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망초 을유세계문학전집 112
요시야 노부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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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의아니게 근대 여성작가의 글을 연달아서 읽게되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 근대 여성 작가들의 수필집을 읽었는데, 이번에는 일본 근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만났다. 읽으면서 느꼈지만,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문장마다 심어져있어 그것을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물망초라는 책을 처음 펴들었을때는 '아 내 취향이 아니다, 괜히 읽기 시작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기우는 잠시, 곧 나는 소설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시 판에 박힌 여성캐릭터가 나오는 타 소설과는 달리 다양한 특성을 지닌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 시대에는 대부분 주인공이 남성이고, 여성은 보조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 소설이 대부분인데, 물망초에서는 자아 형성기 소녀들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 지금은 '그냥 평범한 소설이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이 쓰인 당시를 생각하면 꽤나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고등여학교라는 공간에서 3명의 여학생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며 전개된다. 사랑과 우정, 질투, 번민 등의 감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소설이었지만, 작가가 세밀하게 풀어내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은 마키코를 중심으로 시작한다. 십대 소녀들이 모인 학교에서는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온건파와 이론과 권위, 도덕, 이성을 중시하는 강경파 그리고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파의 자유주의자들이 있다. 마키코는 자유주의자들 중에서도 더 강경한 중립파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절벽위에 피어있는 고고한 한 송이 꽃처럼 말이다. 고고한 마키코에게 장미같이 화려한 팜므파탈, 온건파의 여왕 요코가 나타난다. 요코는 부잣집 딸로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절정을 이루는 인물이다. 공부보다는 사랑과 낭만을, 책임과 의무보다는 멋과 파티,자유를 쫓는 꿈과 환상의 인물화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요코는 마키코를 보는 순간 그녀를 정복하겠다 다짐한다. 완고한 마키코도 요코의 매력앞에서 속수무책 무너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 정복욕으로 시작했던 요코는 체면도 던져버릴만큼 마키코에게 빠지게된다. 사랑과 우정사이의 묘한 감정이 둘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미안해, 아까부터 내 맘대로 끌고다녀서 약간 땀이 났지?"


그때, 마키코는 상냥하게 땀을 닦아 주는 요코의 손수건에서 풍기는 짙은 향수 냄새를 느꼈다.


"물망초 향수야. 마음에 드니? 이 향기......"


마키코는 말이 없었다. 이럴 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평소에 연습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네가 이 냄새를 좋아한다면, 나는 언제든 이 향수만 쓸 거야"


마키코는 긴장해서 몸이 굳어 버렸다.



물망초의 꽃말 ' 나를 잊지 말아요 '라는 서정적인 의미는 이 소설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요코가 마키코에게 전하는 마음인 양 말이다. 단순 소녀들의 사랑과 우정만 표현된다면 이 소설은 통속적인 그렇고 그런 소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각자의 사정에서 치열하게 고뇌하는 사춘기 소녀들의 모습도 나타난다. 마키코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속에서 미래에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과 현실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한다. 무엇이 되어야할 지, 아버지가 원하는대로 현모양처가 되는 법만 배워야하는 것인지, 뿌연 안개같은 자신의 답없는 미래가 괴로운 마키코는 어느날 서점에서 책 한권을 발견한다.


"엄마, 나 오늘 멋진 책을 찾았어. 그런데 영어로 쓰여 있더라고. 아직 읽을 수가 없어서 정말 아쉬웠어. 하지만 제목은 읽을 줄 알아. What should we do!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뜻이지? 무슨 내용이 쓰여 있을까. 빨리 읽을 수있으면 좋겠어"


"그건 아마 톨스토이가 인간의 의무에 때해 쓴 논문이 아닐까 싶네"


어머니는 지식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맞아, 엄마 대단해. 거기 대체 뭐라고 쓰여 있어?"


마키코가 눈을 반짝이자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모르겠어. 그저 그런 책이 있다는 걸 언젠가 어떤 잡지에서 소개했던 것 같아. 마키코가 어서 열심히 공부해서 읽은 뒤에 엄마한테 알려주렴"


마키코의 지식욕은 눈동자와 함께 반짝이며 타올랐다.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키코, 그런 책은 읽지 않아도 다 안다.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람의 의무는 말이지. 남자는 똑똑하게 머리를 굴려 학문을 하고 과학으로 연구를 거듭해서 업적을 쌓아 인류에 공헌하고, 여자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천직이 의무다. 그것 말고는 없어. 알았느냐"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미래를 꿈꾸는 마키코는 가부장적인 세상, 아버지가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을 인형처럼 조종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다른 등장인물 가즈에는 가부장제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며 살아가는 순종적인 인물이다. 가즈에는 현실적일 수 밖에 없는 인물로 살아간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유언장에 너는 장녀이므로 책임을 다하고,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라고 가즈에에게 전한다. 어머니는 매년 아버지의 기일마다 이 유언장을 읽으며 가즈에를 옭아 매고, 동생들을 위해 희생해야함을 반복 교육 시킨다. 가즈에는 부모님을 따르고 순종한다. 


자신의 유일한 버팀목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마키코는 가즈에와 같은 세계에서 살기를 강요당하며, 세뇌받는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반항심과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마음이 공존한다. 가즈에가 마키코의 현실과 같다면 요코는 마키코의 꿈과 환상이다. 요코는 상심한 마키코를 데리고 금기를 부수며, 일탈을 하여 마키코에게 해방감을 선물한다. 꿈만 쫓을 수 없듯 현실도 중요함을 인지한 마키코는 결국 요코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가즈에에게 간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병에 걸린 요코를 찾아가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운다. 마키코는 꿈과 현실 그 어느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자의식을 구축해가는 사춘기 소녀들의 사랑과 우정, 성장, 고뇌와 갈등을 통해 현실과 꿈 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삶, 이것이 그녀들이 나아가야할 길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싶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마키코와 아버지의 화해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되어 당황스러운 점 정도?


요시야 노부코는 이번에 처음 알게된 인물인데, 이미 그녀 자체가 그 당시 하나의 '브랜드'였다는 것을 해설을 보고 알게되었다. 그당시 흔치 않았던 숏컷에 당당한 표정, 결혼하지 않고 좋아하는 여성과 사는 동성애적 사생활 등 모든것이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고 하니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싶다. 남편이 필요없는 사람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성공한 작가는 그 존재 자체로 이미 가부장제를 깨부수는 창같은 존재였다. 이런 노부코를 기득권자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 당연하다. What should we do, 노부코는 자신의 존재와 작품으로 이 메세지를 모든 여성들에게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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