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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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리거나, 혹은 그 존재로부터 배신을 당해 스스로의 위치조차 아득해질 때 사람은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어디론가 돌아갈 곳. 고향이나 부모님이 계신 곳처럼 예전의 평온한 자리가 될 수도 있고, 놓아두었던 사회적 위치 혹은 무작정 과거의 어느 시점이 될 수도 있다. 그저 지금과는 다른, 어딘가 스스로의 위치를 확연히 매김할 수 있는 곳이라면.


요코제키 다이(横関大)의 <그녀들의 범죄(彼女たちの犯罪)>는 바로 '돌아갈 곳'에 대한 이야기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한 남자,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 명의 여자는 어쩌면 '돌아갈 곳'을 찾아 복잡하게 얽힌 동선을 그려 나간다. 일본에 살고 있는 여자들이 그들의 시대와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투쟁기로도 읽힌다.



"자기는 도모랑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뭐야?"

"그건...... 프러포즈를 받아서요."


마뜩잖은 답이다. 유복한 집안의 자식이자 정형외과 의사인 진노 도모아키와 결혼한 유카리. 평범한 간호사였던 그녀는 부모님께 반항하고자 하는 도모아키의 욕심을 모른채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인다. 결혼 전 성인 엔도 유카리라는 이름의 시신으로 발견될 때까지 아내, 며느리라는 이름의 하녀와 같은 일상에 갇혀 '돌아갈 곳'을 희구한다.


도모아키의 불륜 상대인 히무라 마유미. 도모아키의 대학 후배로 학창시절 치어리더팀을 거쳐 대기업 홍보과에 근무하는 미모의 여성이다. 결혼이라는 티켓을 손에 넣더라도 그 티켓이 쓸모없어지는 불행한 여자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출발점에 서지도 못한 자신, 모처럼의 상대가 유부남임을 몰랐던 자신이 못마땅하다.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뒤, 자신마저 죽을 곳을 찾아 방황하는 다마나 미도리는 진노 집안과 가까운 이웃이다. 도모아키의 소꿉친구이자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그녀는 막대한 유산을 배경으로 술과 여행이라는 도피처를 찾아 헤맨다. 새로운 경험의 여행이 아니라 죽어 돌아가기 위한 여행을 향해 늘 떠난다.


그리고 앞선 세 명의 여자에 형사 구마자와 리코가 더해지면서 <그녀들의 범죄>의 '그녀들의 사정', '그녀들의 거짓말', '그녀들의 비밀' 등 세 장을 만들어 간다. 자신의 삶에 순종적이던 유카리의 느닷없는 가출, 그리고 그녀의 자살 소식이 전해오면서 미스터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한적한 료칸에 일주일간 머물다 끝내 벼랑에서 투신한 여자, '돌아갈 곳이 없었던' 그 여자에 숨겨진 비밀을 시골형사 와키야와 세타가야 경찰서의 우에하라가 파헤친다. 어느 누구도 만족할 수 없을 결말을 찾아 달려간 그들이 찾아낸 그녀들의 '돌아갈 곳'이 애처롭다.



<그녀들의 범죄>에서 시간은 잔인하다. 누군가에겐 늘상 새로운 시간이 펼쳐지지지만, 누군가에겐 과거에 멈춰버린 시간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겐 반복되는 무의미한 시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흘러간 시간은 각자에게 잔인하게 할퀴고 지나간 흔적으로 남아 있다.


요코제키 다이의 작품 곳곳에 일본 사회가 가진 편견대한 반항이 담겨있다. 여성의 시각에서 결혼과 출산, 불륜과 이혼, 사회적 성취 등 있을 법한 불만이 등장인물을 통해 담담하게 묻어 나온다. '무난한' 이혼을 위해 상간녀에게 "내 남편과 절대 헤어지지 말라"고 당부하는 고단한 아내의 모습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그녀들의 범죄>속 그녀들에게 '어디론가 돌아간다'는 의미는 어쩌면 새로운 시간을 갈망하는 소박한 염원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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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수법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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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에서 고서를 정리하다 바닥이 무너져 백골에 이마를 찢고, 의뢰인에게 잡혀 손가락 모양의 피멍을 팔에 달고 다니며, 조심성없는 간호사의 박치기에 자빠져 갈비뼈가 성한 날이 없는 '불행한' 탐정. 그녀의 활약(?)을 들여다 보면 화려하지 못할 지언정 억세게 재수없는 상황이 반복된다. 병원신세는 그녀의 일상일 정도다. 그 와중에도 탐정으로서 능력이 차근차근 발휘되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와카타케 나나미(若竹七海)의 <이별의 수법(さよならの手口)>에 등장하는 '순수탐정' 하무라 아키라는 참으로 털털하고 소박한 매력을 풍긴다. 냉철하고 치밀한 두뇌 회전, 강인하고 세련된 외모와 체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편하게 다가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웃 누나같은 느낌이랄까.



일본에서 태어나 대학교 졸업한 이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서른 살 이후 10여 년간 하세가와 탐정사무소와 계약해 프리랜서 탐정으로 일했다. 지금은 살인곰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로 근무하고 있는 여자. 현재 나이는 40대, 여전히 남자와의 인연은 없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설명대로 <나쁜 토끼(悪いうさぎ)> 이후 13년 만에 <이별의 수법>으로 모습을 드러낸 탐정 하무라 아키라의 약력이다. 허탈해질 정도의 아무것도 없는, 오히려 불쌍한 여자들만 모여사는 셰어하우스 '스타인벡 장'은 그녀의 집이다.


살인곰 서점 점장 도야마의 지시로 책 인수를 위해 철거 중인 고택으로 자전거를 돌린 하무라. 예상치 못한 백골 시신을 발견한 하무라는 수십년 집 아래 묻혀있던 살인 사건을 해결해내면서 <이별의 수법>은 시작한다. 하무라의 불행, 그리고 입원과 함께.



"20년 전, 스물네 살 때 집을 나갔죠.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딸의 생사를 알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이 딸을 찾아줬으면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왕년의 스타 여배우 아시하라 후부키의 요청에 고민하던 하무라는 결국 정에 이끌려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딸을 찾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본격적인 불행'은 비단 후부키만의 것이 아니다. 은막을 주름잡던 여배우가 감추고 싶던 비밀이 하무라의 조사에서 하나둘 밝혀지면서 책은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질주한다.


"그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라져요."


20년 전 후부키의 딸을 찾기 위해 나섰던 탐정, 전 매니저의 동생, 가사 도우미, 이모 할머니로 불리던 대모, 그리고 자신의 딸까지. 미스터리한 실종과 사망이 얽히고 섥히며 <이별의 수법>은 흘러 간다.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여러 건의 에피소드가 정교하게 배치된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이별의 수법> 속에는 가족의 가치가 들어 있다. 인간의 욕심, 그로 인한 불행이 자신 만의 것이 아님을 책은 설명한다. 무책임을 돌려서 드러내는 사회,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인정많은 집주인, 세금을 납부하는지 아닌지로 인간이 구분되는 삭막한 세상도 함께 그려진다.


하무라 앞에 나타나는 또 한 명의 캐릭터 도마 시게루 경부. 고압적이면서 이해할 수 없는 패션감각을 지는 도마 경부와의 인연은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이 계속될 것을 암시한다. 경찰에 약점을 잡혀 심부름을 떠맡기까지 하는 '어리버리한' 탐정 하무라의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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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의 주인 - 23일 폐쇄구역
지미준 지음 / 포춘쿠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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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덕근이와 칠백이 있었으며, 지금도 우리를 쳐다보며 생각할까. 복종이냐 복수냐 사이에서. 지미준의 <게토의 주인>은 인간과 동물-개와 고양이-의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버림받은 유기견 덕근이와 상처입은 길냥이 칠백이는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꿈이나 본능은 아니다. 하긴 한자인 유기견과 우리말 신조어 길냥이의 차이에서 두 종간의 거리는 이미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토(Ghetto).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세운 유대인 강제거주구역이다. 소설 <게토의 주인>의 제목은 그만큼 인간과 동물의 거리를 표현하고자 한 게 아닐까. 1943년 4월 유대인들을 마지막으로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할 당시 바르샤바의 게토는 '인권'이라는 단어조차 어색할 잔혹한 본성만이 살아 움직인 공간이었다.



<게토의 주인>은 공원 벤치 아래 변을 참으며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덕근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덕근이 엄마 아빠에게 가장 먼저 배운 말은 '기다려'였다. 기다릴 줄 알아야 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먹이에 혀를 길들여야 했고, 주삿바늘의 따끔거림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그런 엄마 아빠가 '믹스견'이라는 단어를 오르내리고부터 달라지더니 숫자 몇 개에 덕근이를 여기에 남겼다. '기다려'와 함께.


공원 벤치에서 엄마 아빠를 기다리던 덕근은 짧은 수일간 몸에 새로 생긴 상처만큼이나 엄청난 경험을 겪게 된다. 철없는 아이들로부터 이유없는 폭행을 당하고, 육포 몇 조각에 개 수용소로 끌려갔다 탈출하기까지. 다시 공원을 찾는 사이 일어난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냄새 속에서 엄마 아빠를 찾아 기억하는 덕근. 결국 물음이 떠오른다.'나는 버려진 것일까?'


이러한 덕근을 바라보던 또 하나의 시선. 귀 한쪽이 잘려나갔으며 생식능력을 잃어버린 고양이 칠백이다. 물론 인간에 의해서 저질러진 일이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분노로 변화하는 덕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순응으로 변화하는 칠백이 대화한다. <게토의 주인>이 주는 메시지가 여기에서 감지된다.



"왜 너를 사랑했을까?" 세상 풍파를 겪은 칠백이 혼란스러운 덕근에게 물어본다.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어?" 애완견의 삶에 익숙했던 덕근의 대답이다.


"이유가 없는 게 이상한 거야. 모든 행동에는 동기와 보상이 따른다고." 그렇다. 사람은 덕근을 통해 만족감, 우뤌감, 대리만족 등 보상을 원했다는 것이 칠백의 생각이다. 엄마 아빠가 아닌 그저 '개주인'일 뿐이라는 것. '믹스견'이라는 주위의 시선으로 인해 그 동기와 보상이 사라진 순간 덕근에 대한 '사랑'은 생명을 다한 것이다.


그런 덕근과 칠백, 유기견과 길냥이의 공원에서의 동거가 시작된다. 여기에 성대를 제거당한 암캐 매기가 합류하고, 칠백의 옛 동료-같은 무리가 맞겠다-마루와 호박이도 함께 하면서 개와 고양이 조합의 덩치는 점점 커져 간다. 서로 싸우지 않고 상생하는 버려진 동물의 집단이 모습을 갖춰 간다.


투견 암캐 타이슨이 이들과 조우하는 과정은 읽는이로 하여금 가슴 저리게 한다. 투견장에서 이유모를 목숨 건 사투를 이어왔던 타이슨. 스파링이 시작되면 개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싸워야 했으며, 가끔 '우리가 왜 싸워야 하지?'라는 눈빛을 보내는 상대가 있었다면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 되는 곳.



타이슨을 덕근과 칠백 무리로 이끈 까마귀의 말에 <게토의 주인>이 이끌고 싶은 답이 있다.  "뭔가 좀 이상해. 개와 고양이잖아? 그런데 안 싸워! 오히려 서로 돕고 산단 말이지." 철창에 갇힌 자식마저 뒤로하고 탈출한 타이슨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 자유를 얻으려는 의지와 책임감이 가득하다.


그들의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동물의 본능이 발현될 때마다 인간의 경계와 처단은 분명해졌다. 복수냐 순응이냐를 놓고 덕근과 칠백의 갈등은 시작되고, 결국 '인간과의 공존'을 두고 둘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인간이 정한 평화와 질서, 그 속에 숨은 이기적이고 잔인한 묵인은 '게토의 23일'이라는 비극을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현실로 다가온다. 



인간과 동물의 '상생과 공존'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 보게하는 <게토의 주인>. 특히나 인간의 시각이 아닌 덕근과 칠백의 눈높이에서의 전개가 신선하다. 책을 덮을 즈음 다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덕근과 칠백의 안식처-공원 벤치=마저 인간에 의해 위협받게되는 시점 공원 관리소장의 고민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유기동물에 대한 '정리'를 통보받은 그는 관리소 창고 안 깊숙한 곳에서 개와 고양이 사료 봉투 앞에서 탄식한다.


"이놈들을 다 우짜면 좋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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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행
호시노 도모유키 외 지음 / 문학세계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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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상상력이다. 일본 미니시리즈 '기묘한 이야기(世にも奇妙な物語)'보다 더욱 '기묘한' 단편이 이어진다. 호시노 도모유키(星野智幸) 스스로 '지금 인간 세상이 품고 있는 어두운 면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있다'고 표현한 소설집 <인간은행>은 세상을 인정사정없이 뒤엎어버린듯한 느낌마저준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인간은행', '선배 전설' 등 11개의 단편은 노인, 환경, 빈부격차, 실업, 출산 등 지구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상상마저 넘어선 현재를 그리고 있다.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쓴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의 표현이 과하지 않다고 느낄 정도다.



사람을 돈으로 계산해 인간 활동 자체를 화폐로 변환하는 시스템(인간은행), 노인 간병 문제를 '에코화'라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외면하는 사회(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남녀 구분이 없어지고 인간과 꽃이 융합한 새로운 인류(스킨 플랜트), 홍수로 침수된 반지하에 갇혀 스스로 흙과 동일한 존재로 변하는 인간(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 등 현실이 가진 경계를 완전히 무시한 스토리가 읽는이를 당황하게 만든다.


"이 사람, 돈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돈입니다."


진카(人貨), 즉 인간 화폐. '인간은행'은 사람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준 뒤 이를 갚지 못하면 돈이 되어 노동으로 대신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돈으로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람으로 계산하는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주인공 간토는 '화폐'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부정하는 편이다. 가진 재산을 모조리 써버리고 소유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뒤 인간은행을 찾게 된다. 우연히 성공하게 된 옛 동료와의 동업으로 빌린 돈을 다 갚게 되지만, 여전히 '화폐'는 그에게 난해하다. 스스로 화폐가 되어 자유를 느끼는 후가 씨를 만나면서 인간화폐라는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된다.


'선배 전설'은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로 고통받고 있는 현실과 오버랩된다. 집을 소유한 사람보다 홈리스가 더욱 정당화되는 사회가 낯설지만 신기하게도 설득력마저 갖는다. '집부수기'라는 운동의 시초로 전설이 된 선배는 집이라는 관념에 묶여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집을 지키기 위해 정말 무엇을 잃어가고 사는지' 깊은 고민을 던진다. 베드룸 로커라는 베개와 이불만 있는 거리의 시설에서 많은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그때는 2050년 즈음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외친다. "꼭 길바닥으로 나와보십시오!"



이상기온으로 고통받는 일본. 사람들은 존재마저 혼돈한다. 단편 '핑크'는 연일 40도가 넘어서는 고온현상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자정기능을 이야기한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연못을 보던 나오미는 신기한 모습을 본다. 연못으로 뛰어드는 새, 연못에서 날아오르는 물고기. 더위를 피해 물 속으로, 뜨거운 물을 피해 공중으로 향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집단 광기와도 같은 회오리춤이 희망으로 전해진다.


'스킨 플랜트'에서는 사람의 몸에 심은 씨앗이 자라 과일이 되고 채소가 된다. 멋내기 유행의 정도를 넘어 자신의 몸에서 생산한 작물을 섭취하는 지경까지 이르러자 사람들은 이제 꽃을 피워보길 원한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꽃피우기지만 욕망은 누를 수가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꽃피우기는 성공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을 안게 된다. 바로 한 번 꽃을 피운 사람의 몸은 성적 기능이 종료된다는 점이다. 자칫 인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꽃피우기. 그러나 서서히 인간과 꽃이 하나로 동화하면서 씨를 뿌려 지구 어디에서건 열매와 같은 인간이 탄생한다.



이렇듯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은행>에 실린 이야기 하나하나는 실제 일어날 수 있는 미래일 수도,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지못하는 아득한 과거일 수도 있겠다. 그는 "등장인물들은 인간에게 실망하고 인간계를 등진다"면서 "하지만 그것은 아직 보지 못한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마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모미 쵸아요' 편은 작가가 실제 한국 방문에서 경험한 일을 쓴 수필과도 같다. 일본보다 더욱 빨리 변화하는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부러움이 전해진다. 길거리에서 여자한테 혼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진차 한구쿠나무자(진짜 한국남자)'로 비쳐진 작가. 그래서 "한국에서 배우고 에너지를 얻겠다"는 호시노 도모유키의 다짐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인간은행>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기만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의 가능성을 마음대로 그려보는 자유를 준다. 역자의 표현대로 '먼 별에서 날아온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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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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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로 시작해 <고양이>로 이어지고, <인간>에서 <신>까지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야기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은 언제나 신선하다. 희곡의 형식을 가진 <심판>의 등장인물은 달랑 4명, 장소는 분명히 지구는 아닌 저 세상 어딘가일 뿐 명확하지 않다. 단지 무대는 재판정, 지상의 삶을 보여줄 스크린, 재판정이 아닌 쉴 공간 등 커튼에 의해 세 구역으로 구분돼있다.


'영혼 번호 103-683', 1947년 프랑스에서 출생해 2007년 프랑스에서 사망한 아나톨 피숑에 대한 심판이 벌어지는 곳. 지상에서 판사로 살다 폐암에 걸려 수술 도중 죽음을 당한 아나톨, 그를 위한 변호사 카롤린, 아나톨의 삶이 지닌 잘못을 지적할 검사 베르트랑, 그리고 재판장 가브리엘이 무대에 등장한다.




"당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새로 왔어요?"

"제가 새로 온 게 아니라, 당신이 '새로운' 체계에 온 거에요."


아직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아나톨의 물음에 카롤린은 그저 '삶의 연장'으로 보면 될 것이라고 답한다. <심판>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존중하는 '유머'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한 사람-혹은 우리 사회-에 대한 심판을 위해 치열한 논쟁이 이어지는 곳곳에 네 명의 캐릭터는 맘껏 재치있는 멘트를 날려 준다. 예를 들자면 하루 세 갑의 담배로 몸을 혹사시켰다는 추궁에 아나톨은 "멘솔이었다"며 줄곧 항변하는 식이다.


약간은 고집스럽고 괴팍한 성격의 아나톨과 그를 심판하는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엉뚱함은 <심판>에 '인간적인 매력'을 더해 준다. 재판이 진행되는 중간중간 베르트랑과 카롤린은 전생에 못다한 싸움을 이어간다. 검사와 변호사로 일하기 전 그들은 지상에서 부부였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엄격하고 명확해야할 재판장 가브리엘은 때로는 소녀같은 감성을 드러내며 '제대로 심판이 될까'라는 의심마저 갖게 한다.



<심판>은 <신>에서처럼 '거대한 눈'이나 <제3인류>와 같은 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주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결혼, 취업, 교육, 정부 등 인간의 관습이나 제도의 허점에 집중한다. 책에서 주 35시간 근무라는 프랑스의 근로기준은 아나톨의 죽음에 직간접 영향을 끼쳤다.


과거에도 그랬듯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심판>에서 '윤회'와 함께 '신'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반복되는 도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영원한 죽음, 혹은 불변의 삶을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완전한 존재에 이르지 못한 아나톨은 <심판>에서 '멍청이'로 표현된다.


"세상에는 멍청이가 가득하단다. 상처도 쉽게 받아 면전에서 멍청이라는 얘기도 해줄 수없지. 진실을 들려주면 못 견디는 거. 이게 바로 멍청이들의 근본 특성이지. 진실을 알려 주면 알려 준 사람을 원망하면서...... 멍청이들은 칭찬이라면 죽고 못 살아. 이게 그들의 두 번째 특성이지."


"자 그럼, 여기 인사법대로, '다시 만나요'."


천상의 '심판'을 받아들인 아나톨이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삶을 요리에 비유하자면 유전 25%, 카르마 25%, 자유의지 50%가 재료로 들어간다는 설명이다. 우선 성별을 고른 뒤 국적, 강점과 핸디캡에 이어 '사용 가능한' 부모를 결정한다. 다시 태어나게 될 스스로가 그렇다.




네 사람이 진행하는 '심판'은 놀이처럼 경쾌하게 진행된다. 그 속에서 독자는 인간의 삶에 대해 새롭게 들여다보게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만든 무대의 스크린을 쳐다보듯이. 너무나 인간적인 천상의 재판장 가브리엘이 정의한 삶은 특별할 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멍청이'일지도 모르겠다.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 죽는 거에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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