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좋을 그림 - 여행을 기억하는 만년필 스케치
정은우 글.그림 / 북로그컴퍼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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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일기장이나 여행기를 들쳐보는 것만큼 짜릿함은 없다. 간간히 만년필에 대한 소개도 나오고 이래저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나는 그리 여행을 많이 다닌 건 아니지만, 늘 노트와 필기감이 좋은 펜을 들고 다니며 이것저것 끄적이길 좋아한다.

 

늘 불안하고 도망치고싶어하던 십대때는 이유없이 이스탄불에 가길 원했고, 자유롭게 발길 닿는대로 흘러가며 사는게 꿈이었다.

콩나물 시루처럼 빡빡하게 찡겨서 죽지못해 간다는 출근길에 이 책은 잠시나마 나를 이스탄불에, 교토에, 폴란드로 데려다 주었다. 여러 개의 소실점이 만나 하나의 건물이 탄생하고 그 속에 녹아든 저자의 시선과 여행지에 애정어린 소감은 나를 더욱 더 여행에의 열망에 불타오르게 한다.

 

 

‘러스킨의 주장에 동의‘ 편은 늘 내가 느끼던 바를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듯하여 특히나 공감하며 읽었던 부분이다.

디지털카메라, 스마트폰이 생겨나고 누구든 쉽고 빠르게 아름다운 풍경이나 맛있는 음식 등을 눈으로 즐기기보다 사진으로 담아내기 급급한 현실이 오늘날이다. 해돋이 시즌을 가도, 공연을 가도 스마트폰을 치켜든 물결을 우린 당연하게 여긴다. 내 각막으로 들어오는 풍경과 그 당시 느낌을 온전히 즐기기보다 이 순간을 담아내서 SNS 올리기 급급하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을 찍고 늘 사진은 이것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며 불평아닌 불평을 심심찮게 하고는 한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아름답고 좋은 것은 흘러가는대로 두기보다 무조건 소유하려는 강박관념때문인지도 모른다. 러스킨의 말처럼 사진과 그림 중 어떤 것이 진정한 미(美)의 소유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같다.

 

 

사색과 여유로움은 여행을 하는 목적아닌 목적일테다. 그러나 늘 바쁘고 쉬는 기간도 3-4일 정도로 짧게 정해져있는 현대판 노예(?)인 대부분의 회사원들, 사람들은 어떻게든 짬을 내어 조금이라도 더 보고 더 맛보고 더 사진으로 담아내려한다. 어쩌면 이런 어쩌지 못하는 세태가 우리에게서 여유를 빼앗고 아름다운 풍경마저 소유하려는 개념을 갖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SNS에 앞다투어 올라오는 여행사진들은 어쩌면 조금이라도 쉬고싶어하는, 조금이라도 여행지의 행복감을 남겨두려 아둥바둥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닐까하여 조금은 서글퍼진다.

 

 

저자의 말처럼 스케치는 장소의 구조나 색에 대한 관찰을 끊임없이 품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스케치를 하며 주의깊게 바라보고 사색에 잠겼던 여행지는 기억에 더 오래남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에도 나오는 세인트 패트릭 성당은 나도 방문해봤음에도 그렇게 큰 감흥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같이 여행갔던 친구들과 여행 스타일이 맞지않아 무조건 많이 보고 사진으로 남기려는 태도에 지쳐버려서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이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성당이었다는 것도 아일랜드인들과 관계가 있는 곳이라는 것도, 이 책을 보고 방문한지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으니...

 

나는 늘 혼자하는 여행을 선호했었는데, 꼭 누군가 함께 여행하는 저자는 내가 놓친것들을 상대방의 사진에서, 시선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했다. '아, 이런 매력도 있겠구나'싶었지만, 다시 한 번 더 뉴욕에의 피곤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맘에 맞는 여행 동료를 찾지 못하면 그냥 차라리 혼자가 낫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갑자기 여행 동료를 말하다보니 생각난 것인데, 난 늘 언제나 만약 결혼까지 생각하는 애인이 생긴다면 함께 한달이든 두달이든 배낭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이란 늘 언제나 즐겁고 설레일 수는 없다. 힘들고 지치고 때로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지기도 한다. 이 때 상대방의 밑바닥까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돌발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피곤하고 지치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상대방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아무튼.

 

 

‘피렌체를 처음 만난 날’ 편을 읽으면서 갑자기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떠올랐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들이 무더기로 등장한 시기...율곡 이이, 유성룡, 이순신, 곽재우 등등 언젠가 친구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임진왜란때 그래도 우리가 안 망한게 선조는 병신이었지만, 신하들이 올스타급이라서 그나마 이 정도였다고 우스개소리로 말했던게 생각났다. 천재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와 예술혼을 불살랐던 나라와 위기의 시대에 태어나 나라를 지킨다는 한 마음으로 혼을 불살랐던 천재들. 천재라고 표현해야할지 영웅이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평화로운 시대에 이들이 모두 태어났어도 빛을 발할 수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책을 다 읽고나서 잊고 있던 스케치북을 집어들었다. 발걸음이 닿았던 여행지부터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까지 눈에 보이는대로 잘하든 못하든 스케치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졌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질 좋은 만년필 한 자루와 함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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