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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러 수용소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0년 7월
평점 :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죄가 무슨 죄야? 나쁜 짓하는 사람이 죄지, 인마!"
한 영화에서 나온 대사다. 범죄자를 옹호하는 듯한 말에 검사로 나온 최민식의 일갈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고호의 <악플러수용소>를 넘기며 이 영화의 장면이 다시금 떠오른다. 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가차없는 응징이 잘못된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고, 제대로 된 내일을 만든다는 신념이 <악플러수용소>에 가득하다. 어쩌면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극도로 갈라진 사회, 이를 이용해먹으며 더욱 분열과 혼돈을 꾀하는 정치권력이 득세하는 요즘 세상에 절실한 가치일 수도 있겠다.
<악플러수용소>는 서기 2024년, 그러니까 머지않은 미래에 벌어지는 상황을 그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더 이상 사이버 윤리교육은 허울에 불과하며, 법이란 것역시 제 입맛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고장난 저울로 전락한 지 오래. 세계 IT강국이라는 보기 좋은 훈장만 달았을 뿐 그 배설물을 처리할 자정능력을 상실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그대로 나타낸다.

"정부는 오늘 2024년 1월 1일12시를 기점으로 인터넷 악플러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온라인 범죄행위자 교정수용소, 이른바 '악플러수용소'가 설치되고, '바퀴벌레는 완전박멸은 불가능하지만 개체수는 줄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경찰, 정신의학과 교수 등이 전국에서 잡혀온 악플러들에게 심판을 내린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는 과정에 대해 <악플러수용소>는 묘사한다.
역경을 딛고 국민배우로 성장한 고혜나의 자살 사건, 그 이면에 바퀴벌레처럼 숨어있던 악플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최고의 인기를 얻었음에도 익을 수록 고개 숙이는 벼처럼 오히려 겸손하고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배우, 끊임없는 역사 공부를 통해 제대로 된 가치관을 정립해가는 연기자, '백마를 살 돈이 있는 여자는 백마 탄 왕자를 꿈꾸지 않는다'는 소신을 피력하는 여성이었던 고혜나는 역으로 악플러들에게는 '짓밟고 싶고, 상처 주고 싶은 피사체'의 모든 조건을 갖춘 대상으로 비쳐진다. 완벽할 수록, 도저히 범접할 수 없을 수록 그들에겐 더욱 악랄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로 말이다.
전국에서 잡혀 온 악플러의 모습은 현실이 그렇듯 전혀 특이할 게 없다. 곧 시집갈 딸을 둔 인테리어 업자.정식 간호사를 꿈꾸며 상경한 간호조무사, 사법고시 1차 합격생, 누구나 부러워할 엄친딸 여중생, 피시방을 전전하는 백수, 평범한 누군가의 며느리 등.

"제 딸은 그저 평범한 아이입니다."
"원래 죄라는 건 평범한 사람이 짓습니다. 악마도 죄 짓기 전에는 평범했어요."
수용소에 갇힌 어린 딸을 둔 아버지의 항변에 수용소장은 최민식의 대사처럼 단칼에 잘라낸다. 속절없이 당하는 피해자를 막기 위해 더욱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 이러다 사회 전체를 범죄자로 만들 것이라는 온건론자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장면은 우리 시대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회가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관용을 베풀 때는 세 가지가 동시 발현됩니다. 거지 같은 법, 거지 같은 법관, 거지 같은 논리." 수용소장이 지적이 따끔하다. 수용소 옥상에 씌여진 'L.O.V.E'. 그 뜻은 사랑으로 교화한다는 따위가 아니다. "여기 들어온 자여, 희망은 버려라(Lasciate Ogni spetanza, Voich'Entfrate!)"
'악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무료법률상담게시판에 올라오는 많은 글이 '피해자의 고민'이 아닌 '가해자의 방패'에 관한 것이라는 현실은 독자를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별똥별에게 소원을 비는 모습을 두고 고혜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별은 죽으러 가는데, 사람들은 왜 죽으러 가는 별한테 소원을 빌어요? 명복을 빌어야지." 그냥 웃자고 한 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