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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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U-도서관을 이용하는데 재미가 들렸다. 간편하게 어플로 책을 대여하면 지하철 내 설치된 무인 대여기에서 책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간편한지! 아무튼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던 중 우연히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공부도 잘해, 사회적 지위도 높아, 거기에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글솜씨까지 갖춘 분이라 매우 부러웠다.

어렵고 현학적인 내용의 글을 쓰긴 쉬워도 술술 책장이 금방 넘어가도록 쉽게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분은 그 어려운 읽기 쉬운 글을 쓰는 분이었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더 할말이 없다. 이보다 이 책의 주제를 잘 나타낸 말은 없다.
제목부터 끌렸고 첫 문장부터 끌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구절에 와서는 완전히 감정이입까지 되고 말았다.

나는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손석희 님의 책 소개글이다. 이보다 더 내 맘을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을 것같다.

나 또한 책을 읽는 내내 나와 가치관, 성향이 너무 잘 맞아 신기해하면서 읽었으니까....

앞으로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 바로 이 책이 될 것이다.

 

22~25페이지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고민의 출발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불행할까'다.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기적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성취하여

평화적 정권교체가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릴 위험 없이 강남역, 홍대 앞에서 새벽까지 젊은이들이 술 먹고

심지어 길바닥에 쓰러져 자기도 하는 몇 안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지표로는

적어도 세계 상위 20퍼센트 또는 10퍼센트 내에 드는 장점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가 싫어서 이민 가고 싶다고들 하지만 세계지도를 놓고 정말로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열몇 곳을 빼고는 살기 좋다 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운 인류의 현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힘들어하며 미래를 불안해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걸 두려워하고, 사회에 절망한다.(생략)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중고등학교 때 지루하게 배우던 로크, 밀,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이름과 함께 나오는,
지금의 서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다는 그 개인주의 말이다.

무슨 시대착오적인 소리냐, 19세기 얘기를 21세기에 하고 있냐는 반문이 나올 것이다.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약 근원이라며 앞에 포스트 내지 후기가 붙은 길고 복잡한 대안을

얘기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은 이거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이전에 구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사회일까?

자본주의 후의 대안을 모색하기 전에 제대로 된 자본주의도 해본 적이 있나?
근대적 의미의 개인을 존중해본 경험 없이 탈근대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 아닐까?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 겨우 한 세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 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우리가 서구에서 수입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개인들을 전제로 성립되어 있다.

우리 사회 존립의 근거인 가장 근본적인 사회계약,즉 우리 헌법 질서의 근간이 그렇다. 이건 모두 유치원 때부터 배워온 지루할 정도로 상식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슬플 만큼 이 사회에
내면화되어 있지 못한 이야기다. 뭔가 오랜 역사를 가진 명품을 수입하기는 했는데, 장식용에 그치고 있다.
다들 뻔히 아는 것인데도, 누구도 새삼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내 머릿 속을 열고 구구절절 생각들을 끄집어 내서 쓰신 줄알았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문제, 남녀차별, 세대간의 갈등 등은 전 세계가 겪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는 급격하게 시대가 변했으므로 다른 나라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한 번에 해결해야한다는 문제가 있고, 또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풀어가는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앞으로 우리가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나마 숨 좀 쉬고 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같다.

 

44~46페이지
음악 고등학교 재스 오케스트라 드러머였던 젊은 감독 데이미언 셔젤은 지휘자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던
자기 실화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화에 바탕했다고는 하지만 영화는 비현실적인 지점까지 밀어붙여서 현실감이 없어지기도 한다.
감독도 언급했듯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재킷 초반부의 악마같은 교관이

극한까지 신병을 몰아붙이는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이런 극적인 과장은 의도된 것이니 영화적으로 즐기고 말아야지 '이런 교수법이 허용가능한 것인가?

'학생의 재능을 끝까지 끌어내기 위해서는 이럴 필요도 있는 것인가?'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으로

곧장 연결시키면 곤란하다고 본다. 당연히 허용 안 되지!
그렇게 몰아 붙인다고 다 경지에 오르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경지에 오르는 이도 많다.
천재,광기,극한의 노력, 악마와의 거래 등은 매력적인 서사의 소재일 뿐이다.
악마와의 거래를 언급하고 보니 이 영화에서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주는 교수 역의 J.K.시먼스가
선량하고 내성적이던 주인공을 음악적 성공에 미쳐 모든 걸 내던지도록 몰아붙이는 과정은

메피스토텔레스와 파우스트의 거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성취, 성공에의 열망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간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나는 저만큼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걸까?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한다는데...'라는 식의
자기계발 강박증으로 소비하는 것은 위험하고 유해한 감상법이라고 본다.
이 영화에 대한 감상글을 몇 가지 검색해보니 젊은 관객들이 이런식으로 영화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철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스티브 잡스가 매혹적이라 하여 그의 괴팍함과 못된 점 조차 찬양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점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 평가해야한다.

그리고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


'성공한 이들은 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착각에 빠진 대중은
벌거벗은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노예로 전략할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인구의 2퍼센트에 불과한 지배계급인 영사(영국사회주의)내부 당원들이
13퍼센트의 실무자 중간 계급을 동원하여 85퍼센트의 노동자 계급을 사육하는 동물처럼
지성적인 사고의 싹을 잘라내며 온갖 선전선동과 공포의 조작으로 통치하듯 말이다.
영화 하나 보고 너무 멀리 갔는지 모르겠으나, 자기계발 신화에 중독된 사회이기에 이런 생각이 기우만은 아닐 것같다.

 

영화 위플래쉬 관련 내용이었는데, 내가 왜 사람들의 영화 리뷰와 친구와의 대화에서 불편함을 느꼈는지,

이 글을 보고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힌 느낌을 받았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 치열하게 사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못나서 더 열심히 해야해, 난 왜 더 저렇게 극한으로 노력해본적이 없는가'하는 발상은 위험하다 생각했다.

이제 그만 좀 힘내고 싶고, 나도 내 노력만큼 보상받고 싶다.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너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합당한 대우를 못받는 것은 불공정하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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