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
김시민 지음, 이상열 그림 / 리잼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빠 얼굴이 왜 빨개졌을까. 책 제목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목차를 훑어보아도 ‘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라는 제목이 없다. 잠시 궁금증을 접고 책장을 넘기다 나는 아빠 얼굴이 왜 빨개졌는가를 알게 되었다. ‘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는 ‘참 이상해!’라는 시의 일부이다.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생긴 아이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도 어렸을 때 여자 친구 있었어요?” “당연히 있었지!” 아빠가 아닌 엄마가 냉큼 대답을 한다. 어린 아들과 아내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아빠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아이가 포착한다. “어렵게 말 꺼낸 나보다 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라고 한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진다. 아빠와 엄마, 아빠와 아들의 대립구도가 재미있다. 아이는 아빠에게서, 아빠는 아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상황이 정겹다.




   

   어른이 쓴 동시보다는 아이가 직접 쓴 글을 선호하는 편이다. 어른이 쓴 글에는 아무래도 어른의 기교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감동이 덜하다. 나는 이 동시집이 어른이 엮은 건 줄 몰랐다. 대부분의 시 안에 아이의 마음과 목소리, 표정이 잘 살아있다. 어른이 쓴 동시도 이처럼 아이의 마음을 잘 반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 모든 어른들도 아이였던 적이 있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떠올렸다. 김시민 씨의 동시들은 그 순수의 시절을 되살린다. 아이에게는 공감과 위안을, 그리고 어른에게는 그리움의 정서를 돌려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생각이다. 대체 그 경계가 무엇일까. 거뭇거뭇 수염이 나고 회사엘 다닌다고 해서 어른일까. ‘아빠는 어린애’라는 시에서 아이는 아빠 안에 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본다. 아이의 눈에 비친 아빠는 어린애 같다. ‘나’가 잠자리에 들면 발가락 간질이고 비석치기해서 이기면 두 팔 번쩍 들며 ‘나’를 놀린다. 새 옷을 입으면 좋아 웃고, 게임할 때는 ‘나’보다 더 흥분해서 큰소리를 낸다. 여기까지는 아이가 아빠의 ‘아이다움’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서 아빠는 ‘나쁜 어린애’라 한다. 술 마시고 담배 피는 나쁜 어린애.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났다. 두 팔 번쩍 들고 호들갑 떠는 아빠의 모습을 쳐다보는 작은 아이의 그림 때문만은 아니다. 술 마시지 마라, 담배 끊어라. 어머니와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 말을 듣지 않아 속을 썩이는 ‘나쁜 어린애’가 아닌가. 하루 금연하고 죽을 것처럼 비실대다 결국 아침 출근길에 담배 한 개비를 태우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엄마, 나도 착해지고 싶어요.


 





따뜻한 밥





동생이 태어난 후

엄마도 아빠도

나에게는 

눈길 한번 안 주고




동생에겐

까꿍 까꿍

쪽쪽




서러워

일기장에 

썼던 날




참 따뜻한

저녁밥이 

날 기다리고 있었어


 

   안하던 공부를 해보겠다고, 비싼 문제지를 신청해놓고는 얼마간은 열심히 풀어댔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게을러지고 미루고 미루면서 새 문제지들이 산을 이루었다. 나의 게으름은 아버지에게 발각되었고, 꾸짖는 아버지에게 잘못했다,하면 되었을 걸, 겁도 나고 화도 나서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집 담벼락 사이에 몸을 숨기고 앉아 분노를 씹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우리집은 불이 환하게 켜졌다. 그릇과 그릇,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은 나 없이 밥도 잘 먹는구나. 배고프고 서러웠던 그 어린 날의 밤을 기억한다. 그날 나는 개집에 들어가 잠을 잤다. 아침인가 점심인가, 저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개집을 나와 뜨거운 밥을 입안에 밀어넣는데 울음이 났다. ‘따뜻한 밥’은 그때 그 저녁, 아침 혹은 점심이었을지도 모를, 그 시간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당시에는 무척 서럽고 외롭고 화가 났을 텐데, 지금 나는 그 시간이 그립다.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는 아이가 살고 있다. 어른인 척하며 살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이를 막을 수는 없다. 아이들은 날로 키가 자라고,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어른은 덜 자란 아이를 품고 산다. ‘아빠 얼굴이 빨갛다’에는 아이 안의 어른, 어른 안의 아이의 모습이 교차하며 하나의 정겨운 ‘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어른인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른인 척하며 사는 일에서 잠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환하게 불켜진 방에서 '참 따뜻한 저녁밥'을 먹고 난 것처럼 편안하다. 아이의 세상에서 위로받은 기분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떨까. 어른이 그려놓은 아이의 세상에서 그들은 무엇을 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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