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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역사는 신세계 사람들에게 인디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된다. . .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아주 평화롭고 유순해서, 전하께 맹세하오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 나은 백성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며, 말은 부드럽고 상냥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벌거벗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예절 바르고 훌륭합니다."

그러나 고지식한 유럽인이었던 콜럼버스는 이들의 평화롭고 유순한 태도를 나약함이나 미개함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이들도 일하고 씨 뿌리고 그 밖에 필요한 일들을 해야 하며 우월한 유럽의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약 4세기(1492-1890)에 걸쳐 수백만 명에 이르는 유럽 사람들은 신세계 사람들에게 백인의 생활 방식을 강요해 왔다.

콜럼버스는 백인의 생활 방식을 가르치겠다고 친절히 대해 주었던 타이노족 인디언 열 명을 스페인으로 데려갔다. 이 인디언들은 스페인에 도착해서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그 직후 하나가 죽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인디언을 처음으로 천당에 들어가게 했다고 즐거워했으며 그 기쁜(?) 소식을 서인도 제도에 서둘러 퍼뜨렸다.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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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학살이 끝났을 때 큰발과 그의 부족민 반수 이상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153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많은 부상자들이 도망가다가 죽었으므로 사망자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최종적으로 집계한 것을 보면 인디언 350명 중에서 거의 3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들은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대부분 동료 미군의 총알이나 기관총의 유탄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부상당한 군인들을 파인 릿지 주재소로 출발시키고 나서 일부 미군들은 운디드니의 학살 현장으로 갔다. 그들은 아직 살아 있는 인디언들을 끌어 모아 마차에 실었다.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해서 죽은 인디언들은 그냥 내버려두었다(눈보라가 그친 뒤 시체를 파묻으려고 운디드니로 찾아갔을 때는 큰발을 비롯한 죽은 인디언들이 추위에 얼어붙어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상당한 인디언(남자 4명, 아녀자 47명)을 실은 마차는 어두워진 뒤에야 파인 릿지에 도착했다. 모든 막사는 군인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인디언들은 혹심한 추위 가운데 포장 없는 마차 위에 웅크린 채 떨어야 했다. 드디어 한 장교가 성공회 예배당의 의자를 끌어내고 거친 마루 위에 건초를 깔았다.

1890년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찢기고 피 흘리는 부상자들이 촛불 켜진 예배당에 옮겨졌을 때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인디언들은 서까래에 늘어뜨려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수 있었다.

설교단 뒤 합창대석 위에는 엉성한 글씨로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땅에는 평화, 사람에겐 자비를."

(695쪽)

 

디 브라운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나무심는사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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