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봉과 분홍 제복 - 세일러 문부터 헬렌 켈러까지, 여주인공의 왜곡된 성역할
사이토 미나코 지음, 권서경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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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전주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어렸을 때 내가 아이돌처럼 좋아했던 세일러문의 주제곡이다.

화려한 변신장면, 악당들을 무찌르는 세일러 전사들의 모습은 나같은 어린 여자아이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세일러문은 가히 신드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일러문 신드롬은 신문 기사에도 나올 정도였는데, 당시 유치원 여자 아이들이 세일러문 요정들처럼 날씬해지고 싶어서 밥을 굶고 스트레스를 받아하는 것이 문제라는 내용이었다.


p.92

어릴 때부터 익히 봐 온 이 이름들을 살펴볼 때 '누가 선택받았는지'가 아니라 '누가 선택받지 못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인전이 소년만화의 구성과 닮아있다는 것, 누군가의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고 어린시절 읽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이처럼 만화, 그리고 만화만큼이나 어린이들 누구라면 필수적으로 본다는 위인전은 아주 어릴 적 우리의 사고와 세계를 지배한다.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메세지를 은연중 노출한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만화 속에 뿌리깊은 여성 차별적 요소들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나서야 깨닫게 된 부분이다.



p.22-23 소년/소녀 왕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제목

소년 왕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G,D,B음에 중점을 두어 강인한 느낌을 준다. 반면 소녀 왕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M,R,S음에 중점을 두어 귀여운 어감을 살린다. "자아, 강하게 들리는 이 소리가 남자 어린이 거예요. 앗, 안돼요. 우리 여자 어린이 건 그게 아니라 여기 있는 귀여운 소리란다" 이렇게 일본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각자 다른 길로 유도된다.


p. 25 소년 왕국의 전투는 이질적 존재를 배척하는 전쟁이다.

​그런데 적이란 누구를 말하는걸까. 흔히 침략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겉모습이 보통 사람과 다르거나 사회 기준에 맞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괴수, 괴물, 로봇 등 동식물이나 기계가 진화하다 만 것 같은 모습을 띤다. 소년 왕국에서 전투란 곧 이질적 존재를 배철하는 전쟁을 말하며, 소년 왕국에서 말하는 정의란 '지구적 민족주의' 또는 '인류에고이즘'이라 할 수 있다....지구 대 외계에서 온 침략자 라는 대립구도는 일본 대 이국에서 온 침략자 또는 일본 민족 대 비(非)일본 민족이라는 대립구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할 수 있다.


p.32 소년 왕국에는 성희롱이 난무한다. 

소년 왕국에서 흔히 발생하는 성희롱은 '욕실 엿보기'라는 저질스러운 행위다. 언제부터인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앞다퉈 샤워신을 집어 넣기 시작했다는 것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팬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남학생들이 "나도 좀 보자"라며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여학생에게 들켜서 반나체 차림의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여주인공이 밖으로 나와  "뭐하는 짓들이야!"라며 호통친다. 이처럼 익숙한 고전적인 장면은 훈훈한(그렇게 여겨지는) '개그'로 통한다.


아주 어렸을 때 봤던 만화는 지금까지고 내 정서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만화 제목부터 남자용, 여자용으로 나누기, 성희롱을 아무렇지 않는 개그와 농담으로 취급하는 메세지, 남자일 여자일을 구분짓는 만화, 어른의 시각으로 악을 정의하는 만화...과연 뿌리깊은 차별의 사회화는 언제 없어질 수 있을까?


p.72 악의 여왕은 요술을 부리는 마녀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유형의 성인여자와 악의 여왕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정말로 어린아이일까? 어쩌면 성인남자(정확히 말하자면 미성숙한 여성관을 지닌 성인남자)가 이들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흔히 능력치가 놓고 돈도 많으며, 남자들의 시선에서 말하는 소위 '기 쌘 여자' 이들이 바로 만화 속에 나오는 악녀의 모티브가 아닐까?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능력치가 쩌는 악당이 어렸을 적 내 눈에는 진짜 악당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p.78 TV앞 꼬마 도련님들에게

네가 소년왕국(전쟁터)에서 활약하려면 사생활을 포기하고 조직에 들어가 다같이 힘을 합쳐 이질적 존재를 배척해야해. 그게 바로 정의란다. 여차할 땐 무장(변신)을 하고 악당과 끝까지 맞서 싸워야해. 그 중에는 무서운 여자 어른들도 있단다. 그 여자들은 요술을 부리니까 아주 조심해야해. 하지만 걱정 말렴, 어떤 문제라도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 테고, 조직에는 섹시한 여자가 있으니까 한숨 돌리면서 성희롱을 할 수도 있단다.


전근대적인 남성우월적 시각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만화,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말해주는 만화,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는 인식은 아주 어릴 적 부터 영향을 주는 이러한 매체 때문이리라...



p.101 여성위인은 남초 사회에서 성공한 붉은 전사다.

여성 위인의 첫번째 유형은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남성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업적을 이룬 사람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여자임에도 남자들의 활동 영역에서 업적을 남긴, 남자 못지않은 능력을 지닌 여자다. 과학자로서 노벨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퀴리 부인이 이에 해당한다. 퀴리부인에게는 '여성 최초 노벨상 수상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여성 최초 000'라는 표현은 오늘 날에도 흔히 접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여자답지 않은 점이나 남자 못지 않은 점을 향한 칭송과 감탄이 담겨있다.


왜 성공의 기준은 당연하게 남성이며, 우리는 왜 늘 남자보다 월등히 잘해야만 대단하다고 칭송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p.104 위인전 왕국에는 남초사회를 위협하는 악의 여왕이 없다.

위인전 왕국에서는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여성의 지위 향상에 공헌하는 사람은 위험한 사상을 지닌 악의 여왕으로 간주된다.

또한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하거나 결혼제도에 따르지 않는 여자도 악의 여왕으로 여겨진다.

...열렬한 페미니스트인데다가 남편을 갈아치우기까지 한 이토 노에는 어떠하랴. 이를 두고 "여성 해방 운동에 힘쓰고 차별과 맞서 싸운 여자야말로 아이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진정한 구세주 아니겠는가"라고 반론해봤자 소용없다. 아이들의 본보기가 되려면 이처럼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사람보다 히미코나 무라사키 시키부가 그나마 적절하다. 이것이 위인전 왕국 논리다.


위인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지워지고 무시당했을까? 내 생각에는 헬렌켈러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읽고 느낀 헬렌켈러 위인전은 삼중고를 극복한 그녀가 대단하긴 했지만, 남의 불행을 바라보며 위안삼는 불행전시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하지만 그녀가 서프러제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얼마나될까? 그녀가 여성 평등을 주장했던 것은, 평화를 주장했던 사회주의자라는 것은 위인전 왕국에 맞지 않는 행실이었다. 그녀는 신체적 한계뿐만 아니라 눈멀고 귀머거리처럼 살아야만 했던 여성들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런 업적은 지워지고 2차 세계대전 후 당시 사회가 원하는 성녀의 상, 남성 중심 사회에 알맞게 재구성되었다.


p.105 여자가 위인이 되기 위한 조건

1) 백인여성

2)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모범생

3) 성적인 면에서의 정숙함

4) 남성 권력자의 인정

5) 뚜렷한 특징


나이팅게일은 성(姓)만 표기하고 퀴리부인은 부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헬렌켈러는 성과 이름이 모두 표기된다. 이 미세한 차이가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지 않은가? 외국 출신 위인 이름은 보통 에디슨이나 슈바이처같이 성으로만 표기된다. 따라서 나이팅게일은 일반적인 표기법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퀴리부인의 부인은 무엇인가. 남편 피에르 퀴리와 구분하기 위해서라면 마리퀴리라 하면 되지 않는가

헬렌켈러에게 붙어있는 헬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켈러라 하면 안 되는 걸까? 뭘 그리 세세하게 따지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여성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곧 세상이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부르는 말, 이름'은 굉장히 중요하다. 내가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하고 있는지, 그것이 반영되어 내뱉어지는 이름. 그 자체에 그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는 에너지가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그 사람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이름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온갖 좋은 것을 따져 가장 좋은 이름을 주고싶어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언어라는 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용자의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느냐에 따라 그 상대의 존재가치가 어느정도 내 안에서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닐까?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말이다.


늘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은 왜  성녀 VS 악녀의 이분법으로만 구분되어야 하는걸까 하다못해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와 위인전에 그 영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만화가, 위인전이 그동안 얼마나 남성중심 사회에 맞도록 구성되어 퍼졌는지...차별의 역사가 그만큼 뿌리가 깊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애니메이션과 위인전이 바라보는 여자 주인공에 대한 시선, 차별적 요소들을 유쾌한 말투로 풀어냈다.

더 이상 어린이들이 직장의 꽃이 되는 요정전사가 아닌 사람 그 자체로 인정받는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어그러지고, 강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차별하고 배척하지 않는 캐릭터가 나오는 세상을 꿈꿀 수 있었음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번역하신 분이 문장이나 내용이 어색하지 않게 잘 번역하여 더욱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았다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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