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핵폭탄을 용인하고 있는 걸까요?"
- <해외 칼럼> '핵의 그늘 아래서'

[속보, 세계, 사설/칼럼] 2002년 06월 03일 (월) 16:30

  다음은 인도의 작가이자 시민운동가인 아룬다티 로이의 ‘핵의 그늘 아래서(Under the Nuclear Shadow)' 전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간 핵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지난 2일 영국의 라디오4 방송에 발표된 이 칼럼을 통해 로이는 핵전쟁의 허망함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진정 지켜야 할 인간적 가치들을 역설하고 있다. 
  로이는 지난 97년 ’작은 것들의 신‘이란 소설을 발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했으나 이후 반전ㆍ반세계화 시민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 해에는 그간 시민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파워 폴리틱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편집자
  

  어느새 외교관 가족들과 관광객들은 모습을 감추고, 유럽과 미국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습니다. 기자들 대부분은 델리의 임페리얼호텔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들중 대부분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묻습니다.
  
  “왜 아직까지 이곳에 있는 거요?”
  “핵전쟁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없습니까?”
  
  핵전쟁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높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만일 내가 떠나고 난 다음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 친구와 나무와 집과 강아지와 다람쥐, 그리고 새들, 나와 친하고 내가 사랑했던 이 모든 것들이 핵폭탄의 무시무시한 화염에 한줌 재가 돼버린다면 나는 무엇에 의지해 살 수 있을까요? 누구를 사랑하며, 또한 누구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회가 나를 받아들일까요? 이곳 인도에서처럼 비록 말썽쟁이로라도 나를 받아들일 사회가 있을까요?
  
  우리 모두 이곳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난을 견뎌 왔습니다.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또한 지금 죽는다면 수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비를 기다리고, 축구를 기다리며, 정의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TV에서는 나이많은 장군들과 철없는 앵커들이 선제공격, 보복공격 능력 등을 열심히 떠들고 있습니다. 전쟁이 마치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되는 양 말입니다.

  
  나는 친구들과 히로시마ㆍ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다룬 영화 ‘예언(Prophecy)'에 관해 얘기합니다. 시체가 강을 뒤덮고 살아있는 사람들도 살갗이 벗겨지고 머리가 빠져 고통스러워 합니다. 우리는 특히 건물 계단 위에서 녹아 없어진 한 남자를 기억해냅니다. 우리 자신도 그 남자처럼 계단 위의 자국으로만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상상을 하면서...
  
  남편은 나무에 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무화과 나무의 꽃가루받이에 관한 부분도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마다 서로 다른 나나니벌이 꽃가루를 옮겨준다고 하는군요. 그 종류가 1천여개 가깝다고 합니다. 하지만 핵전쟁이 일어나면 이 나나니벌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겠지요. 내 남편과 그가 쓰고 있는 책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시민운동가인 내 친구는 나르만다 계곡의 댐 건설에 반대하는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녀가 단식에 들어간 지 오늘로 12일째가 됩니다. 그녀, 그리고 그녀와 함께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시민운동가들은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학교를 불도저로 깔아뭉개고 숲을 없애며, 수도펌프를 뽑아 없애고 사람들을 마을에서부터 강제로 쫓아내려는 데 대해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신념과 희망의 행위입니까.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세계는 쓸모없는 것이란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줌의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전쟁을 불사한다며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반면) 비폭력은 멸시받고 있습니다.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 가진 것을 빼앗긴 사람들, 굶주림, 가난, 질병, 이런 것들은 이제 만화의 우스개 소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반테러동맹의 유명 인사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오가며 자제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토니 블레어가 도착해 평화를 설교하겠지요. 다른 한편으론 인도와 파키스탄 양쪽 모두에 무기를 팔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저를 찾아오는 모든 서방 언론인들이 마지막으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제 책은 안 쓰시나요?”
  
  그 질문은 나를 서글프게 합니다. 책이라니요? 지금은 인류문명의 총화인 음악, 미술, 건축, 문학, 이런 것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괴물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책을 써야 할까요? 지금, 바로 지금, 나의 최대의 적은 ‘무의미함’입니다.
  
  핵폭탄이 바로 ‘무의미함’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핵폭탄이 실제로 사용되든 안 되든,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핵폭탄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파괴하고, 삶의 의미를 뒤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왜 핵폭탄을 용인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왜 핵폭탄을 이용해 인류 전체를 협박하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일까요?

아룬다티 로이/인도 작가ㆍ시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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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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