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모인 열 명 남짓의 여성들은 제각기 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히틀러의 광신도, 미혼 또는 과부, 전장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 등...
전장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로자는 어떤 이유에서든 죽을 수 없었다.
부디 이번에 내 차례가 비켜가길 바라며, 독이 없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크리스마스에 휴가를 나온다는 남편은 어느 날 실종된다.
로자는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길 소망하며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죽고자 하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던가 이 마저도 로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상황은 날이 갈 수록 나빠지고, 로자는 두려워하던 나치 친위대 장교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로자가 심적으로 의지했던 동료는 유대인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게다가 1933년에는 저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어요.
히틀러를 뽑은 건 제가 아니라구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단 용인하면 그 정권에 대한 책임은 네게도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속하는 국가 체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은둔자조차 말이다. 알아들었니?
네게는 정치적 죄악에 대해 면제부가 없다, 로자.
12년 동안이나 독재 체제하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은 무엇 떄문에 독재에 순응하는가?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변명이다.
나는 고작해야 내가 씹어 삼키는 음식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음식을 먹는 무해한 행위 말이다.
로자는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였다.
히틀러의 생존을 위해 기여하면서도
늘 죽음에 노출된 피해자.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나왔던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누군가에게 차별을 하는 존재, 강자의 입장일 수있다는 것...
훌륭한 독일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로자는 늘 이중적인 지위에 죄책감을 느꼈다.
히틀러를 위해 일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모든 독일인의 의무였다.
하지만 요제프는 내가 총이나 폭탄이 아니라
독이 든 음식을 먹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조용한 죽음이었다.
영웅이 아니라 개 같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여자에게 영웅적인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의 지위는 유대인이든 독일인이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도 물건 또는 상으로 주어지는 상품,
모르모트 동물과 같은 취급이었구나 새삼 생각이 들었다.
박멸해야 할 바퀴벌레냐 아니면
늙고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몸이 되면 가차없이 버릴
사냥개의 신분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어쨌든 총통은 그뿐 아니라 가축을 도살하는 것이
너무 잔인한 행위라 고기를 먹을 수 없대"
"한 번은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손님들에게
자기가 도축장에 갔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어.
뜨끈한 피 웅덩이 속에서 철벅이던 장화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면서 말이야.
불상한 디트리히는 음식 접시를 밀어버리더군.
그 친구 정말이지 감수성이 예민하다니까?"
도축당하는 동물들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과
순수 아리아 혈통이 아닌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기의 국민을 음식감별사로 쓰는 데
일말의 거리낌 없는 행동...
인간의 신념이란 정말 무서운 것같다.
어떤 방향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라는 것이 선택된다.
조금 더 서치해보니 주인공 로자인 실존인물 마고는
시련을 더 겪게 된다.
종전 후 음식 감별사 중 유일하게 생존했지만,
소련군에게 끌려가서 14일동안 강간을 당하고
영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레고리는 극적으로 살아남아 로자와 다시 재회했지만
3년간의 결혼생활 후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별하게 된다.
가해자들의 입장을 정당화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공평하거나 자비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삶이냐 죽음이냐, 선이냐 악이냐...
선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악이 되고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가게 되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나의 행동이 옳지 않는 체제를 유지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설사 내가 원치 않았더라도 말이다.
악의 시대에 난 생존하기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지금 선이라고 생각하는 행위가 과연 선인가?
생존과 선과 악에 대한 의미에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된다.
+
영화나 드라마 화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는, 간만에 재미있는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