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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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오웰이 1949년에 쓴 장편 소설 <1984>는 체주의 사회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로, 서양 현대 고전으로 분류되는 책이다. <타임>지에서는 현대 100대 영문소설로 꼽기도 했다. 책을 다 읽으니, 몇 장면들이 꿈에 나올까봐 무서웠다. 찝찝하고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며, '역시 고전은 고전'이라는 생각을 했다.

 

 당시 미래 사회를 상상하여 쓴 소설인데, 어쩜 이렇게 섬세하고 세련되게 잘 썼는지, 그리고 어쩜 이렇게 정확히 인간의 속성을 파악했는지, 작가의 섬세함과 천재성이 감탄스럽다.

 

 책도 꽤 두껍고,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큰 주제도 알고 있던 터라 쉽사리 첫 장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사놓고 몇 달째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친구가 '한 편의 영화 같다'는 평을 내려줘서 읽기 시작했다. 3일 정도, 틈나는 대로 읽어 금방 끝냈는데, 정말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다.

 

 덧붙여, 조지 오웰은 언어, 발화, 말이 가진 힘과 잠재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작가였단 생각이 든다. 소설 맨 뒤, <신어의 원리>를 읽으며 그가 언어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984년 오세아니아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다. 사실 올해가 1984년인지 1983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주인공 윈스턴은 자기 나이가 몇 살이니 올해가 몇 년도 쯤 되겠구나, 하고 추측만 할 뿐이다.

 

 오세아니아 사회의 최고 권력자는 '빅 브라더', 그리고 그가 이끄는 당은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다. 오세아니아는 항상 유라시아나 이스트아시아와 전쟁 중이며, 그들의 이념은 항상 숭고하고 신성하다. 정치적 반역자인 골드스타인은 증오의 대상이며,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매일 '이 분 증오' 시간이 필요하고, 언제 어디서나 이들이 찬양하는 빅 브라더의 포스터를 볼 수 있다.

 

 당원들은 집, 일터, 길거리 도처에 설치된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24시간 받으며 조금이라도 불온한 사상을 지닌 자는 처벌받는다. 그들은 텔레스크린에서 울려퍼지는 알람소리에 기상하고, 명령에 따라 아침체조를 하며, 정해진 시간에 출근한다.

 

 외부 당원인 윈스턴도 어느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다. 그가 하는 일은 신문 기사나 잡지, 각종 문서에 실린 내용을 고치는 일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내용을 수정하는 것이다. 작업 과정에서 단 한 순간도 '날조'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지만, 윈스턴은 이 일에 의문이 든다. 다시 쓰인 역사를,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이는 진실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을까? 기록이 고쳐졌다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말하자면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깨끗이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양피지 위의 글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일단 그 모든 과정이 완료되면, 어떤 경우에도 거기에 허위가 섞여 있다고 주장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었다. (60)

 

 이야기는 윈스턴이 자기를 감시하는 듯한 한 여자와,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한 남자를 의식하며 시작한다. 마음속으로만 불온한 생각을 하던 윈스턴은 어쩌면 사상경찰이 곧 자신을 잡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어딘가에 당의 체제에 불복하는 '형제단'이 정말로 존재하여 언젠가 자신도 그 단체에 속할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떠오른다

‘이 분 증오‘가 끔찍한 것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절로 거기에 휘말려들기 때문에 끔찍한 것이다. (26p)

말하자면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깨끗이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양피지 위의 글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일단 그 모든 과정이 완료되면, 어떤 경우에도 거기에 허위가 섞여 있다고 주장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었다. (60p)

죽은 사람은 만들어낼 수 있지만, 산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묘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69p)

순간 남자가 진짜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꼭두각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머리가 아니라 그의 목구멍이다. 그가 내뱉는 것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말은 아니다. 그저 오리가 꽥꽥거리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소음일 뿐이다. (77-78p)

공기가 있는 한 허파가 계속 움직여서 숨을 쉬게 되는 것처럼 하루하루 미래가 없는 현실에 매달려 사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인 것 같았다. (215p)

그녀는 당의 강령이 자신의 삶을 간섭할 때만 그에 의혹을 품고 반발했다. (217p)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도 납득하지 못할 뿐더러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공적인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 파괴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무지로 인해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도 탈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곡식의 낱알이 소화되지 않은 채 새의 창자를 거쳐 그대로 나오는 경우처럼 뒤에 아무런 찌꺼기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222p)

그들은 개인적인 성실성으로 삶을 살았고,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인간관계였으며, 죽어가는 사람을 포옹하고 눈물을 흘리고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등의 무력한 행위에서도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233p)

그런데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236p)

결국 ‘전쟁‘이란 낱말은 잘못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늘 전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전쟁이 없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279p)

아무래도 인간은 사랑받기보다 이해받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352p)

무엇이든 진실일 수 있다. 소위 자연법이란 것은 엉터리이다. 인력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다.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원한다면 비누방울처럼 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도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윈스턴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냈다. 오브라이언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윈스턴 자신도 그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389p)

개념이 없으면 낱말도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419p)

신어에서는 어떤 것이 이단적인 사상인지는 인식할 수 있되 거기에서 한층 더 나아가서 이단적 사상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그 선을 넘어서는 데 필요한 낱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428p)

이런 식으로 명칭을 약어화하면, 그 명칭이 지녔던 연상적 의미가 거의 제거됨으로써 뜻이 한정되고 미묘하게 바꾸어질 것으로 여겨졌다. (430p)

가령 체스에 대해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queen(퀸)‘이나 ‘rook(룩)‘의 이차적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듯, 신어를 유일한 언어로 익히며 자라온 사람들은 ‘equal‘이라는 낱말이 한때는 ‘politically equal(정치적으로 평등한)‘이라는 이차적인 의미를 지녔었고, ‘free(자유로운)‘라는 낱말 역시 한때 ‘intellectually free(지적으로 자유로운)‘라는 뜻을 지녔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어떤 것이든 그에 대한 명칭이 없으면 상상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많은 죄와 실수가 생기게 되 ㄴ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어의 특징은 더욱더 뚜렷해지고, 낱말 수는 점점 줄어들며, 의미는 훨씬 더 엄격해지는 데다 잘못 사용될 기회는 점점 줄어서 거의 없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4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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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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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추천해 준 책. 책을 추천해준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엄기호 선생님은 항상 어떤 사회 현상들을 포착해서 공통적 구조를 찾아내고 거기에 딱 맞는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이 분석이 딱 맞는 것 같다. <단속사회>도 그렇게 쓰인 책. 우리는 학교, 주거지, 직등 다양한 공간에서 다른 이들과 관계를 지속하기도 하고 또 단절하기도 하며 살아가는데, 이 때의 '관계 맺음'을 단순히 피상적인 현상 이상으로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단속'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나와 다른 ''과는 철저하게 관계 맺음을 거부하는 한편(), SNS로 대표되는 특정한 공동체에는 간절하게 연결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이런 단속斷續사회에서 인간은 낯선 것을 만나거나 경험을 확장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삶의 서사적 주체가 되려는 그런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32)

 

낯선 것, 공적인 것, 나아가 자기 스스로(자기검열)마저 단속하는 사회는 결과적으로 연속성을 잃게 된다. 연속성은 삶을 하나의 서사로 만드는 힘인데, 궁극적으로 그 힘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은 그저 혼자 무기력하게 '생존'하는 수밖에 없다.

 

뭐가 문제일까? 개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일까? 타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잘못된 태도가 원인일까? 그런데 이 원인을 우리는 왜 항상 개인으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걸까? 저자는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이 시대의 <단속사회>적 면모를 포착해내어 사적인 이야기를 공적인 말하기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단속사회가 도래하게 된 다양한 사회구조적 원인을 분석한다

그들의 노동에 기대고 그들은 나의 노동에 기대어 이 책이 나왔다. 책을 쓰는 것은 고독한 일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임을 이 책을 쓰면서 다시 느꼈다. 이런 공동의 세계를 만들 힘이 아직 ‘우리‘에게 있다. (12p)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보호받았으며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였다. 피해자가 동아리를 떠나고 학생회활동을 그만두는 일도 잦았다. 그에 반해 가해자는 보통 한번 정도 질책을 들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활동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50p)

사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정치공동체란 기본적으로 배제에 기초하여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둥글게 모여 앉아 말을 나누다라는 말 자체에 이미 공동체가 폐쇄적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둥글게 모여 앉았을 때 만들어지는 원이야말로 폐쇄적이지 않은가. 원 안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모두가 안을, 즉 서로를 바라본다. 원 밖에 있는 사람은 배제된다. 이처럼 정치공동체는 ‘불가피‘하게 누군가를 배제하면서 결성된다. 특히 둥글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그 정치공동체에서 통용되는 말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원 밖으로 추방됨을 뜻한다. 그리스인들이 비그리스인들을 야만인(barbarian)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리스어 ‘야만인‘(βάρβαρος)은 그리스인들처럼 그리스어로 말하지 못하고 그저 ‘바르바르‘ 거리기만 한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야만인으로 분류한 것이다. (50p)

새로운 것을 배워가면서 우리는 낯선 것에 도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동일성에만 숨어들게 되면서 우리의 경험은 축소되고 성장의 기회는 봉쇄된다. 이것이 사냥꾼의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한 안전의 대가다. (61p)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관계를 맺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관계를 차단한다. 어느 공간에서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지만 또다른 공간에서는 끝도 없이 주절거리고 징징거린다. 우리는 누구와는 과잉연결되어 끝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상처를 호소하지만 누구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71p)

단속사회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부터도, SNS 등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없다가도, 정작 가까운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나‘의 이야기들을 하는 건 꽤나 낯설다고 느껴져요. ‘내 이야기가 궁금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그냥 입을 닫아버리곤 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으며 온몸을 외부로 열어놓았더니, 개미처럼 사는 동안에 배우고 겪은 일들도 내 몸을 관통"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함의 과잉상태에서 잊고 있던 ‘당함’들이 무엇이었던가를 깨우치게 되었다고 한다. 함의 의미는 당함을 통해서만 깨우쳐진다. (140p)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배움을 통한 성장은 기존의 질서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던 질서를 발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241p)

과연 현대사회는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독립적 존재를 낳았는가. 실은 다른 존재의 노동과 활동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기 안으로 쪼그라든 ‘파편화되고 고립된 개인’만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개개인의 삶이 파편화된 것은 성장하는 존재여야만 자기 삶에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4p)

환대는 ‘hospitality’이고 적의는 ‘hostility‘다. 이 두 가지 말은 ’host‘라는 같은 어원을 지니며 여기서 host는 ‘주인’이자 ‘손님’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다. 즉, 자신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두가지 태도에서 정반대의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환대는 자신의 타자성을 깨닫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며 첫 번째 손님이라는 위치로 돌아올 때 발생한다. 반면 적의는 내가 주인노릇 잘하고 있는데 괜히 나의 타자성을 발견하게끔 하고 대면하게 하는 상대방을 제거하여 그 사실을 영원히 감추고 싶을 때 생겨난다. (271-272p)

이렇게 공통의 것을 공유했을 때 타자는 비로소 ‘남’에서 ‘너’로 바뀌며, 타자와 나의 만남은 서로 공유하는 그 무엇이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무의미를 공유하며 우리 인간 삶에 공통된 운명에 대해 서로 자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강한 배움과 결속이 어디 있겠는가. (2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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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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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에서 <알쓸신잡>이 방영되면서 차트를 역주행해 올라왔던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종류의 에세이나 자기계()발서는 좋아하지 않지만 유시민이라는 작가의 글이 궁금하기도 하고, 마침 딱 친구가 읽어보라며 빌려주기도 해서 책을 폈다. 두 달 전쯤 읽었는데 이제야 천천히 리뷰를 올리게 됐다. 읽은 지 좀 오래돼서 발췌 중심.

 

 워낙 글을 잘 쓰는 분이라, 좋은 글 자체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충분했는데, 쭉 읽으며 전혀 기대치 않았던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책이 2013년에 나왔으니 집필하실 때는 50대 중반쯤 이셨을텐데, 50대의 중년 남성에게 이런 말을 듣고 이런 위로를 받다니. 예상치 못했던 터라 의외였고, 그래서 더 주의 깊게 읽게 되었다.

 

 책 제목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작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심한다. 이 질문은 자연스레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이어지는데, 삶은 죽음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내달리며, 우리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리고 살아지는 삶이 아닌 살아가는 삶을 위한 태도를 제시한다다. 책이 정답을 주는 건 아니지만, 책을 통해 한 번쯤 같은 주제를 갖고 고민해 볼만하다.

바람이 불면 사물이 각자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쳐 제각기 색깔이 다른 삶을 산다.

영생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말살한다. 영원히 산다면 오늘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와 교감, 함께한 일들이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다. 그 모든 것이 다 굳이 오늘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일이 된다. 어디에도 굳이 열정을 쏟아야 할 필요가 없다.

‘가문의 영광‘에 대한 강의가 끝나면 어른들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모범 답안은 판사나 검사였다. 의사나 공무원도 대충 정답으로 통했다. 그와 다른 대답은 어른들을 실망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판사가 되겠다는 모범 답안을 말하곤 했다. 어른들은 매우 기꺼워하셨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인생은 소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냉혹한 과정인지 모른다. 원대한 꿈과 낭만적 열정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대통령, 과학자, 장군, 의사, 영화배우, 축구 선수, 교사, 판검사, 변호사, 외교관, 소설가, 기업가…. 아이들은 마음대로 꿈을 정한다. 스스로 정하든 부모가 권하든 백지에 그림 그리듯 할 수 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그려도 좋고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다른 것을 그려도 된다. 아이들의 그림은 흔히 명예, 부, 권력, 지위를 성취하는 것과 연관되지만 청소부, 간호사, 수녀를 그리는 아이들도 있다. 이런 그림은 가치와 관련된다. 지구를 깨끗이 한다든가, 아픈 사람을 도와준다는가,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자라고 사회를 배우면서 아이들은 알게 된다. 어떤 것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직업을 잘 선택하려면 열등감을 극복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어디를 가든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원하는 사람이 적은 직업도 있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직업도 있다. 남들이 어떤 직업을 선호하는지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고르면 된다.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만약 내가 좋아서 선택한 그 직업이 다른 사람들도 많이들 좋아하는 것이라면 부득이 경쟁을 해야 한다. 그렇게 경쟁해서 그 직업을 가지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거기서 더 잘하기 위해서 또 경쟁해야 한다. 이 경쟁에서 뒤떨어지면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이기는 게 정답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즐기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 일하게 되면, 이겨도 남는 게 없고 지면 최악이 된다.

짝짓기를 하기 전에는 같이 살 수가 없다. 짝짓기와 관련된 제도와 관습, 문화가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살아보지도 않고서 평생 함께 살겠다고 공개 서약을 한다.

동물의 구애 행동은 짝을 얻어 자식을 낳고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생물학적 본능의 표출이지만 사람에게는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구애는 삶에 지속적으로 기쁨과 의미를 제공하는 불가결한 요소이며 삶의 품격을 좌우하는 중대사이다. 성욕이 사라지지 않은 한, 아내와 남편은 일반적으로 서로에게 여자이고 남자이다. 부부는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으며 성장기의 공통적인 경험도 없다. 헤어지면 바로 남이 된다. 부부 사이의 책임의식과 유대감은 사랑 위에서만 튼튼하게 유지된다. 사랑이 없어지면 조만간 책임감도 약해진다. 만약 연인으로서의 매력을 완전히 잃어버릴 경우 상대방은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찾게 될 위험이 있다. 혼인이 깨지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불행은 아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 진짜 불행이다.

결혼은 구애의 종착점이 아니다. 혼인한 이후에도 배우자에게 이성으로서 매력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외모를 건강하고 보기 좋게 가꾸어야 한다. 다정한 말과 이벤트로 계속 점수를 따야 한다. 손잡기와 입맞춤, 팔베개와 같은 소소한 구애 행동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구애는 단순한 짝짓기 수단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기쁨을 만드는 행위이다. 구애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 말고는 사랑의 감정을 인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자기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타 행동을 한다. 이것은 다른 동물들의 이타 행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신념을 가지고 살면서 그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나도 정답은 모른다. 내 나름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신념은 훌륭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훌륭해야 한다. 나는 내가 가진 신념 덕분에 내 자신과 내 삶이 더 훌륭해지는지를 주의 깊게 살핀다. 내 자신을 비루하게 만드는 신념은 좋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신념 그 자체가 확실히 훌륭해 보인다면, 그 신념을 실천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선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 선이라고 믿는 것들이 언제나 진리인 것은 아니다.

나는 평지에 솟아오른 돌멩이가 아니다. 숱한 고비를 넘기며 이어져온 가족사의 굴곡 어딘가에 놓인 존재이다.

은하와 행성의 생애 주기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삶과 하루살이의 삶은 양적인 차이가 없다. 둘 다 찰나의 시간을 살 뿐이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루살이는 그것을 모른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의 특별함이다. 그 특별함을 지성이라고 한다. 삶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삶은 그저 조금 더 길기만 할 뿐 하루살이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영원한 수령‘을 찬양하는 박연폭포 바위 글발은 하루살이의 몸부림보다 못한, 무지와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권력이 남긴 보기 흉한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

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가까이 온 만큼 남은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임하고 싶다. 애통함을 되도록 적게 남기는 죽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죽음, 이런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믿는다.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면서 잘 준비해야 그런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는, 그렇게 웃으며 지구 행성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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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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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누구나 교과서를 통해 읽었을 법한 <원미동 사람들>의 작가 양귀자의 장편소설. 돌이켜보면, 학교에서는 늘 수동적으로 배움에 임했던 터라 교과서에 등장한 좋은 소설과 훌륭한 작가를 더 찾아보고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미동 사람들>은 익숙하지만 작가 양귀자는 좀 낯설다. 이번에 읽은 소설은 1998년에 처음 발행된 장편소설 <모순>인데, 2013년에 양장본으로 개정판이 새로 나왔다고 한다. 첫 판은 무료 132쇄나 찍었다고.


 주인공 안진진의 이름은 참 진()자를 두 번 써서 진진, 그러나 성인 을 붙여 안진진이 되었다. 그래서 이름이, 나아가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설정이다.

 

 안진진의 엄마와 이모는 쌍둥이다. 4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태어난 어여쁜 딸 쌍둥이는 너무 닮아서 다 자랄 때까지 부모도 종종 헷갈리곤 했다. 자매는 또 거짓말처럼 41일 동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부터 둘의 운명은 달라졌다. 결혼 이후로 엄마와 이모는 눈에 띄게 달라져서, 나중에는 쌍둥이가 아니라 그냥 좀 많이 닮은 자매 정도로 보였다.


 엄마는 시장 좌판에서 양말을 팔고, 이모는 실크 원피스를 입고 넓은 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엄마가 하루를 마치고 고단하게 가계부를 쓸 때, 이모는 소설책을 읽는다. 엄마의 딸인 진진이 가출을 해 한 달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 이모의 딸이자 진진과 동갑인 주리는 미국에서 꽤 우수한 성적을 낸다.

 

 이야기는 진진이 결혼할 남자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진행된다. 나영규와 김장우. 결과는 뻔했다. 나영규를 고르면 이모와 같은 삶이 펼쳐질 테고, 김장우를 택하면 엄마와 비슷한 삶이 눈에 선했다.


 사랑에는 답이 없고, 삶에도 답이 없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선택을 했기에 삶은 이 지경인가. 그러나 되감기가 불가능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밤마다 후회한다.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다시 시시하고, 어딘가 미심쩍은 선택을 하고야 마는 인간. 작가는 이 모순을 천천히 그려낸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니, 내가 아는 착한 애들은 모두 바보였다. 그 당시 나는 단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60-61p)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75p)

내가 고개를 흔들면 그는 수채화 붓으로 긋듯이 씨익 한번 웃고는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110p)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127p)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152p)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다. (157p)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73p)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188p)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다만 이것이 사랑인가, 하고 사랑을 묻다가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답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걸음은 자꾸 허방을 디뎠고, 눈길은 쓸쓸하게 텅 빈 허공을 헤매었다. 마음자리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겨서 거기로 가을 찬바람이 쉭쉭 드나들고 있었다. (195p)

그러다 문득 왼쪽을 보았다. 곤한 잠에 빠진 김장우의 방심한 얼굴이 혈육같이 여겨졌다. 나는 방바닥에 내던져진 그의 쓸쓸한 팔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항아리에 물이 넘치듯 사랑이 넘치는 느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204p)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232p)

하나의 거짓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를 때가 있다. 진모가 그랬다. 자신의 말에 자신이 속아서 목이 메고 있는 진모. (247p)

좋은 밤을 보내려면 확실한 예약 없이는 곤란해요, 라는 그 말, 그것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인생의 진리가 아니었을까……. (251p)

나는 울었다. 추억 속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현실 속의 내 아버지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내 추억을 희롱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270p)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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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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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애란 작가가 2012~2017년 사이 발표한 단편 7편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어쩌다보니 작가의 첫 소설집인 <달려라, 아비>를 읽고 바로 최신작을 읽게 되었는데, 글이 많이 성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려라, 아비>가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신인 소설가의 작품이었다면, 이번 소설집 <바깥은 여름>은 작가가 보다 능숙하게 완급을 조절할 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달까.

 

 <바깥은 여름>이 당연히 표제작인 줄 알았는데, 제목을 따로 붙인 거였다. 보통 표제작을 선정하는 단편집에서 이렇게 따로 제목을 붙이는 데 신경을 많이 썼을텐데, 모든 작품을 다 어우르는 좋은 제목인 것 같다.

 

수록된 작품은 총 7,

입동 / 노찬성과 에반 / 건너편 / 침묵의 미래 / 풍경의 쓸모 / 가리는 손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어느 더운 여름날, 스노우볼을 상상해 본다. 구 바깥은 찌는 듯한 더위이지만 안은 여전히 서늘하다. 7편의 작품은 이렇게 풍경과, 계절과, 세상과 시차를 겪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매일 보는 8시 뉴스의 사건 사고 소식에서 들리는 한 줄의 기사가 어린이집 차량이 후진하다 아이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했다든가, 과속하던 고속도로 차량이 갓길에 있는 사람을 치어 숨지게 했다든가, 물에 빠진 학생을 구하려던 선생님이 사흘간 투병하다 끝내 숨졌다든가 하는 기사들이 사실은 누군가에게 사태事態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는 얼마나 상상력이 메마른 인간이며 또한 앞으로도 숙명적으로 사태 이후의 삶에 얼마나 무관심할 것인가를 조곤조곤 지적한다.

 

 얼마 전 <비정상회담>에 나온 김영하 작가가 '소설은 기본적으로 어두운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와닿는 소설집이었다. 바깥은 온통 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나느라 애쓰는 이들의 삶을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 그 상상이 얼마나 어둡고 아픈 것인지 생각해본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한번은 아내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십 분 만에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길 본다고, 나는 안 그러냐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고,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무슨 반찬을 사고 어떤 흥정을 하나 훔쳐본다고 했다. (23p)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하는 의문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벽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32-33p)

당시 찬성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잘 크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닌, 어른들의 잠을 깨우지 않는 거였다. (43p)

와사삭― 와삭― 청량하게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찬성 귀까지 다 들렸다. 찬성이 자기 손바닥을 가만 내려다봤다. 얼음은 사라지고 손에 엷은 물자국만 남아 있었다. 동시에 찬성의 내면에도 묘한 자국이 생겼는데 찬성은 그게 뭔지 몰랐다. (48p)

무언가 제자리에 도로 갖고 오는 건 에반이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찬성은 때로 에반이 자기에게 물어다주는 게 공이 아닌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공인 동시에 공이 아닌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걸 알았다. (52p)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98-99p)

명학이 그때서야 ‘누구?‘ 하는 얼굴로 도화를 슬쩍 바라봤다. 명학의 서글서글한 눈에 선의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도화는 속으로 ‘아직 덜 실패한 눈……‘이라 중얼거렸다. 오래전 저 눈과 비슷한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 있다고. 자신도 가져본 적 있는 눈이라고 생각했다. (114p)

―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115p)

그때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니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118p)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터뜨린 울음, 어쩌면 그게 내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죽기 전,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떤 이의 절망, 그것이 내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그것이 내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범람 직전의 댐처럼 말로 가득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 성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이름을 못 왼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순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내 말은 당신네 말로 들릴 것이다. (124p)

이곳 사람들은 ‘혼자‘라는 단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또 만졌다. 몸에 좋은 독이라도 먹듯 날마다 조금씩 비관을 맞봤다. (128p)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132p)

그에게 모어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 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142p)

나는 그 광경이 늘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악몽 같은 아름다움이었을까. 앞으로도 지구가 꾸는 이 예쁜 꿈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죽은 뒤 한번 더 죽으면서도 나는, 그 눈부신 장면으로부터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146p)

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땐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든 사람 말이다. (중략) 과거가 될 만반의 자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러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뒤 사진기를 보고 웃었다. (150p)

일상 위에 가짜 크리스털처럼 박힌 비일상성과 만나 반갑게 손 흔든 뒤, 돈 쓰고 헤어지는. (169p)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200p)

그래서인지 나는 내 앞의 ‘청명‘이 남의 집에서 떼다 붙인 커튼처럼 느껴졌다. 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고,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한데, 뭐가 됐든 내 것 같진 않았다. (2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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