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힐링의 시간 - 탈무드가 일러주는
주원규 지음 / 마리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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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류의 책은 정말 오랜만에 읽는다. 초등학생 시절 탈무드같이 간단한 일화가 소개되고 이와 더불어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엮은 책들을 좋아했었다. 어린시절에는 ‘그냥 재밌다, 좋은 이야기다’라고 느꼈던 탈무드가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거친 지금에는 내가 잊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울림을 주는 부분이 있다.


이기심과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분명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 ‘나’에 대해 철저하게 성찰해야 할 때가 있다 바로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온전한 ‘나’가 아니라 자신의 학벌과 가문,재산이라고 생각될 때이다.(중략)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용기.학벌, 가문, 재산이라는 기준이 아닌, 온전히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그 용기가 곧 지혜다.


그동안 나는 ‘누군가가 인정하는 나’의 노예가 되어 살지 않았는지, 내가 우울하고 스트레스받고 힘들었던 감정이 모두 진짜 ‘나’를 잊고 살아서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탈무드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전반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길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발 물러서면 죽는줄아는 요즘같은 시대에 한발 물러서도 괜찮다고, 물러서고 난 뒤에 보이는 여백이 더 아름답고 알찬 인생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결국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다는 갈망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벗어남을 추구하다가는 넓은 의미에서 소유욕과 집착에 붙들리게 될 위험이 크다.(중략)이는 자유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왜 그럴까? 욕망을 자유로 착각하면 소유욕을 자신의 자유라고 믿고, 변하지 않는 선한 가치인 자유를 얻으려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애쓰면 애쓸수록 깊고 견고한 덫에 빠지는 줄도 모른채 말이다. 반대로 자유는 절제에 있는지도 모른다. 절제는 우리에게 더 나은 것, 더 원하는 것을 갈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지금에 만족하는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지금에 만족하는 것과 안주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상황을 늘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자유의 개념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에 만족하기 위한 절제가 진짜 자유를 얻기 위한 지름길임을 깨닫게된다.


자유와 절제, 결코 평행선을 그리며 함께 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늘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곳, 지금보다 더 높은곳. 모든 짐을 훌훌털어버릴 곳. 나는 더 갖기 위해 자유를 쫓는다 말하면서도 늘 괴로웠던 것일수도 있다.


우리의 눈,귀,코는 늘 받아들이며 세상과 소통한다.우리는 이렇게 받아들인 소통의 즐거움을 혀를 통해 타인과 나눈다.하지만 혀를 통해 타인과 즐거움을 나눌 때는 매우 조심하고 절제해야 한다.내가 받아들인 것의 딱 절반, 아니 그 절반의 절반만 표현하고 사용하는게 좋다.왜 그럴까? 나의 혀, 즉 말을 할 때는 완벽하게 차별과 편견 없이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또한 완벽하게 타인을 배려해 타인의 입장에서 말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새치 혀가 사람을 죽인다는 말처럼 말조심은 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내가 받아들인 것의 절반만 표현하고 사용하는 중용의 자세.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중용’이란 것같다. 하지만 너무 말조심만 강조하면 오히려 깊은 교류를 방해하기도 한다. 탈무드는 말조심뿐만 아니라 어떻게 말을 써야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더 친밀해지기 위해 말을 배우고 익히자.피하지 말고 긍정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자. 실수를 줄이는 것만 의식하지 말고, 실수를 정면으로 돌파하고승화하기 위한 말을 배우자


사회생활을 하면서 늘 말조심을 하기위해 노심초사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러기에 차라리 입을 다물어버리자라고 생각하는 때가 더 많았다. 늘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느낀다. 긍정의 말, 실수를 정면돌파하는 힘을 길러낼 것 이것이 오늘 탈무드가 나에게 주는 교훈같다.  우리는 늘 어딘가에 쓰임을 받기위해 고군분투한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모임에서, 가정에서 어디든 나의 쓰임이 나를 증명하는 것같다. 내 쓰임이 다하여 더 이상 내 자신이 필요하다 느끼지 못할때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더 이상 쓰임되지 못한 약함은 세상에 용납되지 않는다. 이건 쓰임새가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이라고 탈무드는 말한다. 이 부분에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듯했다. 쓰임새가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살아왔던 세월이다.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보고 위안을 받은 적이 있다. 해파리는 힘이 없어서 수면위를 둥둥 떠다닌다, 약하다고 죽는 게 아니라 그냥 물결에 몸을 맡기고 그렇게 살면 되는 거라는 말. 이 별것 아닌 말이 그렇게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세상의 쓰임새로 나 자신이 평가된다면 그건 진정한 사람다움이 아니다라는 탈무드의 가르침도 이와 같다. 쓰임새가 없다고, 약하다고 모두 없어져야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본 전제를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하는가, 어떻게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가볍게 시작했다가 다시 내가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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