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글쓰기나 공부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심각한 심리적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의 삶과 내면의 미궁에 빠져 쓸쓸한 절망과 자책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글쓰기와 공부가 생계를 돕기는커녕 위협하는 현실에서, 현실을 향한 비판의 칼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반성하는 자에게 꽂힌다. 반성은 이제 현실이 아닌, 반성하는 자의 눈을 겨누는 칼이 되었다.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의 칼은 이처럼 변형된 형태로 현대에도 살아 있다. 돌이켜 보건대, 현대사에서 지식인의 반성이 이렇게 참담한 자기 모멸감을 동반한 적은 없었다.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 유신시대와 피의 80년대 등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가혹한 시대였지만, 최소한 지식인의 존재 기반을 '역사·사회적으로' 공인한 행복한 시대였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지식인들에게 존재의 붕괴와 내적인 파탄을 '개별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말을 바꾸면, 작가와 지식인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공허하고 빈약한 내용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무능과 무력과 무의미!

갖가지 '무(無)∼'의 자의식에 시달리는 지식인은 부당한 현실 세계와 끝없이 갈등한다. 이 갈등은 자신의 내면이 삶의 근거인 이들에게 자아의 붕괴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만든다. 계속되는 내적 붕괴는 삶과 내면의 미궁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아예 나가는 길조차 봉쇄해 버린다. 너무 많이 왔기에 돌아갈 수도 없으며, '나'를 둘러싼 것이 어둠뿐일 때, 현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은 끝내 자책과 모멸감으로 화한다. 이 중 가장 나쁜 것은 애초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글을 쓰고 공부하는 일이 잘못된 삶의 출발점이었다는 결론은 '존재론적으로' 참혹하다. 글쓰기와 공부로 채워진 자신의 삶과 내면을 통째로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고통스럽기만 했던 길은 그 길을 걸어온 자의 내면에 그대로 새겨진다. 미궁이란 공간의 개념이 아니다. 아무리 곧고 넓은 길도, 엉키면 '미궁'이 된다. 미궁은 길이 꼬여 스스로에게 들러붙은 교착 상태이며, 길의 자기 함몰 상태이다.

작품과 지식 생산자(오늘날 지식인은 지식 생산자나 전달자로 전락하고 있다. 지식인 자신과 현실 체계의 내·외적 요인의 동시 작용 때문이지만,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현실 체계에 힘을 가하는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담론의 주체가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현실 체계의 권력을 어떤 형태로든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이른바 '잘 나가'지 않으면, 그는 말할 수 없거나 말해도 무시당한다. 작가와 작품 역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의 시대에 진정한 저항과 창조의 정신은 이렇게 눈을 뜬 채 쇠퇴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권력과 자본, 즉 정치와 경제적인 문제이다. 사실, 이 둘 또한 다른 것이 아니다.)의 현실에 대한 절망적인 진단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내가 미궁에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야만 한다. 미궁은 삶의 공간이 아니라, 모험과 탈출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궁을 관통하는 길을 찾아낼 때, 미궁은 다시 '길'이 된다. '미궁'을 본래의 '길'이 되게 하는 것, 우리 시대의 작가와 지식인의 중요한 역할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궁을 빠져나가는 데 유용한 도구는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는 단지 문학과 예술의 수사법이 아니다. 아이러니는 삶의 본질이며 속성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작품과 지식을 생산하는 '무기력한 일'의 피로감은 그 작품과 지식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 글쓰기와 글읽기의 '무기력한 일'에 따른 절망은 그 무기력한 일의 산물인 글을 통해 소진된다. 내면의 미궁을 비추는 빛이 어둠을 완전히 없애는 경우는 드물지만, 도처에는 크고 작은 빛들이 사력을 다해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본질적으로 글이란 타자를 향한 발화이며, 타자의 어둠을 한 순간이라고 밝혀줄 때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된다". 특히 시는 창작의 주체인 시인 자신을 포함해 모든 존재에게 빛이 되기를 꿈꾸는 장르이다. 그런데, 어둠으로 상징되는 억압과 남성적 질서를 극복한 결과물이 '꽃'이라니! 때가 되면 시드는, 한낱 연약한 아름다움이라니! 그런데 때가 되면 시드는 연약함이야말로 여성성의 핵심이며 가장 눈부신 미덕이다. 근대의 남성중심문화가 갖는 가장 치명적인 악덕은 때가 되어도 시들 줄 모른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때가 되어도 시들지 않고 진시황처럼 영생의 욕망을 탐닉하기에 급급한 추악한 권력, 도무지 휴식과 쇠락을 배우지 못하는 인간들, 사용기한이 다하고도 썩지 않는 상품의 잔해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어두운 미궁의 한 구석에서 꽃이 되기를 꿈꾸며 빛나는 등불들 가운데, 임영조의 시집 그림자를 지우며(2002)는 부드럽고도 깊은 빛으로 우리를 매혹한다. 어쩌면 이 시집은 미로들 사이에서 출구를 가리키고 있는 반짝이는 작은 화살표인지도 모른다.

(이하생략)

-[여/성이론] 통권 제7호에 실린 김수이의 임영조 시집 서평 "미궁의 아이러니"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