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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친구가 추천해 준 책. 책을 추천해준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엄기호 선생님은 항상 어떤 사회 현상들을 포착해서 공통적 구조를 찾아내고 거기에 딱 맞는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이 분석이 딱 맞는 것 같다. <단속사회>도 그렇게 쓰인 책. 우리는 학교, 주거지, 직등 다양한 공간에서 다른 이들과 관계를 지속하기도 하고 또 단절하기도 하며 살아가는데, 이 때의 '관계 맺음'을 단순히 피상적인 현상 이상으로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단속'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나와 다른 '남'과는 철저하게 관계 맺음을 거부하는 한편(斷), SNS로 대표되는 특정한 공동체에는 간절하게 연결되기를 바란다(續). 저자는 이런 단속斷續사회에서 인간은 낯선 것을 만나거나 경험을 확장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삶의 서사적 주체가 되려는 그런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32쪽)
낯선 것, 공적인 것, 나아가 자기 스스로(자기검열)마저 단속하는 사회는 결과적으로 연속성을 잃게 된다. 연속성은 삶을 하나의 서사로 만드는 힘인데, 궁극적으로 그 힘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은 그저 혼자 무기력하게 '생존'하는 수밖에 없다.
뭐가 문제일까? 개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일까? 타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잘못된 태도가 원인일까? 그런데 이 원인을 우리는 왜 항상 개인으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걸까? 저자는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이 시대의 <단속사회>적 면모를 포착해내어 사적인 이야기를 공적인 말하기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단속사회가 도래하게 된 다양한 사회구조적 원인을 분석한다.
그들의 노동에 기대고 그들은 나의 노동에 기대어 이 책이 나왔다. 책을 쓰는 것은 고독한 일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임을 이 책을 쓰면서 다시 느꼈다. 이런 공동의 세계를 만들 힘이 아직 ‘우리‘에게 있다. (12p)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보호받았으며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였다. 피해자가 동아리를 떠나고 학생회활동을 그만두는 일도 잦았다. 그에 반해 가해자는 보통 한번 정도 질책을 들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활동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50p)
사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정치공동체란 기본적으로 배제에 기초하여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둥글게 모여 앉아 말을 나누다라는 말 자체에 이미 공동체가 폐쇄적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둥글게 모여 앉았을 때 만들어지는 원이야말로 폐쇄적이지 않은가. 원 안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모두가 안을, 즉 서로를 바라본다. 원 밖에 있는 사람은 배제된다. 이처럼 정치공동체는 ‘불가피‘하게 누군가를 배제하면서 결성된다. 특히 둥글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그 정치공동체에서 통용되는 말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원 밖으로 추방됨을 뜻한다. 그리스인들이 비그리스인들을 야만인(barbarian)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리스어 ‘야만인‘(βάρβαρος)은 그리스인들처럼 그리스어로 말하지 못하고 그저 ‘바르바르‘ 거리기만 한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야만인으로 분류한 것이다. (50p)
새로운 것을 배워가면서 우리는 낯선 것에 도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동일성에만 숨어들게 되면서 우리의 경험은 축소되고 성장의 기회는 봉쇄된다. 이것이 사냥꾼의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한 안전의 대가다. (61p)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관계를 맺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관계를 차단한다. 어느 공간에서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지만 또다른 공간에서는 끝도 없이 주절거리고 징징거린다. 우리는 누구와는 과잉연결되어 끝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상처를 호소하지만 누구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71p)
단속사회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부터도, SNS 등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없다가도, 정작 가까운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나‘의 이야기들을 하는 건 꽤나 낯설다고 느껴져요. ‘내 이야기가 궁금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그냥 입을 닫아버리곤 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으며 온몸을 외부로 열어놓았더니, 개미처럼 사는 동안에 배우고 겪은 일들도 내 몸을 관통"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함의 과잉상태에서 잊고 있던 ‘당함’들이 무엇이었던가를 깨우치게 되었다고 한다. 함의 의미는 당함을 통해서만 깨우쳐진다. (140p)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배움을 통한 성장은 기존의 질서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던 질서를 발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241p)
과연 현대사회는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독립적 존재를 낳았는가. 실은 다른 존재의 노동과 활동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기 안으로 쪼그라든 ‘파편화되고 고립된 개인’만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개개인의 삶이 파편화된 것은 성장하는 존재여야만 자기 삶에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4p)
환대는 ‘hospitality’이고 적의는 ‘hostility‘다. 이 두 가지 말은 ’host‘라는 같은 어원을 지니며 여기서 host는 ‘주인’이자 ‘손님’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다. 즉, 자신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두가지 태도에서 정반대의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환대는 자신의 타자성을 깨닫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며 첫 번째 손님이라는 위치로 돌아올 때 발생한다. 반면 적의는 내가 주인노릇 잘하고 있는데 괜히 나의 타자성을 발견하게끔 하고 대면하게 하는 상대방을 제거하여 그 사실을 영원히 감추고 싶을 때 생겨난다. (271-272p)
이렇게 공통의 것을 공유했을 때 타자는 비로소 ‘남’에서 ‘너’로 바뀌며, 타자와 나의 만남은 서로 공유하는 그 무엇이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무의미를 공유하며 우리 인간 삶에 공통된 운명에 대해 서로 자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강한 배움과 결속이 어디 있겠는가. (2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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