 왜?"

"저 임신했어요. 커피 냄새만 맡으면 입덧을 해서요. 담배 연기도 마시면 안 되고요."


이렇게 시바타는 덜컥 임신을 했다. 거짓말에 의해 갑자기 임신 5주차가 된 것이다. 야기 에미(八木詠美)의 <가짜 산모 수첩(원제:空芯手帳)>은 평범한 직장인이 '가짜 임신부'가 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한 여성이 직장에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 사정이 <가짜 산모 수첩>에 나타난다. 사실 '요즘에도 이럴 수가'라고 생각되는 장면도 많지만, 일본사회의 사정은 다를 수도 있겠고 우리역시 한번 되짚어봐야할 이야기다.


'가짜 임신부'가 된 시바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정보도 얻고, 기록도 남긴다. '실제처럼'이 아니라 '실제상황'으로. 먼저 잡일이 없어지고, 초과근무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모처럼이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이른 저녁 시간임에도 전철 안 퇴근하는 직장인을 유심히 살피고, 갓 나온 신선한 저녁 재료도 편의점에서 고를 수 있게 됐다. 남는 시간은 영화보기와 음악콘서트로도 채워가면서 시바타는 '가짜'지만 오히려 훨씬 높아진 삶의 질을 느낀다.


과거 시바타에게 회사는 '습원'이 아니라 '늪'이었다. 1년 365일 내내 이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가스를 뿜어 대는 늪. '가짜 임신부'가 되면서 업무 분장에도 없는 업무, 이름도 없고 누구한테 직접 부탁받은 적도 없지만 자연스레(?) 시바타를 망가뜨려왔던 일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를테면 전화를 받고, 복사를 하고, 공용물품을 사고, 우편물을 분류해 일일이 책상까지 배달하고, 쓰레기를 줍고, 냉장고를 청소하고, 전자레인지까지 닦아내는 것들. 결정타는 누구의 손님이건 커피를 내가는 일이었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동정의 몸으로 잉태하니 천사다 뭐다 여기저기서 찾아오고. 난 경험하지 못했지만 임신 중에는 입덧 때문에도 힘들었을 텐데..... 제가요, 지금 임신한 척하고 있거든요. 천사도 박사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물론 부모님한테도 말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많이들 놀랐나 봐요. 계속 의외라고 난리네요. 뭐가 의외라는 건지, 참. 어차피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면서."


회사 송년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어린이 서점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여인과 눈을 마주친 시바타는 '가짜 임신부'임을 털어 놓는다. 세명의 동방박사에게 둘러싸여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그 여인 앞에서. 그동안 직장에서 쌓여왔던 자신의 고충에 무심했고, 방관했던 주위에 대한 서러움이 묻어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태어날 때부터 외로운 존재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아. 결국 인간은 누구나 혼자인데." 시바타는 '가짜'임을 잊은 듯 열심히 출산을 준비한다. <가짜 산모 수첩>을 기록하고, 에어로빅 학원에서 임신부 친구도 사귀고, 병원 검진도 받고, 음식도 조절하면서. 심지어 과도한 관심에 아기 이름까지 밝힌다. 빌 공(空), 사람 인(人)을 써서 '시바타 소라토'라고. 비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웃프다.


<가짜 산모 수첩>의 저자역시 직장을 다니는 여성이라고 한다.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서 발견한 인터뷰에서 그는 "남편과 사는 아파트에는 자신의 방이 없기 때문에 일을 마치고 나서 도서관에서 (책을) 썼다"면서 “회사와 집 사이에 자신의 시간이 있고, 상상의 장소가 있어 자유롭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즐거웠다"고 밝혔다. '이름없는 일'과 '즐거운 거짓말'의 상관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케하는 작품이다.(*)


* 컬처블룸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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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 - 반구대 암각화 이야기
구광렬 지음, 이종봉 그림 / 새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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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더욱 가까이 들리는 신석기 시대의 이야기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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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 - 반구대 암각화 이야기
구광렬 지음, 이종봉 그림 / 새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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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어떻게, 왜' 저토록 수천년을 견뎌온 깊은 새김을 남겨놓았을까. 


울산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암각화 유적이다. 사람의 전신, 얼굴, 바다와 육지이 생물, 수렵이나 어로와 관련되 도구, 당시 인간들의 생활상 등 3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특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그림은 약 7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포경에 대한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거북 한 마리가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는 곳, 바로 반구대(盤龜臺)에 오랜 시간 녹아 있던 이야기. 구광렬의 <꽃다지>는 문명의 여명기에 살았던 멀디 먼 우리 선조들의 삶을 표현했다. 반구대의 흐릿하던 그림이 <꽃다지>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며 되살아난다.


태화강 부족과 신석기 시대 반구대 암각화의 탄생이 우리의 기억에 살아있듯 느껴진다. 권력 투쟁과 사랑, 주변 부족과의 경쟁과 공존 등 신석기 시대 한 부족의 모든 것이 <꽃다지>에 들어있다. 부족의 우두머리인 '으뜸'과 모계사회를 지탱하는 '큰어미'의 부족의 연명을 위한 고뇌와 결단이 생생하다. 이들 주변의 '버금', '마름', 당골레', '알리미'와 같은 부족의 권위 체계도 흥미롭다. '으뜸'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알리미'가 역으로 마을의 여론을 으뜸에게 전한다는 설정도 눈길을 끈다.


으뜸 하의 아들 큰주먹과 그리매가 보여주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현대 정치에도 유효한 것으로 읽힌다. 부족의 생존을 위해 '큰어미'가 짊어져야하는 무게역시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냥을 잘하고, 강한 힘을 가졌지만 지혜와 덕이 모자라는 큰주먹, 슬기롭고 덕망이 있지만 백성을 먹일 근력이 부족한 그리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부족을 위해 인내하는 꽃다지 등 세 주인공의 삶이 낯설지 않다.


"으뜸이 되기 위해서는 몸, 머리, 가슴...... 모두가 튼실해야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슴이다.

가슴 속 따뜻함은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때가 지남에 따라 다른 이들의 가슴으로 파고 든다.

어차피 몸, 머리, 가슴이 모두 튼실한 이가 없다면

가슴이 따뜻한 이가 으뜸이 돼야 한다.

그 가슴으로는 한 하늘의 무리도 이끌 수가 있다.-매발톱


으뜸 하는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두 아들에게 묻는다. '으뜸은 뭣 하는 사람인가'. 두 아들의 대답은 상이하다. "온 마을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어깨에 메고 갑니다. 슬기로움, 끈질김, 부지런함으로 온 마을을 이끌어야 합니다"라는 그리매의 대답, 그리고 "사냥하지 않고 사슴의 생간을 먹고, 낚시 않고 새눈치를 구워 먹는 사람"이라는 큰주먹의 말.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어느 쪽이 진정한 지도자상인지 분간이 가능하다.


'끄트머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역시 생경하지 않다. 끄트머리는 우두머리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였다. 질문에 머뭇거리던 힘을 상징하는 후보자는 "도마뱀 꼬리 같은 것"이라 말한다. 우두머리가 살기 위해 도망칠 때 버리고 가는 것이 '끄트머리', 즉 국민이란다. 특히 대선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더욱 끔찍하게 들리는 신석기 시대의 답이다. 누군가가 떠올라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오메, 세오디 서노바살." 용서를 구하는 이 소리는 '큰얼' 가운데 '큰얼'인 고래를 향한 기도다. <꽃다지>는 고래사냥에 얽힌 이야기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굶주린 마을을 먹여 살릴 희망인 고래를 향한 경외와 이해, 그리고 사냥에 대한 기록-암각화-을 남기는 과정을 세세히 그려내고 있다. 저자가 소개한 파리 국립자연사박물관장은 반구대 암각화가 세계적인 문화 유산인 이유로 "인류 최초의 포경에 관한 기록일 뿐 아니라 그 연대까지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꼽았다고 한다.


<꽃다지>의 작가는 반구대 암각화를 두고 "그림이 아니다"고 했다. "가슴에 새겼기에 순전히 그리움"이라고 강조했다. "진정 그리움이란 그렇게 연필로 종이에 그리는 게 아니라, 원시의 돌로 가슴에 새김"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리뷰어스 클럽 소개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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