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개 블래키의 우울증 탈출기 - 이유없이 우울하고 외로운 사람을 위한 책
베브 아이스베트 지음, 김은령 옮김 / 명진출판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비가 많이 온 여름 한철이었다. 사람들은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조량을 늘리고 낮에 자지 말고 몸을 좀 움직이라고 충고했지만 우울증에 걸리면 밤에 잠을 못 자고 무기력해진다. 필사적으로 인터넷을 서핑하며 얻어낸 극복 방법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항우울제를 9개월 이상 복용한다. 2. 전문의를 찾는다. 3. 일랭일랭이나 클레이세이지 같은 아로마 오일을 사용한다. 나는 이 중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돈이 많이 들 것 같아서였다.

나는 실용서를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경제적 형편이 곤란해지면서 새로 책을 사는 일 자체가 드물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을 사 보게 된 것은 거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책에도 나와 있지만 우울증에 걸리면 깊은 구렁에 빠져 꼼짝 못하게 된 느낌이 든다. 이럴 때 무기력함을 이기고 서점에 나가 책을 산다는 것은 평소보다 몇십 배 증가된 중력을 이겨내야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점에 주저앉아 이 책을 읽다가 결국엔 눈물까지 흘렸다. 블래키와 해피의 태도를 비교한 그림 중에 해피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슬프지만 계속 울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하는 장면에서 나도 눈물이 터져나왔다.

우울증은 정말 이상한 병이다. 나만 따라다니며 비를 뿌리는 먹구름에 비교할 만 하다. 주위 사람의 이해를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그 때문에 사정은 더욱 악화된다. 아무도 나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오히려 자신을 탓하면서 먹구름만 더 험악해지는 것이다.

저자는 호주의 인기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라는데 그 자신이 우울증을 겪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도 우울증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이 책은 의사나 임상심리학자들의 관련 서적보다 훨씬 쉬우며 친근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보이는 어둠>같은 본격 문학 작가의 책보다는 좀더 밝고 실용적이다.

우울증이 심각한 문제가 된 사회는 구조적인 결함을 반드시 짚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환자들에게 하나같이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제안하지만 그것이 사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고 사회 환경은 오히려 역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전문가의 처방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울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힘든 건 알지만 언제까지나 우울증에 끌려 다닐 수는 없지 않느냐'고 다독이지만 이는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좋은 회사원, 좋은 부모, 좋은 학생이 되도록 만들어 사회가 계속 잘 돌아가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태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전제를 염두에 두고도 이 책에서 미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몇주일을 우울증에 사로잡혀 몸부림을 쳐도 (겉으로 볼 땐 시체놀이를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고 해보자. 내 상태의 심각성에 대해 암호로나마 도처에 송신을 해도 위로 한마디 못 얻는다고 해보자 (워낙 전염성이 강해서 아무도 접근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점점 더 고립되어 갈 때, 누군가 내게 '노력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얻지 못한 적이 있지 않니?' '어렸을 때 어른처럼 행동하도록 기대되지 않았니?' 물어보며 원인을 돌아보게 해주고 미궁 속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는 데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할 때 이보다 더 큰 힘이 되어주는 것이 어디 있을까? 이 책의 미덕은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 잃어버린 친구, 가족, 형제의 역할을 대신 해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