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평점 :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시인은 시집으로 만 부를 찍었다고 한다. 시인이 얼마나 인기가 많고 대중적인지 가늠이 되는 부분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은 작년 7월 난다에서 나온 시인의 산문집. 진녹색의 양장본 표지와 그림, 그리고 갱지 같은 느낌의 종이까지 참 예쁜 책이다.
서촌 그 책방에 갔을 때 사장님이 이 책에 대해 쓰신 감상평을 읽었다. 시인이 아버지에 대해 쓴 부분이 압권이라고 하며 ‘세상에 자기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있구나. 세상에는’ 라는 평을 남겼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구절은 서촌 그 책방에서 내가 가저온, 책방 주인의 유언이 되겠다.
나는 그가 멋진 어른들에게 들은 말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생선 알러지가 있는 직원에게 매일 ‘이것 안 드실 것입니까?’하고 물어보는 예의바름과 성의, 어린 친구의 고충을 마음으로 이해해주며 나이듦의 나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자세는 내가 갖고 싶은 종류의 것들이다. 이 책에서 내가 찾아낸 유언은 이런 부분들이었다.
30대의 젊은 시인이 글을 쓰며, 사랑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며 한 고민과 통찰이 담겨있다. 그리하여 동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생각보다 큰 울림을,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이는 벌써 옛적부터 성인이지만, 아직 ‘어른’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읽기에 참 좋은 산문집이다. 시인에게는 이렇게나 좋은 어른들이 많은데, 과연 나는 어떤 어른에게서 이런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훗날 내가 이런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 업무회의 시간에 ‘전략’ ‘전멸’같이 알고 보면 끔찍한 뜻의 전쟁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고 점심에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언제 밥 먹자"라는 진부한 말을 했으며 저녁부터는 혼자 있느라 누군가에게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담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19-20p)
1998년 가을, 여고 시절 그녀가 친구와 릴레이 형식으로 주고받은 편지였는데 "오늘 점심은 급식이 빨리 떨어져서 밥을 먹지 못했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10여 년 전 느낀 어느 점심의 허기를 나는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것으로 편지 훔쳐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25p)
여행과 생활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당신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먼 시간은 당신에게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나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53p)
울음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70p)
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과 상대방의 말을 듣는 시간이 사이 좋게 얽힐 때 좋은 대화가 탄생하는 것이라 나는 그때 김선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선생님의 질문에 맞춰 나는 가족사나 연애 이야기, 앞으로 쓰고 싶은 시,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 말했고 그것보다 더 자주 치기와 서투름 같은 것들을 보여드렸다. (74p)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81-82p)
하긴 나는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 일들을 좋아한다. 밤새 내린 눈으로 산이 하얗게 변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흰 산을 눈에 넣으며 감탄하는 일, 따듯한 물에 언 발을 담그는 일,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일…… 우리와 함께하는 작은 일들은 모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흔한 것이다. (101p)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110p)
곰치국의 간이 조금 진해졌지만 여전히 수련 같은 고명들이 가득 들어간 일이나 한해살이풀이 죽은 자리에 같은 한해살이풀이 자라는 일, 어제 자리한 곳에 오늘의 빛이 찾아 비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리 큰일도 아니었습니다. (133p)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148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