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 한 잔 술에 담긴 인류 역사 이야기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정세환 옮김 / 탐나는책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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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세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 정철, 장진주사(將進酒辭) 가운데


'마치 하늘을 마시는 것과 같다'는 칭송을 받은 샴페인, 가난으로 인해 젖먹이 아기에게까지 물렸던 진, 권투의 그로기(groggy) 상태라는 말을 나오게 한 럼주, 고급술의 대명사로 변신에 성공한 코냑,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시장 석권을 위해 각국에서 대표선수로 개발된 위스키 등 다양한 술에 얽힌 이야기가 넘쳐 난다. 미야자키 마사카츠의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에서 저자는 '술'을 통해 인류의 문화, 산업, 기술, 음식, 무역, 전쟁을 풀어 낸다. 인류사상 가장 오래된 술, 봉밀주부터 시작해 우리 식탁을 지배해온 술의 종류와 탄생 배경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술로 인한 세계사의 변화도 가벼운 터치로 표현했다. 또 여러 가지 술과 관련한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가득하다.


"18세 이전에는 절대 와인을 마셔서는 안된다. 서른 살까지는 적당히 마셔도 되지만 술주정을 하거나 과음을 해서는 안된다. 마흔이 되었다면 들뜬 기분으로 소란을 피워도 좋다. 와인이야말로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고, 괴로운 마음을 치유하며 젊음을 되찾아주어 절망적인 생각을 잊어버리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와인예찬'이다. 무거운 인생의 무게를 잠시나마 덜어내고, 괴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술'에 대한 플라톤의 말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술에 대한 생각'과 거의 흡사하다는 점이 재미있다. 연령대에 따라 술에 대한 절제를 강조하는 모습역시 마찬가지다. 보다 따뜻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하고, 보다 편하고 자유로운 대화를 이끌어내며, 새로운 아이디어마저 도와주는 술의 장점을 플라톤은 알고 있었나보다.



특히 기원전 17세기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시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 술집에 대한 규정이 기록돼있다는 사실은 놀랍기까지 하다. 맥주의 판매와 외상에 대한 기준을 정해놓았고, 술집에 숨어든 범죄자를 보호하면 안된다는 점까지 기술돼있다고 한다.


각종 술의 기원에 더해 음주법에 소개도 눈길을 끈다. 태양이 작렬하는 남미의 대표적인 술로 잘알려진 데킬라 이야기다. 레몬 또는 라임을 동그랗게 썰어 엄지와 검지로 집고 두 손가락 사이 밑동 부분에 소금을 올린다. 레몬이 내는 신맛을 입안에 머금고 소금을 핥은 후 원샷으로 마신다. 소금에 마게이에 붙어사는 붉은 나비 유충을 태워 분말로 만들어 넣으면 좋다고 한다. 뭔가 인간적인 음주법으로 데킬라는 더욱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가 설명하는 술집의 분류역시 새롭다. 에디슨의 백열전구 발명 이후 '제 2의 낮'으로 재탄생한 밤을 점령한 술집. 초기 숙박시설의 일부였던 술집이 여러 형태로 분화되는 과정을 책은 설명한다. 본디 지역 와인을 판매하던 '캬바레'가 프랑스에서 선술집을 의미하게 되고, 나아가 쇼를 즐길 수 있는 대규모 홀 '물랭루주'로 변화하는 과정이 눈에 띈다.  미국 서부 개척 전선에서는 손님 접대용 방을 뜻하는 단어 '살롱'이 술을 판매하는 음식점으로 거듭난다. 맥줏집 '에일 하우스'에서 시작된 '퍼블릭 하우스(펍)'은 이미 유명하다.



'바'가 생겨나게 된 이유도 재미있다. 미국 서부의 음식점에서 취객이 주인의 눈을 속여 마음대로 술통에서 술을 꺼내 마시는 경우가 늘어나자 술통과 손님을 가로지르는 봉을 설치하면서 '바'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와 달리 술집 앞 말을 묶어놓기 위한 '바'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지만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의 설명은 이렇다. 손님과 술통 사이의 바, 그리고 바를 지키는 감시자 '텐더'가 합쳐져 '바텐더'라는 직업까지 나오게 됐다고.


술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은 '취기'일 것이다. 사람의 긴장을 풀어줌으로써 평소와는 다른 편안함과 넉넉함까지 제공하는 술의 취기. 사람과 사람을 보다 가까이 이어주는 매개로서의 술. 아주 오래 전 벌꿀이 발효된 봉밀주를 처음 맛보았던 인류가 느꼈을 취기, 그 취기를 적절하고 편리하게 느끼고자함이 술 제조법, 보관법의 발전을 가져왔을 것이다.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가 전하는 풍부한 이야기는 '술'을 더욱 즐거운 상대로 여기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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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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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산불이 나자 숲에 사는 동물들은 넋이 나가 그 재앙이 무기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직 작은 벌새 혼자 부지런히 부리로 물을 떠날라 불길에 몇 방울씩 떨어뜨렸다. 그런 벌새를 보고 아르마딜로가 말했다.


"어리석긴, 그래서는 불을 끄지 못해."

"나도 알아." 벌새가 답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해야 할 몫은 하고는 있잖아."


피에르 라비의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위기에 닥친 사회, 위기에 처한 사람을 위해 우리의 모습은 아르마딜로일까, 벌새일까. 우리는 오늘 '내가 해야 할 몫'을 하며 살고 있을까. 래티샤 콜롱바니의 <여자들의 집>은 프랑스를 배경으로 이같은 물음을 던진다. 작가는 주인공 솔렌이 집이 없는 여성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할 몫'을 기필코 해내는 과정에서 답을 구해낸다.



부유한 동네에서 법학교수 부모님아래 부유한 동네에서 태어난 명석한 아이, 스물두 살에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유명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솔렌. 작가의 꿈은 일찌감치 접었지만 현재의 삶에 큰 불만은 없었다. 솔렌의 눈 앞에서 소송에서 패한 의뢰인의 갑작스런 투신 자살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을 맞닥뜨린 솔렌은 '번 아웃 증후군'에 빠져 모든 일에 자신을 잃어버린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 자체에 대한 의문마저 갖게 될 즈음 '자기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사회 봉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글을 대신 써 줄 작가'를 찾는 구인 광고는 솔렌을 프랑스의 새로운 세상 속으로 한발 다가서게 만든다.



솔렌이 맡게 된 일은 여성 쉼터에 머물고 있는 입소자들을 위해 글을 대신 써주는 것. '팔레 드 라 팜므(Palais de la Femme)'. 이른바 '여성 궁전'이다. 경계심이 강하고 배타적인 여성 궁전 거주자들과 솔렌은 '서로 알아가기'를 조심스레 시작한다.


<여자들의 집>은 여성 궁전에서 벌어지는 솔렌의 시간, 그리고 100년 전 1925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세군 페롱 사령관 부부의 헌신이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온 몸에 암 세포가 퍼지기 직전까지 거리의 여성을 위한 '여성 궁전' 설립에 모든 것을 바친 블랑슈, 그녀의 남편이자 전우인 알벵의 노력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려진다.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빈타는 남겨둔 아들을 위한 '엄마의 편지'를,  잡동사니를 가득 실은 쇼핑카트를 끌고 다니는 크베타나는 영국 여왕에게 사인을 부탁하는 편지를 요구한다. 한 번도 자신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는 라 르네는 침실보다 베낭에 둘러싸인 채 세탁실에서의 수면이 편하다. 성 정체성 혼란으로 인해 소중한 모든 것을 버렸던 이리스, 남편의 과도한 폭력으로부터 탈출한 뜨개질하는 비비안, 어머니의 비뚤어진 집착으로부터 도망친 릴리. 솔렌은 점점 그들의 삶을 공유하고 눈물을 함께 하는 존재로 변해 간다. 빈타의 딸 수메야가 말없이 건넨 젤리 하나로 시작된 솔렌의 봉사활동은 점차 깊이를 더해 간다.


최근 한 미혼모가 신생아를 중고물품 거래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입양시키겠다는 글을 올려 사회적 파장을 불러 왔다. 철없는 엄마의 행동을 비난하고, 부적절한 게시물을 걸러내지 못한 앱 운영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넘쳐났다. 그러나 왜 그녀가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우리 사회가 마련한 안전망일 수는 없었는지, 이것부터 따져봐야할 문제가 아닐까. '내가 해야 할 몫'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 말이다. <여자들의 집>에서의 '여성 궁전'에 날아든 진짜 궁전 '버킹검 궁'으로부터 온 답신처럼 절실한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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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하버드까지 (1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 나의 생존과 용서, 배움에 관한 기록
리즈 머리 지음, 정해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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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세. 아빠와의 첫만남. 아직 엄마의 뱃속에 웅크린 채 교도소 수감 중이던 아빠를  면회한다. 

5세. 엄마 아빠가 빠져든 하얀 가루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6세. 따뜻한 식사를 먹고 싶고, 따뜻한 코트를 갖고 싶지만 갈라진 아빠의 운동화를 외면할 수 없다.

8세. 집에서 '착한 딸'이 되려면, 친구들에게 '정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나의 일부를 숨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9세. 먹을 것을 위해 나도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12세. 어디에도 편히 쉴 곳은 없다. 학교와 집, 두 가지 종류의 결석이 늘어 난다.

13세. 집단시설에 구금된다.

15세. 죽음을 맞기 위해 병원으로 간 엄마, 홀로 남은 아빠. 그들로부터 벗어난 거리 생활이 시작된다.



6살의 리즈에게는 하루 한 끼라도 따뜻한 식사, 그리고 작은 몸 누일 수 있는 낡은 매트리스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정부 보조금마저 리즈의 부모가 견딜 마약을 사는데 들여야하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사람들을 위해 웃기는 얘기를 하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어린 아이.


리즈 머리의 실화,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원제 : Breaking Night)>. 소녀의 가슴에서 전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잠시도 딴청 피울 수가 없다. '나의 생존과 용서, 배움에 관한 기록'이라는 부제처럼 책은 리즈가 겪고 이겨낸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다. 


흔한 처세에 관한 얄팍한 기술도 아니며,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는 성공담도 아니다. 현재의 자신의 삶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감정과 사실을 그저 지나칠 정도로 무덤덤히 기록했을 뿐이다. 엄마 아빠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꼬맹이' 리즈에게 '생활'은 애초에 없었다. 오직 '생존'만이 작은 가슴과 머리를 지배했다. 먀약 중독자를 부모로 둔 리즈와 언니 리사에겐 평범함이란 존재하기 힘들었다.



정부 보조금이 온 날로부터 단 사나흘이 지나면 다시 배고픔의 시기로 되돌아가버리는 집. 한 번 사용할 마약을 구입할 5달러에 인생을 걸고 있는 엄마와 아빠지만, 리즈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다. 따뜻한 식사와 자식들에게 더 잘해주는 것을 원했지만 리즈는 자신이 하루 종일 따뜻한 음식을 먹지 못할 때, 아빠와 엄마는 2~3일 동안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대여섯살의 리즈가 말이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의도는 없었다. 단지 우리가 부모님에게 바라는 것을 갖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두 사람을 탓할 수 있겠는가." 여덟살 리즈는 자신의 삶에서 뭔가를 미워했다면 그것은 마약과 중독 자체였지 부모님은 아니었다고 한다. 리즈는 부모님을 사랑했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를 확신했다.


"인생이 최악으로 변할 수 있다면, 어쩌면 좋은 쪽으로도 변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 그 벽을 깨뜨리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몫'이란 것을 리즈는 깨닫는다. 어린 시절 수없이 들어왔던 그 무책임해보이던 낯선 이들의 이야기가 그녀의 가슴 속에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게 한 것역시 리즈 자신이었다.



불행이라는 이름보다 더욱 불행했던 리즈의 어린 시절을 관통한 것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책'이다. 비록 자식들에게 평온하고 안전한 가정을 제공하진 못했지만, 그들의 사랑만큼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자신마저 희생하고자 했던 리즈였기에 긍정과 변화의 삶이 주어졌으리라. 또 한가지. 친구들의 놀림,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눈빛을 피해 학교를 거부했던 리즈였지만 도서관으로부터 빌려온 아빠의 책, 친구들과의 거리생활에서도 잊지않고 찾았던 공공도서관은 그녀의 삶에 다른 한 축이 되었다.


건물 층계참과 옥상, 그리고 지하철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리즈. 수많은 장애물을 해결해야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겨버린 강한 의지는 결국 '하버드'라는 꿈에 그녀를 안착하게 한다. 리즈의 '생존'은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다.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 엄청난 트랙을 달려온 그녀의 '생활'이 또 다시 어찌 변화할 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언제든 새로운 출발과 도전이 두렵지 않은, 현실을 타박하거나 타인에 책임을 돌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변함 없으리라 믿는다.


많은 뉴욕 브롱크스 빈민가의 가족이 그랬듯 성공을 위해 발버둥 치는 많은 가족이 여전히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 그 출발선이 다르더라도, 설사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언제나 벽을 깨며 나아가라"고 리즈는 말하고 있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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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 엔젤
가와이 간지 지음, 신유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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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짓은 한없이 다정하고, 치유는 끝이 없으며, 아낌없이 주기만 할 뿐 앗아가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마치 깨끗하고 순수한 눈옷을 걸친, 천사와도 같은......" 일명 '스노우 엔젤'로 불리는 완벽한 마약-의존 약물이라고 표현되는-을 책은 이렇게 표현했다.


인체에 전혀 해가 없으며 부작용도 없는, 그러면서도 오로지 뇌 마약으로 작용해 인간에게 '여기가 천국'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의 깊은 평화를 선물하는 약물이라. 이같은 '마약'이 존재할까, 과연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가와이 간지(河合莞爾)의 <스노우 엔젤(スノウ・エンジェル)>은 이처럼 '세상을 지배할 마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 책에는 마약밀매와 관련된 수사물에 그치지 않고, '마약'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그리고 '나쁜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함께 녹아 있다.



전직 형사 진자이 아키라는 자신이 사랑했던 동료 형사 히와라 쇼코를 죽음에 이르게한 주범을 찾아 도망자 신세에 놓여 있다. 당시 다섯 명의 살해범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지만, 그들을 사주한 진짜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 신분을 벗고 이름도 숨긴 채 9년 째 방황하고 있다.


하루하루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보내면서 '도망의 이유'조차 아득해질 즈음, 전 상사였던 경시청 기자키 헤이스케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 <스노우 엔젤>의 진실을 향해 수사를 시작한다. 기자키의 소개로 진자이가 만난 사람은 후생노동성의 마약 단속관, 속칭 '마토리'인 미즈키 쇼코. 공교롭게도 진자이의 품안에서 숨을 거둔 쇼코와 이름이 같다.


진자이가 잠입수사를 통해 얻어내야하는 것은 '스노우 엔젤'의 실체, 그리고 이 약물을 만들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검거하기 위한 증거 확보다. 수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사망한 백발의 샤로노프가 완성했던 '최후의 레시피', 바로 '스노우 엔젤'이 일본에서 출현하는 것을 막아야한다는 미션이다. 진자이는 스스로 마약판매상의 보조 노릇을 하면서 '스노우 엔젤'에 한걸음씩 다가가는 과정이 숨가쁘게 진행된다.



"요컨데 국가란 놈은, 어떤 국가든 국민의 건강보다는 돈이 중요한 거에요."


진자이를 고용한 마약판매상 이사 도모히코의 설명은 알코올, 담배, 설탕, 카페인 등 그 해로움이 약하더라도 의존성이 강한 성분을 국가의 이익을 위해 합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으니 '인체에 무해한 마약'이라면 같은 이유에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궤변이지만, 궤변으로만 들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의존성 강한 물질을 팔아 챙기게 되는 국가의 세수가 어마어마하므로.


책에 등장하는 일본에서 소비되는 각성제는 5조 엔 정도. 일본의 1년 국가예산의 약 5%에 달하며, 지하경제이므로 비껴간 소비세만 무려 400억 엔 수준이라고 한다.



고령화 사회로 연금은 바닥나고, 실물 경제는 아래로만 향하고, 복지예산은 턱없이 치솟기만 하는 일본 정부의 고민은 바로 재원 마련이다. 이미 아베 신조가 주장했던 세 개의 화살에 더해 'G계획'과 'W계획'이 <스노우 엔젤>에 제시된다. 운 두 개의 화살에 대한 가정이 흥미를 끈다. 도쿄올림픽-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됐으며, 지금은 성공개최가 요원하지만-을 통해 국가 재건을 꿈꾸는 왜인들이 생각한 계획이 '도박과 의존약물'이라는 상상에 소설은 바탕을 둔다. 'G'는 도박, 'W'는 '하얀 석유'의 앞자리 영문 글자다.


미즈키와의 밀약을 통한 진자이의 분투, 그리고 마약상들과 머리싸움이 긴박하게 진행된다. 특히 죽은 쇼코를 향한 '도망자' 진자이의 내면 묘사가 치밀하다. '죄인을 용서하라'는 신의 메시지, 즉 종교에 대한 물음도 <스노우 엔젤>은 던지고 있다. 마약판매상 이사는 마약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법이 무르기 때문이란다.


" 죄인을 용서하라는 저주의 말 때문에 인간은 앞으로도 영원히 범죄라는 비극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야. 세상에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되는 죄도, 결코 용서해서는 안되는 인간도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하는데 말이지." 일견 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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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화염
변정욱 지음 / 마음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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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 30초.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던 남산 국립극장에서 터진 총성에 대한 기록, 변정욱의 <8월의 화염>이다. 소설은 24살 재일교포 문세광의 단독범행이 아니라는 가정하에서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했다. '이 사건으로 과연 누가 가장 이득을 보았는가'라는 합리적 의심에서 출발한 <8월의 화염>은 아직 풀리지않고 있는 미스터리를 소상히 다루고 있다.



'백전백패'라는 불명예를 안고 사는 인권변호사 민규는 피폐해진 가계를 살리기 위해 세상과 손을 잡을 채비를 한다. 자본을 거머쥐고 있는 기업주, 권력을 맘껏 휘두르는 정치인과의 승산없는 싸움은 낡아빠진 자신의 구두처럼 더없이 고단해진 상태. 행운인지, 불운인지 그에게 문세광을 변호하라는 요청이 떨어진다. 그저 반전의 기회로 여기던 민규는 사건을 분석하면서 점차 충격적인 실체에 접근하게 되고, '세상과 타협할 때가 아닌 세상과 맞짱 뜰 시간'임을 직감한다.


오사카를 떠나 중앙정보부 요원이 득실거리던 조선호텔에 여장을 푼 문세광.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풀자 금속 물체가 우르르 쏟아 진다. 스미스앤웨슨 38구경 리볼버 한 자루와 총알 다섯 발. 어설픈 위조여권과 금속 무기를 지닌 채 김포공항을 무사히 통과한 과정이나, 자유의 몸으로 누릴 마지막 일주일간의 행적에서 문세광을 사주한 배후세력의 존재를 <8월의 화염>은 느끼게 한다.



"그날 그 시각, 오전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저녁노을이 지기 전처럼 세상이 침침하고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책은 단순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역대 영부인 가운데 가장 국민적 사랑과 추앙을 받은 고 육영수 여사가 남긴 에피소드와 그를 떠나보내는 국가의 아픔을 소상히 묘사하면서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광화문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200만이 넘는 인파 속에서 거행된 영결식 장면은 그날의 사건이 얼마나 큰 충격과 상처로 남아있는지 알려 준다. "목련화를 닮은 조국의 어머니는 가셨습니다"는 멘트에 모든 아픔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문세광에 의해 저격된 것이 아니라면, 문세광의 단독범행이 아니라면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8월의 화염>은 각종 드러난 사실과 증언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질문한다. '대중은 큰 거짓말일수록 더 잘 속는다'는 히틀러의 말은 실체를 향한 민규의 수사를 독려한다.


"너 이 새끼, 빨갱이야!"

"당신들 생각에 반대하면 무조건 다 빨갱이입니까?"


빨갱이라는 이름의 주홍글씨면 모든 진실을 뒤엎고 남을 당시 권력 주변을 둘러싼 미개한 인간들의 '비릿한' 행태는 사건만큼이나 불편함을 전한다.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가발공장에 취직한 여공들이 몇달치 밀린 월급을 요구하다 군화발과 몽둥이에 무참히 짓밟히는 장면, 과도한 노동의 대가로 기계에 의해 손목하나가 잘린 힘없는 노동자가 낸 손해배상 청구가 '조국의 근대화'라는 이름하에 단칼에 묵살되는 모습이 그러하다.



"너 이 새끼, 적페야!"

"당신들 생각에 반대하면 무조건 다 적폐입니까?"


권력을 쥔 자들의 '비릿한' 행태는 여전히 불편하다. 속전속결로 진행된 문세광의 재판, 그날 그를 기소한 서슬퍼런 검사는 몇 해 전 끝내 수갑을 찬 채 압송되는 처량한 뒷모습을 가진 노인으로 작가의 시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 노인을 보며 작가가 가진 생각은 울림이 크다. '이 세상에 알아서는 안되는 진실은 결코 없다'는 것. 


자신의 영웅과도 같은 육 여사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떠있던 합창단 소녀의 죽음은 힘든 시기 보통사람이 가졌던 꿈, 그리고 그 꿈이 어떤 세력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는 슬픈 과거를 보여 준다. 소녀가 남긴 '비겁자는 천 번 죽고, 용자는 한 번 죽는다'는 경구가 지금 시대에도 진한 감동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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