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ㅣ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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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뱀과 물>


드디어 배수아를 읽었다. 도서관에 예약 걸어 놓은 게 이제야 도착해서 주말에 천천히 읽었다. 지난 달, 누군가가 자신의 '올해의 책'은 누가 뭐래도 <뱀과 물>이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며.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리라 믿는다.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그 어떤 서사보다 매혹적인 ‘낯섦’을 선사"한다는 소설가이자 번역가 배수아의 아홉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 <뱀과 물>을 포함하여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강렬한 표지가 인상적인 책이다. 각 작품은 모두 독립적인 단편이지만, 읽고 나서 보니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하나의 장편같다는 평도 많다.)


소설 속 화자는 대부분 어린 아이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린 아이를 관찰하는 어른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모든 어린 시절이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소설 속 어린 아이들은 모두 어린 아이이자 망상 속 존재이고,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 혹은 누런 개일지도 모른다 -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 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94p)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지금 서사를 잘 따라가고 있는지, 혹시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혹시 내가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모든 어린 시절과 모든 미래가 망상이라는 작가의 지적이 물리적으로 와닿는 부분이다. 자아와 타자, 과거와 현재, 세계와 시간의 구분이 모두 모호하다. "세상은 희면서 동시에 붉었고, 모든 것이 번쩍였으며, 모든 것이 환하면서 동시에 검"은 것이다. (<도둑 자매>, 150p) 나는 나 자신이지만, 나 자신이 아니기도 하며, 다시 나 자신이기도 하다. 마치 불경의 한 구절처럼. 


시간도 공간도 낯설고, 이름이나 지명같은 고유 명사도 모두 낯선 몽환적인 세계에서 서사가 펼쳐진다. 포스트 모더니즘적이고, 도전적이고, 전반적으로 그로테스크하다. 기괴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장면도 종종 등장한다. 내용을 뭐라고 설명할까. 어른들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 쥐들의 왕, 반두 여왕의 이야기? 죽은 태아와, 죽은 태아가 떠내려온 강과, 그 강에 빠진 누런 개를 상상하는 아이의 이야기? 그도 아니면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직관도 없이."를 외치는, 직관에 의거한 아주 직관적인 이야기. 글쓰기는 직관이라고 했다. 두고두고 읽으며 밑줄을 그어야 할 책이다.

마침내 내가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현기증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이미 세상은 저녁처럼 어둑했다. 그러나 어떤 저녁인가? 어느 날의 저녁인가?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15p)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얼이에 대해서>, 38p)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방을 나간다. 아버지의 등뒤에서 문이 닫힌다. 밤은 다른 밤보다 더욱 어둡다. 내가 아는 밤 중에서 가장 어두운 밤이다. 눈발은 점점 거세게 날린다. 구름이 더욱 짙어지고 세상은 재를 뒤집어쓴 듯 어두워진다. 나는 눈을 비비고 싶지만 손이 묶여 있어서 그럴 수가 없다. 어느덧 나는 바다 위에 떠서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검은 망토의 남자는 내가 탄 배를 더욱더 먼 바다를 향해서 민다.
가장 먼 바다를 향해서 민다.
나는 혼자다. (<얼이에 대해서>, 75p)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94p)

세상은 희면서 동시에 붉었고, 모든 것이 번쩍였으며, 모든 것이 환하면서 동시에 검었다. (<도둑 자매>, 150p)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뱀과 물>, 191p)

내가 세상에 없을 때, 혹은 세상이 없을 때, 나는 파도 모양으로 주름진 함석지붕 오두막에 사는, 배가 터진 한 마리 개였다고 했다. 기나긴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나를 상상하는 놀이였다. 나는 내가 닭이라고 상상했다. 내가 개라고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복숭아였고, 꿈속에 늘 나타나는, 검은 물속을 헤엄치는 큰 뱀이었고, 때로는 나이든 여자들이 눈물을 뿌리는 검고 긴 공단 치마였다. (<뱀과 물>, 193p)

"어쩌면 너는 아이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앞서가던 여승이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네 안에는 아주 늙은 네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늙은 그녀가 너무 이른 시기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라. 만약 그녀가 미친 닭처럼 순식간에 훨훨 날아가버리면 너는 평생 그녀를 쫓아다녀야 하는 거야. 아니면 그녀가 너를 쫓아다니겠지. 운이 좋아서 그런 불행만 일어나지 않으면, 넌 훌륭한 우체국 직원이 될 거다." (<뱀과 물>, 206p)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오직 야수일 뿐. 여교사는 피부 아래의 아득한 감각으로 그것을 느꼈다. 수화기 속에서는 상대방이 계속해서 뭔가를 말했지만, 그녀는 더이상 귀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 세계를 잊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어디로?" (<뱀과 물>, 210p)

개미 한 마리가 여교사의 허벅지 위를 기어갔다. 그 밖에는 모든 것이 고요했다. 그 밖의 모든 세상은 소리가 없었다. 몸도 없었다. 양계장 주인을 피해 달아나던 닭도 담장 아래서 동작을 멈추었다. 콜레라 환자를 태우는 불길도 너울거림을 멈추었다. 죽은 소녀들도 너울거림을 멈추었다. 어린 시절도 일생동안 지속될 너울거림을 불현듯 멈추었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뱀과 물>, 223p)

"그렇다면 어디로?"
수화기를 향해서 이렇게 되물었으나, 이미 전화는 끊긴 다음이었다. (<뱀과 물>, 224p)

너무 이른 죽음은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사람들은 늘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느낄까?
그런데 내 느낌이란 무엇일까? 형체가 사라지고 존재만 남은 가방과 같은 이것, 파국을 향해 산란되는 이것.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2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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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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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시인은 시집으로 만 부를 찍었다고 한다. 시인이 얼마나 인기가 많고 대중적인지 가늠이 되는 부분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은 작년 7월 난다에서 나온 시인의 산문집. 진녹색의 양장본 표지와 그림, 그리고 갱지 같은 느낌의 종이까지 참 예쁜 책이다.


서촌 그 책방에 갔을 때 사장님이 이 책에 대해 쓰신 감상평을 읽었다. 시인이 아버지에 대해 쓴 부분이 압권이라고 하며 ‘세상에 자기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있구나. 세상에는’ 라는 평을 남겼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구절은 서촌 그 책방에서 내가 가저온, 책방 주인의 유언이 되겠다.


나는 그가 멋진 어른들에게 들은 말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생선 알러지가 있는 직원에게 매일 ‘이것 안 드실 것입니까?’하고 물어보는 예의바름과 성의, 어린 친구의 고충을 마음으로 이해해주며 나이듦의 나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자세는 내가 갖고 싶은 종류의 것들이다. 이 책에서 내가 찾아낸 유언은 이런 부분들이었다.


30대의 젊은 시인이 글을 쓰며, 사랑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며 한 고민과 통찰이 담겨있다. 그리하여 동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생각보다 큰 울림을,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이는 벌써 옛적부터 성인이지만, 아직 ‘어른’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읽기에 참 좋은 산문집이다. 시인에게는 이렇게나 좋은 어른들이 많은데, 과연 나는 어떤 어른에게서 이런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훗날 내가 이런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 업무회의 시간에 ‘전략’ ‘전멸’같이 알고 보면 끔찍한 뜻의 전쟁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고 점심에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언제 밥 먹자"라는 진부한 말을 했으며 저녁부터는 혼자 있느라 누군가에게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담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19-20p)

1998년 가을, 여고 시절 그녀가 친구와 릴레이 형식으로 주고받은 편지였는데 "오늘 점심은 급식이 빨리 떨어져서 밥을 먹지 못했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10여 년 전 느낀 어느 점심의 허기를 나는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것으로 편지 훔쳐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25p)

여행과 생활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당신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먼 시간은
당신에게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나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53p)

울음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70p)

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과 상대방의 말을 듣는 시간이 사이 좋게 얽힐 때 좋은 대화가 탄생하는 것이라 나는 그때 김선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선생님의 질문에 맞춰 나는 가족사나 연애 이야기, 앞으로 쓰고 싶은 시,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 말했고 그것보다 더 자주 치기와 서투름 같은 것들을 보여드렸다. (74p)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81-82p)

하긴 나는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 일들을 좋아한다. 밤새 내린 눈으로 산이 하얗게 변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흰 산을 눈에 넣으며 감탄하는 일, 따듯한 물에 언 발을 담그는 일,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일…… 우리와 함께하는 작은 일들은 모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흔한 것이다. (101p)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110p)

곰치국의 간이 조금 진해졌지만 여전히 수련 같은 고명들이 가득 들어간 일이나 한해살이풀이 죽은 자리에 같은 한해살이풀이 자라는 일, 어제 자리한 곳에 오늘의 빛이 찾아 비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리 큰일도 아니었습니다. (133p)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1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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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ㅣ 헤르만 헤세 선집 3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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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고 추천을 너무 많이 받아서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 이렇게 좋은 책이 작년의 마지막 독서였다. 나름 의미있고 뿌듯한 마무리인 것 같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길에 오른 어린 싯다르타와 그를 따르는 친구 고빈다. 그들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고, 사문들을 따라 재물 없이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고, 열반에 오른 고타마의 말씀도 듣는다. 고타마의 제자가 되기로 한 고빈다와 달리 싯다르타는 다시 수행길에 오른다. 그는  사랑과 쾌락을 배우기도 하고, 장사를 하며 물욕에 몰락하기고 한다.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유치하고 어리석은 애정에 마음의 상처를 입다가도 가난한 뱃사공에게서 삼라만상의 진리를 배우기도 한다.


진리는 어디에 있으며, 자아란 결국 무엇일까? 열반에 오르는, 경지에 다다르는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평소 좋아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의 또 다른 작품을 이렇게 접하게 되어 너무 행복하다. 말이 필요없는 참 좋은 작품이었다. 제목이 <싯다르타>인지라 석가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석가의 또다른 삶이 있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리따분할 수 있는 부처의 생애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쓸 수 있다니.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순식간에 읽은 소설이었다.

그러나 자아나 가장 내적인 것과 같은 궁극적인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15p)

아침의 첫 햇살이 방 안을 비추었다. 그 브라만은 싯다르타의 무릎이 약간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얼굴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버지는 싯다르타가 이제 더 이상 자기 곁에 없음을, 집에 없음을, 자신에게서 떠나 버렸음을 깨달았다. (23p)

"... 네가 그곳에 계속 머물렀더라면 얼마 안 가 물 위를 걷는 법도 배웠을 거야."

"나는 물 위를 걸을 마음은 하나도 없어," 싯다르타가 말했다. "늙은 사문들이나 그런 재주들에 만족하라지." (39p)

‘... 나는 자아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단지 자아를 속이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쳤을 뿐이야. 정말이지 자아만큼 내가 몰두한 화두는 없었어. 내가 살아 있다는 수수께끼, 내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남다른 존재라는 이 수수께끼, 내가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수수께끼만큼 나를 몰두하게 만든 것은 없었어!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 싯다르타에 대해 가장 적게 알고 있어!‘ (55p)

"다들 그런 식으로 살아가지요. 누구든 남에게서 받고 남에게 주며 살아가지요.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지요." (87p)

그러나 오늘은 강의 모든 비밀 중 단 하나만 볼 수 있었고 그것에 사로잡혔다.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고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모습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을 띤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고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득한 기억 같은, 신의 목소리 같은 어떤 예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130p)

강은, 바주데바가 가르쳐 준 것 이상으로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 강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웠다. 격정이나 욕망에 동요하지 않고, 판단이나 의견을 내려 하지 않고, 조용하고 열린 마음과 기대하는 자세로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136p)

그러자 현재와 영원은 동시同時라는 느낌이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그 순간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모든 생명의 불멸성과 모든 순간의 영원성을 깨닫게 되었다. (146p)

그는 그들을 이해했으며, 생각이나 통찰이 아니라 오로지 충동이나 욕망에 이끌리는 그들의 삶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꼈다. 그는 완성의 경지에 접근하여 있었다. 최근에 입은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어린애 같은 사람들을 자기의 형제처럼 여겼다. 그들의 허영심, 탐욕, 우스꽝스러운 특성들이 이젠 그에게 웃음거리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다 이해되었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163p)

싯다르타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이제 오로지 귀를 기울이는 데만 몰두해서, 완전히 마음을 비운 채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그제야 그는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모두 다 배웠음을 느꼈다. 그는 자주 이 모든 소리, 강물에서 나는 수많은 소리를 들어 왔지만, 오늘은 그 소리들이 새롭게 들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 수많은 소리들을 분간할 수 없었다. 기쁜 소리와 슬픈 소리를 분간할 수 없었고, 어린아이의 소리와 어른의 소리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함께 섞여서 들어왔다. (중략) 그렇게 싯다르타가 수천 가지 소리를 내는 강의 노래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자, 고통의 소리와 웃음소리를 분리시키지 않고, 특정한 소리에 자기 영혼을 얽매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지 않고 모든 소리에, 그 전체에, 단일성에 귀 기울이자, 수천 가지의 소리가 어우러진 그 위대한 노래는 단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바로 완성을 뜻하는 ‘옴‘이었다. (169-170p)

"... 시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네. 고빈다, 나는 이것을 몇 번이나 거듭 체험했네. 그리고 시간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현세와 영원 사이에, 번뇌와 지극한 행복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도 하나의 착각인 셈이지." (177p)

‘이 돌멩이는 돌멩이이기도 하고 짐승이기도 하고 신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이 돌멩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이것이 언젠가는 다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항상 모든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라고. (179-1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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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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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임현 작가의 단편집이자, 작가의 등단(2014년) 이후 첫 소설집이다. 표제작 <그 개와 같은 말>이 작가의 등단작이고, 올해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고두>도 실려있다. <고두>를 참 인상깊게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역시 좋다.


책에는 총 열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흐름을 따라 단편을 쭉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작가가 타인의 불행을 마주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그 여자였을 수도 있어. 그 일에 휘말린 사람이 당신일 수도 있었다고. 그때도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어?(265p, 불가능한 세계)


언젠가 인터넷에서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쓴 유인물이라며 올라온 사진을 봤다. 그 유인물에는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 사진이 있었고, 이 사진을 보며 내게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는 내용의 감상문을 쓰라는 설명이 딸려 있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 요는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감상을 적는 부분에 해당 수업을 들은 학생이 몇 마디 일침을 날렸다. 자기는 남의 불행을 두고 행복감을 느끼는 이기적이고 비공감적인 사람이 되기 싫다고. (역시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소비한다. 인터넷 상에서 무분별하게 넘쳐나는 이미지 뿐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한 번 정제된 불행도 마찬가지로 소비의 대상이다. 타인의 불행을 두고 자기의 행복을 가늠하다니, 이 얼마나 기형적이고 무서운 구조인가.


소설 속 인물들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바로 그런 사고를 목격하기도 한다. 자신이 사건의 중심에 있기도 하고, 아주 멀리서사건을 조망하기도 한다. 작가는 인간이 갖는 복합적인 성질을, 한없이 이타적이다가도 돌아서면 이기적으로 변하고, 자기의 슬픔을 치유하느라 옆 사람의 고통을 모른채 하고, 멀리 있는 자들의 불행에 동정심을 보내지면 가까운 이들에겐 그저 무관심한 복잡한 인간을 차분히 묘사한다. 읽고 나니 왠지 씁쓸하다. 인간은(나는) 본래 이런 존재일까.


나는 조금 낙천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인지라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삶이 아닌, 그것을 똑바로 마주하는 삶을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특히 좋았던 단편은 역시 <고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종종 목격된다는 설정의 <외>도 좋았다. 그리고 독후감을 쓰면서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으로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생각났다.


그런 사람으로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단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다 선량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모르는 걸 내가 알았을 뿐. 그렇게 사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더 이익이 된다는 걸 말이다.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선물을 준다는 것은 돌려받을 대가를 바라서이고 남을 위한 칭찬은 곧 나의 평판으로 이어져서 훗날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지. 알아듣겠니? 지금 당장의 손해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나중의 이익을 담보하게 된단다. 손해 아니라 투자. 선물 아니라 거래. (33p, 고두)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그러므로 노력해야 한단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반성해야 하지. 의지를 가지고 아주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냥 생긴대로 살게 되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게 나쁘다는 걸 몰라.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모르고, 어쩐지 좋은 쪽에만 서 있다고 착각하거든. 너도 들어보지 않았니? 재개발로 인해 보상받지 못한 세입자라든가, 장애인 시설을 들이지 않겠다고 시위하는 지역 주민 이야기 같은 거. 모른다고? 그런 일이라면 전혀 관심이 없다고? 그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겠구나. 남의 불행에 왜 관심을 갖지 않는 거겠니? 봐라, 네가 이렇게 이기적이다. (33p, 고두)

그런데 다들 그래. 다들 그러고 사는 거거든. 들키지 않을 만한 허물은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거든.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는 줄은 몰라. 그러니까 아무나 쉽게 비난하고 혐오하고 그게 정의인 줄 아는 거지. (49p, 고두)

진짜를 말하자면 누구든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모른다는 거야.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인 존재고 그러므로 부단히 경계해야 하는데도 부도덕하고 불의한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줄로만 알아. (49p, 고두)

왜 함부로 내게 미안해하는 것이냐. 나는 그런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고 무얼 용서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나쁜 의도, 나를 몰락시키려는 의지만 있었을 뿐이다. 내 학생이었다. 그걸 내가 가르쳤거든. 나를 사랑한 배덕한 학생. (52p, 고두)

그러나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대부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뿐, 알고 나면 뚜렷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우연이란 아직 모르거나 그중 한 부분이 누락된 것일 뿐이고. 소설가의 역할이 무엇이겠는가.그런 신비하고 모호한 부분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 ‘왕이 죽고 왕비가 죽었다‘의 빈 곳을 채우는 것 아닌가. (69p, 엿보는 손)

나는 그때 그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잃어버렸다. 잊은 게 아니고 처음부터 잘 듣지 않았으니까 그냥 잃어버렸다. 찢어진 채로 아니면 군데군데 지워진 채로 들었는데 남자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102p, 좋은 사람)

"(...) 왜 함부로 나를 배려하려 드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전부터 오래 내리고 있었는데 쌓이지는 않았다. 나도 무언가를 쌓자고 듣던 것은 아니었으나 젖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103p, 좋은 사람)

아마도 우리가 무사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별일 없던 거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만약 무리하게 대피소를 벗어나려 했다면 진짜 모를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고 우재가 후배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우리가 겪지 않은 사고일 뿐이었다. (120p, 좋은 사람)

열악한 것 중에서 덜 열악한 것을 고른다는 것은 능력보다는 운의 문제였다. 노력해서 얻어질 만한 것이 아니라 재수가 좋거나 나쁠 따름이었다. (139p, 무언가의 끝)

헤어질 때쯤 우리는 충무로에서 재개봉하는 「일 포스티노」를 보았고 연경은 그곳에서 소리 내어 우는 유일한 관객이었다. 그때 나는 연경이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느꼈다. 어딘가 애쓰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의심했는데, 아마 그것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153p, 그 개와 같은 말)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게 어떤 맥락에서 순차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고 오래 사이를 두었다가, 혹은 흐름상 분명 어색한데도 감정적으로는 자연스러운, 그런 대화들을 나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식으로 멀어지는 것과 멀어졌는지,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요, 묻고 대답하고 걸었다. (155-156p, 그 개와 같은 말)

말하자면 내가 느꼈던 불안함이란 이런 종류였다. 나의 어떤 말로든 세주를 웃게 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울리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불안. (158p, 그 개와 같은 말)

"글쎄 뭐랄까, 다들 비슷한 연애를 하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아주 특별하다, 특별해서 괜찮다, 믿으면서 무모해지는. 우리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런 연애였어요." (162p, 그 개와 같은 말)

"살면서 내 뒤통수를 볼 일은 없잖아. 자기 뒷모습이 어떻게 생긴지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 그 사람이 저만큼 멀어지는데 내가 저렇게 걷겠구나, 누가 나를 뒤에서 보면 저런 모습이겠네 싶은 거지. 기분이 진짜 이상하더라니까." (212p, 외)

"여보, 나는 당신 같지 않아. 당신처럼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고." (225p, 외)

"내가 그 여자였을 수도 있어. 그 일에 휘말린 사람이 당신일 수도 있었다고. 그때도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어?" (265p, 불가능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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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246
이수지 지음 / 비룡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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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너머가 두려운 모든 아이와 어른에게 보내는 위로

- 이수지, 『선』을 읽고

 

아무리 그래도 그림‘책’인데, 글은 없고 그림뿐이다. 최소한의 말 한 마디도 없이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의심하며 펼쳤는데, 어떤 책에는 글이 사족이 되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덮었다. 좋은 책에 내가 덧붙이는 말이 뱀의 발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쓴다.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을 이 책에 담아 봅니다.”

 

빈 도화지 한 장, 연필 한 자루, 그리고 지우개 한 개로 시작한다. 다음 장,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선 하나를 그리며 새하얀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탄다. 아이는 연필이고, 얼음판은 도화지다. 흰 도화지의 넓은 여백은 무대가 된다. 아이는 빈 얼음판에 얇은 선, 굵은 선, 똑바른 선과 굽은 선을 그리며 신나게 달리고, 회전하고, 마침내 점프를 시도한다.

 

종이 위쪽까지 뛰어 오른 아이가 얼음판에 착지하지 못하고 쿵, 바닥에 넘어져 주욱 미끄러지고 만다. 다음 순간, 미끄러지는 아이가 미쳐 얼음판 위에 안착하지도 못했는데 오른쪽 모퉁이부터 종이가 천천히 구겨진다. 그렇게 넘어진 아이는 종이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넘어지는 그림은 실패작이고, 실패작은 필요 없으니 구겨서 버리는 것이다. 재미있어 시작한 그림인데, 때때로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 마음에 짐이 되는 친구들이 있을 터이다. 즐거워서 시작한 스케이트가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싫어지는 어린이도 있을 듯하다. 그림 그리기도, 스케이트도, 나아가 다른 모든 즐거웠던 일이 지나친 완벽함을 추구하다 질려버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도화지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스케이트를 타는 데 제법 능숙해 보이고, 아름다운 선을 만들며 즐겁게 웃고 있다. 그러나 점프에 성공하지 못해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스케이트를 타며 느끼는 즐거움도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구겨진 종이를 다시 펴서 주변을 둘러보면 미끄러져 넘어지는 친구들이 있고, 이 친구들이 만드는 아름다운 광경이 있다. 그 뿐이랴, 우리에겐 함께 넘어지는 친구들, 내가 넘어졌을 때 손잡아 일으켜 주는 친구들, 그리고 능숙하지 않은 나를 위해 함께 손잡고 달려주는 어른들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넘어지고 실패한다.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 세 걸음에 한 번은 주저앉거나 넘어졌던 것처럼, 지극히 쉬워 보이는 모든 일에 처음을 다시 생각해 보면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서, 멋진 점프를 훌륭하게 해내지 못해서 종이를 구겨버린 적이 있다면 구긴 종이를 천천히 다시 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우리가 외면해 버린 연필과 지우개가, 모든 즐거운 일의 처음이 거기 여전히 있다.

 

선 하나를 그으면 경계가 된다. 두려움을 갖는 일은 선을 긋는 일과 비슷하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선으로 안전한 경계를 정해 놓고 ‘선 안에서만’으로 행동을 제한하면 실패할 위험이 적어진다. 무서운 바깥 세계, 경계선 밖으로 구태여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동시에, 선을 그어 경계를 만들어 놓으면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가능해진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극복할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익숙함과 편안함에 갇히지 않고,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강박감에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경계를 넘나들며 선 바깥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엉덩방아를 찧는 게 너무 무서워 스케이트장으로 들어가기조차 겁나는 아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밖에 있어도 괜찮다. 스케이트장을 벗어나더라도, 우리가 미리 그어 놓은 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그 곳에는 여전히 흰 도화지가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흰 여백이 모두 아이들의 무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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