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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평점 :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누구나 교과서를 통해 읽었을 법한 <원미동 사람들>의 작가 양귀자의 장편소설. 돌이켜보면, 학교에서는 늘 수동적으로 배움에 임했던 터라 교과서에 등장한 좋은 소설과 훌륭한 작가를 더 찾아보고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미동 사람들>은 익숙하지만 작가 양귀자는 좀 낯설다. 이번에 읽은 소설은 1998년에 처음 발행된 장편소설 <모순>인데, 2013년에 양장본으로 개정판이 새로 나왔다고 한다. 첫 판은 무료 132쇄나 찍었다고.
주인공 안진진의 이름은 참 진(眞)자를 두 번 써서 진진, 그러나 성인 ‘안’을 붙여 안진진이 되었다. 그래서 이름이, 나아가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설정이다.
안진진의 엄마와 이모는 쌍둥이다. 4월 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태어난 어여쁜 딸 쌍둥이는 너무 닮아서 다 자랄 때까지 부모도 종종 헷갈리곤 했다. 자매는 또 거짓말처럼 4월 1일 동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부터 둘의 운명은 달라졌다. 결혼 이후로 엄마와 이모는 눈에 띄게 달라져서, 나중에는 쌍둥이가 아니라 그냥 좀 많이 닮은 자매 정도로 보였다.
엄마는 시장 좌판에서 양말을 팔고, 이모는 실크 원피스를 입고 넓은 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엄마가 하루를 마치고 고단하게 가계부를 쓸 때, 이모는 소설책을 읽는다. 엄마의 딸인 진진이 가출을 해 한 달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 이모의 딸이자 진진과 동갑인 주리는 미국에서 꽤 우수한 성적을 낸다.
이야기는 진진이 결혼할 남자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진행된다. 나영규와 김장우. 결과는 뻔했다. 나영규를 고르면 이모와 같은 삶이 펼쳐질 테고, 김장우를 택하면 엄마와 비슷한 삶이 눈에 선했다.
사랑에는 답이 없고, 삶에도 답이 없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선택을 했기에 삶은 이 지경인가. 그러나 되감기가 불가능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밤마다 후회한다.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다시 시시하고, 어딘가 미심쩍은 선택을 하고야 마는 인간. 작가는 이 모순을 천천히 그려낸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니, 내가 아는 착한 애들은 모두 바보였다. 그 당시 나는 단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60-61p)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75p)
내가 고개를 흔들면 그는 수채화 붓으로 긋듯이 씨익 한번 웃고는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110p)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127p)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152p)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다. (157p)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73p)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188p)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다만 이것이 사랑인가, 하고 사랑을 묻다가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답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걸음은 자꾸 허방을 디뎠고, 눈길은 쓸쓸하게 텅 빈 허공을 헤매었다. 마음자리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겨서 거기로 가을 찬바람이 쉭쉭 드나들고 있었다. (195p)
그러다 문득 왼쪽을 보았다. 곤한 잠에 빠진 김장우의 방심한 얼굴이 혈육같이 여겨졌다. 나는 방바닥에 내던져진 그의 쓸쓸한 팔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항아리에 물이 넘치듯 사랑이 넘치는 느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204p)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232p)
하나의 거짓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를 때가 있다. 진모가 그랬다. 자신의 말에 자신이 속아서 목이 메고 있는 진모. (247p)
좋은 밤을 보내려면 확실한 예약 없이는 곤란해요, 라는 그 말, 그것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인생의 진리가 아니었을까……. (251p)
나는 울었다. 추억 속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현실 속의 내 아버지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내 추억을 희롱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270p)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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