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근대 여성 문학 모던걸
강경애 외 지음 / 텍스트칼로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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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책 ‘모던걸 시리즈-수필집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현대어로 쉽게 풀어쓴 근대 여성 문학 작품집이다. 현대어로 번역이 잘 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 아주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근대 여성 작가라하면 노천명, 나혜석밖에 몰랐는지라 나의 무지에 부끄러워하며 책을 펴들었다. 

근대 문학이라고 하면 흔히 일제 강점기의 암흑, 우울함, 가난, 비참함만 떠올리게 되는데 그 시대의 또 다른 면을 근대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신혼의 기억을 떠올리는 슈크림, 작가의 최애 종달새와 얽힌 이야기, 묘한 분위기의 눈오던 그날 밤 등 첫번째 수필의 주인공인 백신애의 수필은 가볍게, 훌훌,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노천명의 수필은 다른 수필에 비해 더 친숙함을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글을 읽는 내내 만약 그녀가 현대의 인물이라면 소주 한잔 기울이며 돈벌이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직장 선배같다는 이유모를 생각이 들었다. 친일행적만 아니었어도 그녀에 대한 호감은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글만보면 내 주위의 평범한 직장 언니, 친구같은 느낌인데 도대체 일본의 무엇이 그녀를 매료시켰던 것일까?
‘직장의 변’ 이라는 수필은 시대적 배경이 근대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현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해도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이다. 

// 내 머릿속에 이런 푸른 사슴을 자유롭게 놓아기르기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생활 보장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내게는 ‘짬’이 필요한 것이다. 난들 날마다 출근하는 것이 즐거울 리 있으랴. 더구나 한여름에 남들이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는 것을 볼 때면 부러워 죽겠고, 요새 같이 단풍이 한창인 때에는 경주쯤에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을 어디에다 비길 수 있으랴. 하지만 내 머릿속이 조금이라도 당황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또 내 마음이 과히 큰 불안에 억눌리지 않고 적으나마 일정한 수입을 갖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우리는 절대로 현실적인 생활을 무시하고 함부로 덤벼선 안 된다. 생활을 무시하는 태도가 오히려 무시를 가져오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내 최저 생활의 확보를 위해서 언제나 즐겁게 ‘짬’을 가질 각오를 하고 있다. //

내가 언젠가 지리멸렬한, 끝없는, 돈만 벌다가 끝나버릴 인생을 왜 견디는가에 대해 일기장에 하소연하듯 썼던 글과 엇비슷해서 놀랐다. 이런 면 때문에 그녀가 현대인이라면 나는 그녀와 꽤 잘 맞는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나보다. 

‘지난 날의 여기자 생활’이라는 수필을 읽기 전 왜 굳이 제목에 ‘여기자’라는 지칭을 썼는지 불만이었다. 하지만 수필을 다 읽고나서 왜 원 제목인 ‘피해야 했던 남성’보다 지난 날의 여기자 생활이라는 제목을 썼는지 이해되었다. 이 제목이 훨씬 그녀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더 잘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여성이 직장에서, 사회에서 요구받는 역할에 대한 고충은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어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나혜석의 수필 또한 재미있게 읽었다. 그녀 또한 현대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노천명은 직장 내 친한 선배의 느낌이라면, 나혜석은 대학교에서 만난 마음맞는 친한 과동기같은 느낌이다. ‘연필로 쓴 편지’라는 수필은 처음에는 로맨스인줄 알았으나 그 끝은 스릴러로 끝나서 간담이 서늘했다. 요즘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감성적인 구애방식에 처음에는 가슴이 몽글몽글해졌으나, 점차 일방적인 강요와 먹잇감을 사냥하는 듯한 구애방식에 학을 떼려는 찰나 마지막엔 결국 요즘 시대에도 흔히 보이는 ‘왜 안만나줘, 너죽고 나죽자’ 방식이 나와서 오싹해졌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를바 없는 양상에 새삼스레 다시 서글퍼진다.

강경애의 수필은 감상적이고 문학적인 면모가 다른 작가들의 수필에 비해 두드러진다. ‘몽금포 구경’은 특히나 서정적인 표현이 내 마음에 콕 들어왔다. 

// 그 사이를 뱅글뱅글 도는 도라지꽃은 해쭉 웃고는 꼭꼭 숨어버린다.   에크! 또 나온다. 또 숨는다. 빛이 어쩜 저리도 푸를까. 깊은 산골짜기에 별만 보고 자라서인지 꽃송이가 별인 듯 속기 쉽고, 푸른 하늘이 그리워 애태웠는지 그 머리 다소곳이 숙이고 물빛으로 빛나네.//


모든 글은 필연 미래를 향해 쓰이고, 모든 독자는 과거의 작가와 만나기 때문에 우리의 독서는 모던걸들에게 보내는 응답이라는 소개글이 딱 들어맞는 책이다. 실제로 만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글을 통해 나는 잠시나마 그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근대 여성 문학(여성이라고 굳이 따로 지칭하여 분류하고 싶지 않지만 통상적으로 이렇게 나누기에 썼음)에 대해 무지했는데, 조금 더 찾아보고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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