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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평점 :
숙명(宿命).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의미한다.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숙명>은 가난하고 고된 성장기를 겪으며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형사가 된 유사쿠, 강력한 자본과 권력을 가진 기업의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라 뇌의학자의 길을 걷는 아키히고라는 두 남자의 슬픈 '숙명'에 대한 이야기다.
두 남자 사이에는 또 다른 '숙명'에 갇힌 여성 미사코가 등장한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신데렐라' 미사코는 자신의 운명이 무언가에 의해 정해져있지 않을까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린 시절 유사쿠의 추억이 담긴 벽돌병원은 사나에가 있었기에 더욱 각별하다. 누나처럼, 엄마처럼 천진난만한 세상을 가진 사나에의 갑작스런 죽음은 유사쿠의 삶에 항상 물음표로 남아 있다. 사나에를 보내고 그리워하던 어느날 벽돌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키히고와의 인연은 그 답을 향해 떠나는 출발점이 된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전기기기 제조업체인 UR전산 우류가의 며느리가 된 미사코는 시아버지 나오아키의 유언을 남편 아키히고에게 전한다. "아키히고, 미안하다, 잘 부탁한다."
우류 나오아키의 죽음 이후 UR전산 기업내 권력다툼이 제대로 벌어지기도 전에 우류가의 반대세력 수장인 대표이사 스가이가 석궁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유사쿠는 이 사건을 자신이 해결해야할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가나에의 죽음 뒤에 숨겨진 비밀, 아버지가 죽기전에 남긴 노트가 남긴 숙제가 바로 유사쿠의 '숙명'이다. 초중고 연이어 도저히 자신이 이길 수 없는 벽처럼 여겨졌던 '숙적' 우류 아키히코와의 관계역시 그렇다. 유사쿠가 풀어야할 것은 단지 살해사건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인생은...... 보이지 않는 실이 조종하고 있어."
미사코의 한마디는 <숙명>이 가진 커다란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스가이의 죽음으로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 중대한 무언가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살해사건의 진상, 수십년 간 UR전산 내부에 감춰왔던 그들만의 음모를 밝히기 위한 유사쿠의 추리 속에는 단순한 미스터리물이 아닌 '히가시노 게이고 표'가 분명히 붙어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 인간에 대한 존중, 무분별한 과학 기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유사쿠, 아키히고와 미사코 세 사람의 얽히고 섥힌 인연,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숙명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그래, 누군가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사람의 운명은 참 잘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