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리즈
야마나 테츠시 지음, 최성현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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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도서전 불광출판사 부스에서 홀린듯이 구매한 책. 아주 얇은 굵기지만 '반야심경은 이런 책이다'라고 핵심만 쏙쏙 뽑아 잘 풀어낸 책이다. 반야심경은 한 마디로 끝나지 않지만, 끝없이 한 마디에 가까운 경전이다. 우리집은 불교와 거리가 먼 집이라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내가 부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 책이다. 이런류의 종교적 서적을 읽다보면 늘 드는 생각이 있다. 예수도 마호메트도 붓다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게 아쉬워 하나 둘 기록한 것들이 모인것이 경전이 아니던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던 진리가 오히려 우리를 옥죄는 현재, 진짜 그들은 그들의 가르침이 문자로 남길 바랬던 것일까? 제자들은 과연 올바르게 스승의 가르침을 해석했나?

아무튼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보자면 부처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집약할 수 있다. 부처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고집멸도, 사성제를 통해 괴로움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1.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차리는 단계

  2. 이렇게 괴로움이 일어난다라고 알아차리는 단계

  3.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고 나도 거기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단계

  4.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훈련법을 실천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단계

이렇게 적고나니 굉장히 간단해보인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며 늘 나는 화라는 감정, 괴로운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화라는 감정은 방향이 바뀐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화는 자신에게 불쾌한 것을 배제하고자 하는

충동에 지배당해 스스로를

멈출 수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p.64

'화'라는 감정조차 이 감정을 없애고자하는 나의 욕망임을 알아차리는 단계, 이 시작이 나포함 모두에게 어려운 것같다. 나 또한 화를 낸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화나게 했으니 자동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여기서 부처는 과연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의문을 던진다. 불쾌한 감정도, 기쁜감정도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이 행위를 멈출 수 없다면 조금도 자유로운 행위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즉 이 순간 이 감정을 느끼는 나는 무언가에 조작당하는 속박의 상태라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세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괴로움, 공(空), 반야(지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불교의 주제는 '괴로움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에피쿠로스 학파가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괴로움도 공도 알겠는데 반야는 무슨 지혜를 의미하는가? 반야의 지혜란 바로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예를들어 미친듯이 화를 낼 때 우리의 감정에 대한 자각이 없다. 순간적으로 화를 내고, 기뻐하는 것 이것은 흔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 우리는 이 감정과 하나가 되어 있기에 '나는 00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곧 그 대상과 하나가 돼 있을 때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감정과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놓고 보니 심리학에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과정과 같기도 하다.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중략)

그것은 모두 정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정보로서 현실성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것에 반응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습니다.

p.96

결국 내가 느끼는 감정(모멸감, 수치심, 분노, 기쁨 등)은 하나의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내가 이것에 반응하면 그것은 부정이든 어떠한 에너지로 실체를 갖는 것이고, 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그저 외부에서 들어오는 하나의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거나 어떤 사람때문에 미친듯이 화가나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데 연습이 될 것같다. 정보를 현실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반응인데, 즉 나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을 만드는 것은 바깥 세계 정보에 반응하는 내 자아, 정신과 몸의 복합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반야의 지혜이다. 이렇게 바라보면 나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도, 모함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입는 것은 '그가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에 반응하지 않으면, 그저 나를 스쳐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괴로움을 느낍니다.(중략)

뭔가에 강하게 욕망을 느낄 때도,

기뻐할 때도 우리는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붓다는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p.116

흔히 기쁘다는 것은 긍정의 에너지인데 이 또한 내가 통제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한다면 하나의 괴로움이 된다는 사실은 책을 읽다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부분이다.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 걸음 나와 떨어져 객관적으로 내 감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한 연습은 어떻게 해야할까? 여러 훈련법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8정도(正道)라고 부르는 4제8정도이다.

정견 바르게보기

정사 바른 생각

정어 바른말

정업 바른행동

정명 바른생활

정정진 바른노력

정념 바른 알아차림

정정 바른마음의 통일

간단해 보이지만 매우 어려운 실천법이다. 또는 이런 생각도 든다. '바르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사회에서 정한 통념에 따른것일까? 시대별로 달라지는 정의에는 어떻게 반응해야하는 것일까? 여러모로 삼국시대때 왕과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닦는데 불교를 교묘하게 이용하기 쉬웠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훈련은 '지금,여기'에 사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여기'에 없는 것에까지

조건 지어져 버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로 평생 남을

원망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면서

괴로움에 빠져삽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히

'지금,여기'를 알아차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p.127

'현재에 집중하자'는 엄마가 나에게 준 가르침이기도 하다. 늘 오지도 않은 미래와 지레짐작하여 스스로를 구렁텅이로 밀어넣던 나에게 당장 너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엄마는 말했다. '지금,여기'에 집중하는 삶. 엄마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누군가의 말에 화가 날 때는 화의 '인'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의 인이

누군가의 말이라는 '연'에 따라

마치 꽃이 피듯이 현실화하는 겁니다.

만약 내 안에 '인'이

조금도 없다면 같은 말을 들어도

화가 일어날 리 없습니다.

p.130

이 책이 나온지 30년도 더 됐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사랑받는 이유를 읽으면서 깨닫게 된다. 무심하게 하지만 친절하게 반야심경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연습해야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괜시리 위로받는 느낌도 든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空)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아닌가! 한 걸음 내 감정에서 떨어져서 일희일비하지 않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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