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낚시 친구
메리 퀴글리 지음, 스테판 조리쉬 그림, 최다혜 옮김 / JCR KIDS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할아버지의 낚시친구>는 동화책이다.  동화책은 여느 책보다 소설보다 재미있고, 시보다도 울림이 크다.  그래서 나는 동화책을 좋아하고 동화책으로  삶을 배우고 사람을 이해한다는 사람들의 고백에 동감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딘 내가 유일하게 동감하는 것이 동화책에 대한 소감이다.  왜 그런가 생각해본다.  다 큰 내가 혹자는 영유아에게 읽혀야 할 책으로 단정짓는 동화책을 왜 살가워하는지를 생각한다.

 

      어느 사람은 소설을 읽어 주인공, 혹은 주변인물과의 동일시를 경험하고 시를 읽어 세상을 끌어안고 함께 앓는 화자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한다.  한데 나는 다른가 보다.  내게 동화책만한 것이 없다.  우선은 활자와 친숙하지 못한 표면적 이유가 있고 심층으로 파고든다면 또 거대한 무의식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동화는 무의식을 그대로 수용하는 듯, 나를 받아준다.  나는 활개를 치고 활보를 한다.  내가 동화를 거부감 없이 대할 수 있다는 것은 단 하나, 우선은 단 하나, 내가 규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편안함이다.  지극히 편안하다.  이런 편안함으로  <할아버지의 낚시 친구>를 읽었다.  동화책은 읽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난 것이다. 

 

     왜가리의 낚시질을 언뜻 짐작도 해보고, 할아버지의 낚시친구는 표지그림에 얍실하게 웃고 있는 손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얼핏 해보고, 낚싯대 미늘에는 어쩌면 지렁이 아닌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거룻배는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리고 또.... 

 

 




오늘 밤은 잠이 안 와요

호숫가에 있는 할아버지의 오두막집에 놀러 왔거든요.

(첫장)


 

     침대에 이불 덮고 누운 아이의 얼굴, 표정이 살아 있다. 아이의 발치에는 고양이 웅크리고 잠들 채비를 하고 있는 듯, 혹은 잠이 들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양이란 녀석이 본디 깊은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야행성 기질이 있다고도 하니 어쩌면  우리 눈을 속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음흉하지는 않지만  사람눈에는 음흉해 보이는 녀석이 고양이다. 이 고양이는 책 말미에서는 본색을 드러낸다. 사라(할아버지의 손녀)가 처음으로 잡은 물고기를 탐내는, 박제된 물고기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흔들고 있다. 

 




"할아버지, 언제 또 낚시 친구를 만나러 가실거예요?"

할아버지는 쓰고 있던 커다란 낚시 모자를 내게 씌워 주셨어요.

그리고 윙크를 하면서 말씀하셨어요.

"우리 일등 낚시꾼은 언제 또 할아버지를 보러 올 거니?"

(마지막 쪽)


     할아버지의 낚시 친구가 누구인지 지적하는 것은 읽은이의 몫이다.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친구'라는 개념을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 동화책이 말하는 바가 어쩌면 우리 좁은 시야를 넓히는 데에 있지 않을까 추측을 할 따름이다.  사라의 발치에 잠들었던 고양이, 호숫가 낚시터에서 한 발을 들고 서 있던 왜가리, 그리고 삽화가 보여주는 다양한 장면들.  언어만이 표현을 독점할 수 없고, 언어는 굳이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많은 단어들에 치여 살아 그런지 <할아버지의 낚시 친구>는 글보다 그림이, 글과 어우러진 그림이 더 많은 이야기를 걸어온다는 것을 느낀다. 

 

     고마운 책이다.  읽는 동안 내가 편해졌고, 연령의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 읽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정말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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