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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산모 수첩
야기 에미 지음, 윤지나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2월
평점 :
그날도 시바타에게 '이름없는 업무'가 던져졌다. 누군가에 의해 사용된 담배꽁초가 담긴 컵이 치워지지 않은 채 회의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늘 그래왔듯 과장은 아무 생각없이 시바타에게 정리를 주문했다. 34살의 직장인 시바타는 이 부서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못하겠어요."
"갑자기 왜?"
"저 임신했어요. 커피 냄새만 맡으면 입덧을 해서요. 담배 연기도 마시면 안 되고요."
이렇게 시바타는 덜컥 임신을 했다. 거짓말에 의해 갑자기 임신 5주차가 된 것이다. 야기 에미(八木詠美)의 <가짜 산모 수첩(원제:空芯手帳)>은 평범한 직장인이 '가짜 임신부'가 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한 여성이 직장에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 사정이 <가짜 산모 수첩>에 나타난다. 사실 '요즘에도 이럴 수가'라고 생각되는 장면도 많지만, 일본사회의 사정은 다를 수도 있겠고 우리역시 한번 되짚어봐야할 이야기다.

'가짜 임신부'가 된 시바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정보도 얻고, 기록도 남긴다. '실제처럼'이 아니라 '실제상황'으로. 먼저 잡일이 없어지고, 초과근무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모처럼이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이른 저녁 시간임에도 전철 안 퇴근하는 직장인을 유심히 살피고, 갓 나온 신선한 저녁 재료도 편의점에서 고를 수 있게 됐다. 남는 시간은 영화보기와 음악콘서트로도 채워가면서 시바타는 '가짜'지만 오히려 훨씬 높아진 삶의 질을 느낀다.
과거 시바타에게 회사는 '습원'이 아니라 '늪'이었다. 1년 365일 내내 이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가스를 뿜어 대는 늪. '가짜 임신부'가 되면서 업무 분장에도 없는 업무, 이름도 없고 누구한테 직접 부탁받은 적도 없지만 자연스레(?) 시바타를 망가뜨려왔던 일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를테면 전화를 받고, 복사를 하고, 공용물품을 사고, 우편물을 분류해 일일이 책상까지 배달하고, 쓰레기를 줍고, 냉장고를 청소하고, 전자레인지까지 닦아내는 것들. 결정타는 누구의 손님이건 커피를 내가는 일이었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동정의 몸으로 잉태하니 천사다 뭐다 여기저기서 찾아오고. 난 경험하지 못했지만 임신 중에는 입덧 때문에도 힘들었을 텐데..... 제가요, 지금 임신한 척하고 있거든요. 천사도 박사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물론 부모님한테도 말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많이들 놀랐나 봐요. 계속 의외라고 난리네요. 뭐가 의외라는 건지, 참. 어차피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면서."
회사 송년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어린이 서점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여인과 눈을 마주친 시바타는 '가짜 임신부'임을 털어 놓는다. 세명의 동방박사에게 둘러싸여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그 여인 앞에서. 그동안 직장에서 쌓여왔던 자신의 고충에 무심했고, 방관했던 주위에 대한 서러움이 묻어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태어날 때부터 외로운 존재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아. 결국 인간은 누구나 혼자인데." 시바타는 '가짜'임을 잊은 듯 열심히 출산을 준비한다. <가짜 산모 수첩>을 기록하고, 에어로빅 학원에서 임신부 친구도 사귀고, 병원 검진도 받고, 음식도 조절하면서. 심지어 과도한 관심에 아기 이름까지 밝힌다. 빌 공(空), 사람 인(人)을 써서 '시바타 소라토'라고. 비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웃프다.
<가짜 산모 수첩>의 저자역시 직장을 다니는 여성이라고 한다.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서 발견한 인터뷰에서 그는 "남편과 사는 아파트에는 자신의 방이 없기 때문에 일을 마치고 나서 도서관에서 (책을) 썼다"면서 “회사와 집 사이에 자신의 시간이 있고, 상상의 장소가 있어 자유롭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즐거웠다"고 밝혔다. '이름없는 일'과 '즐거운 거짓말'의 상관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케하는 작품이다.(*)
* 컬처블룸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