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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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뱀과 물>


드디어 배수아를 읽었다. 도서관에 예약 걸어 놓은 게 이제야 도착해서 주말에 천천히 읽었다. 지난 달, 누군가가 자신의 '올해의 책'은 누가 뭐래도 <뱀과 물>이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며.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리라 믿는다.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그 어떤 서사보다 매혹적인 ‘낯섦’을 선사"한다는 소설가이자 번역가 배수아의 아홉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 <뱀과 물>을 포함하여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강렬한 표지가 인상적인 책이다. 각 작품은 모두 독립적인 단편이지만, 읽고 나서 보니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하나의 장편같다는 평도 많다.)


소설 속 화자는 대부분 어린 아이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린 아이를 관찰하는 어른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모든 어린 시절이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소설 속 어린 아이들은 모두 어린 아이이자 망상 속 존재이고,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 혹은 누런 개일지도 모른다 -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 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94p)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지금 서사를 잘 따라가고 있는지, 혹시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혹시 내가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모든 어린 시절과 모든 미래가 망상이라는 작가의 지적이 물리적으로 와닿는 부분이다. 자아와 타자, 과거와 현재, 세계와 시간의 구분이 모두 모호하다. "세상은 희면서 동시에 붉었고, 모든 것이 번쩍였으며, 모든 것이 환하면서 동시에 검"은 것이다. (<도둑 자매>, 150p) 나는 나 자신이지만, 나 자신이 아니기도 하며, 다시 나 자신이기도 하다. 마치 불경의 한 구절처럼. 


시간도 공간도 낯설고, 이름이나 지명같은 고유 명사도 모두 낯선 몽환적인 세계에서 서사가 펼쳐진다. 포스트 모더니즘적이고, 도전적이고, 전반적으로 그로테스크하다. 기괴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장면도 종종 등장한다. 내용을 뭐라고 설명할까. 어른들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 쥐들의 왕, 반두 여왕의 이야기? 죽은 태아와, 죽은 태아가 떠내려온 강과, 그 강에 빠진 누런 개를 상상하는 아이의 이야기? 그도 아니면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직관도 없이."를 외치는, 직관에 의거한 아주 직관적인 이야기. 글쓰기는 직관이라고 했다. 두고두고 읽으며 밑줄을 그어야 할 책이다.

마침내 내가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현기증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이미 세상은 저녁처럼 어둑했다. 그러나 어떤 저녁인가? 어느 날의 저녁인가?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15p)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얼이에 대해서>, 38p)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방을 나간다. 아버지의 등뒤에서 문이 닫힌다. 밤은 다른 밤보다 더욱 어둡다. 내가 아는 밤 중에서 가장 어두운 밤이다. 눈발은 점점 거세게 날린다. 구름이 더욱 짙어지고 세상은 재를 뒤집어쓴 듯 어두워진다. 나는 눈을 비비고 싶지만 손이 묶여 있어서 그럴 수가 없다. 어느덧 나는 바다 위에 떠서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검은 망토의 남자는 내가 탄 배를 더욱더 먼 바다를 향해서 민다.
가장 먼 바다를 향해서 민다.
나는 혼자다. (<얼이에 대해서>, 75p)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94p)

세상은 희면서 동시에 붉었고, 모든 것이 번쩍였으며, 모든 것이 환하면서 동시에 검었다. (<도둑 자매>, 150p)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뱀과 물>, 191p)

내가 세상에 없을 때, 혹은 세상이 없을 때, 나는 파도 모양으로 주름진 함석지붕 오두막에 사는, 배가 터진 한 마리 개였다고 했다. 기나긴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나를 상상하는 놀이였다. 나는 내가 닭이라고 상상했다. 내가 개라고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복숭아였고, 꿈속에 늘 나타나는, 검은 물속을 헤엄치는 큰 뱀이었고, 때로는 나이든 여자들이 눈물을 뿌리는 검고 긴 공단 치마였다. (<뱀과 물>, 193p)

"어쩌면 너는 아이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앞서가던 여승이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네 안에는 아주 늙은 네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늙은 그녀가 너무 이른 시기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라. 만약 그녀가 미친 닭처럼 순식간에 훨훨 날아가버리면 너는 평생 그녀를 쫓아다녀야 하는 거야. 아니면 그녀가 너를 쫓아다니겠지. 운이 좋아서 그런 불행만 일어나지 않으면, 넌 훌륭한 우체국 직원이 될 거다." (<뱀과 물>, 206p)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오직 야수일 뿐. 여교사는 피부 아래의 아득한 감각으로 그것을 느꼈다. 수화기 속에서는 상대방이 계속해서 뭔가를 말했지만, 그녀는 더이상 귀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 세계를 잊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어디로?" (<뱀과 물>, 210p)

개미 한 마리가 여교사의 허벅지 위를 기어갔다. 그 밖에는 모든 것이 고요했다. 그 밖의 모든 세상은 소리가 없었다. 몸도 없었다. 양계장 주인을 피해 달아나던 닭도 담장 아래서 동작을 멈추었다. 콜레라 환자를 태우는 불길도 너울거림을 멈추었다. 죽은 소녀들도 너울거림을 멈추었다. 어린 시절도 일생동안 지속될 너울거림을 불현듯 멈추었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뱀과 물>, 223p)

"그렇다면 어디로?"
수화기를 향해서 이렇게 되물었으나, 이미 전화는 끊긴 다음이었다. (<뱀과 물>, 224p)

너무 이른 죽음은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사람들은 늘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느낄까?
그런데 내 느낌이란 무엇일까? 형체가 사라지고 존재만 남은 가방과 같은 이것, 파국을 향해 산란되는 이것.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2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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