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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인들은 미국인, 영국인 및 기타 유럽인들이 19세기 내내 발휘해 왔던 기술--'열등 문화' 인종의 절멸을 재촉하는 기술--을 습득했음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의 사례를 쫓아 헤레로인(Herero, 남서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 사는, 반투어를 쓰는 종족)을 보호구역으로 쫓아냈고, 그들을 목초지는 독일인 이주민들과 식민 회사가 접수했다. 헤레로족이 저항하자 아돌프 레브레흐트 폰 트로타(A. L. von Trotha) 장군은 1904년 10월에 헤레로인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경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헤레로족은 무장 여부에 관계없이 사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헤레로족은 폭력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단지 그들을 사막으로 몰아내고 국경을 봉쇄했을 뿐이었다.

스타프 장군은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설명하였다. "아주 철저하게 한 달 간에 걸쳐 사막 지역을 봉쇄하여 절멸의 작업을 완수했다. . . 사람들이 그르릉거리며 죽어가는 소리와 그들이 내지르는 미친 듯한 분노의 비명이. . . 무한대의 장엄한 침묵 속에 울려 퍼졌다." 나아가 스타프 장군의 설명은 "판결은 시행되었고, 더 이상 헤레로족은 독립된 인종이기를 멈추었다"고 보고한다.

스타프 장군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성과였다. 군대는 전국민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우기가 시작되자 독일 경비병들은 마른 웅덩이 주위에 쓰러져 있는 해골들을 발견했다. 이 웅덩이는 깊이가 7~15미터에 이르렀고, 헤레로족이 부질없이 물을 찾으려고 판 것이었다. 인종 전체--약 8만 명의 인간들--가 사막에서 죽었다. 겨우 몇천 명만 남아서 독일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1896년 쿠바의 스페인 사람들이 고안하고, 미국인들이 영어화하고, 보어 전쟁(1881년과 1899~1902년 동안 트란스바알의 금과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보어인과 영국군 간에 벌어진 전쟁) 동안 영국인들이 다시 사용한 '강제 노동 수용소'라는 말이 독일 언어와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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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프 장군은 반란의 원인을 '헤레로족의 호전적이고 자유를 사랑하는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헤레로족은 그렇게 호전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지도자인 새뮤얼 마헤레로(S. Maherero)는 20년도 넘게 독일인들과 하나하나 조약을 맺어나갔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토지의 대부분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인디언들과 맺은 조약에 구속감을 느끼지 않았듯이, 독일인들 역시 고등 인종으로서 원주민들과 맺은 조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북아메리카에서처럼 세기 전환기에 있었던 독일의 이주 계획은 원주민들이 가치가 있는 토지를 포기하는 것이 전제였다. 그러므로 반란은 '헤레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로 환영을 받았다.

영국인, 프랑스인 및 미국인들이 대학살을 변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주장이 독일어로도 표현되었다. 파울 로르바흐(P. Rohrbach)는 베스트셀러 저서인 [세계의 독일 사상] (German Thought in the World, 1912)에서 이렇게 썼다. "가치 있는 어떤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존재물들은 인종이든 개인이든 상관없이 생존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로르바흐는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 이주 문제를 담당하는 수장으로 있을 때 식민 철학을 배웠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부족의 보존이. . . 위대한 유럽 민족들과 백인종 일반의 확산보다 인류의 미래에 더 중요하다고 잘못된 철학이나 인종 이론이 아무리 떠들어도 지각 있는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원주민이 고등 인종을 위해, 즉 고등 인종과 그 자신의 진보를 위해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는 법을 배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도덕적 생존권을 획득한다.

-스벤 린드크비스트 [야만의 역사] 한겨레신문사 2003 (2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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