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나희덕 엮음 / 삼인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詩)는 발자국과도 같다. 시간을 지긋 누르고 지나간 발자국이 시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시간은 러시아 인형(51쪽)처럼 열어보면 또 속이 있고, 겉이 속이기도 한, 켜켜이 덮여 무엇이 무엇인지를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한데 층층이 시 한 편이 이정표 노릇을 한다.  시인 나희덕 님이 선정한 여러 편의 시, 그리고 짧게 감상을 남긴 줄글에서 나는 '나'를 본다. 아니 내가 이미 경험은 했으나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시간들을 확인한다.

 

이른 새벽마다

나의 뜨락엔

한 마리씩의 새들이

어김없이 날아와 앉는다

그 가운데서 내가 알 수 있는

새의 이름은

참새와 까치밖에 없지만

하얀 꽁지를 단 아주 아름다운

새도 있다.

(...)

(정진규/ 몸詩 52 - 새가 되는 길/ 72쪽)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오감으로 느끼는 사물, 경험들에는 모두 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다만 기억되지 못할뿐, 여전히 그것들은 그것들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래서 '나' 자신에게 쏟는 관심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얼마나 집중하고, 얼마나 깊이 들어가 내 몸이 아닌 다른 사물들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통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 혼자만의 전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관계 속에서, 건강한 관계에서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성미정/ 사랑은 야채 같은 것/ 42쪽) 

 

     성미정 님의 시, 사랑은 야채 같은 것은 여러 가지로 읽힐 '우려'가 있다.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그러면 화자인 여자, 아내일 것이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가.  나(아내)는 평생 죽어지내야 하는가.  억울함이 비대해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오독은 사랑은 억울함을 품고 있는 모순된 감정이라는 결말을 도출해 낼 수가 있다.  물론 오독이다.  지독한 오독이다.  이 오독에는 여자는 죽어라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성미정 님이 쓴 시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독자가 그렇게 읽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삶이 책 읽은 그대로 수월하던가? 그럴 수 있다면야 좋으련만 그렇지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해서 나는 말한다.  사랑은 억울함을 이기고 상대를 끌어안는 마음이라는 것이라.  물론 현실 속의 나는 지독히 추악하고 더럽다.  바라는 마음까지 접을 때 비로소 세상은 평온해진다.  그리고 나는 굶어죽는다. 그것이 곧 해탈이고, 진정한, 참자아로 가는 길일 것이다.

 

그곳을 찾으면 어머니가 친정에 간 것 같다

갯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 나서 겨울 햇살에 검은 비늘을 털어내는 갈대가 아름다운 곳

갈대들이 조금에 뜬 달 아래서 외가에 간 어머니가 끝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던 곳

둑을 넘어 농로에 흘러든 물에 고구마를 씻는 아낙의 손, 만지고 싶다.

 

(장대송/ 고향/ 156쪽)

 

     '그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누구나가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가 찾아나서는 것 역시 아니다.   위대하고 싶지 않다.  평온한 수면에 떨어지는 돌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만지고 싶다.'  그 욕망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간 저층에 놓여 있는 그 손을 만지고 싶다.

 

     나희덕 님이 선택한 시들에서는 여러 가지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아니 모른다고 하고 싶다. 상쾌한 시선집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