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컷 : 북디자이너의 세번째 서랍
김태형 외 지음 / 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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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디자이너들의 B컷을 모아 놓은 책. 어떤 A컷은 단박에 왜 A컷인지 알겠지만, 또 다른 A컷은 왜 A컷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더라. 내가 골랐다면 표지가 되었을 시안이 여러 관계자들의 손을 거쳤다 결국 B컷으로 남았겠지. 여러 디자이너의 출판 철학까지 엿볼 수 있어 참고용 책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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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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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상은 지난 한 해 동안 발표된 등단 십 년 이내 작가들의 중단편소설을 심사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벌써 올 해로 8회째. 이 책을 사서 모으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 나는 6회 쯤부터 사서 읽기 시작한 것 같다.

 

수상작은 총 7개로, 대상은 임현 작가의 <고두(叩頭)>.

이 외에도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 김금희의 <문상>, 백수린의 <고요한 사건>, 강화길의 <호수 - 다른 사람>, 최은영의 <그 여름>, 그리고 천희란의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가 수록되어 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면 최근 한국 소설의 트랜드를 함께 읽게 되는 것 같아서 좋다. 올 해는 특히 젠더 감수성이 높은 소설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익숙한 이름의 작가도 있고, 처음 보는 작가도 있었다. 두 편 정도만 발췌해봤다.

 

 

임현, <고두(叩頭)>

 

고두는 '공경하는 뜻으로 머리를 땅에 조아림'이란 뜻이라는데, 단어가 낯설어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소설은 화자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며 시작된다. 화자는 대가를 바라고 행하는 '의도적 선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의와 친절을 가장한 '의도적 사과'는 그의 처세술인 셈. 소설 내내 이어지는 화자의 회상과 독백은 때로 기분 나쁘고 심지어 역겹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사상과 신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백수린, <고요한 사건>

나는 감각적인 문장들을 좋아한다. 예쁘게 쓰인 문장을 읽으면 맘속에서 무언가가 정화되는 느낌. 외국 소설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한글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감정들 말이다. 혹자는 이런 문장들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과함'을 과하지 않게 잘 표현하는 작가들이 있다.


단편의 마지막 장면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눈 내리는 풍경에 붉은 깃발은 얼마 전 별세하신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를 떠오르게 한다.

 

 세상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창밖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역청빛 어둠을 덧칠한 이웃집의 지붕 위에도, 옥상 위의 장독대와 비탈 아래 쪽의 앙상한 나무초리 위에도, 고요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눈. 자국눈. 가랑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오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던 눈송이. 그토록 숨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구겨진 신발 위에, 양말도 없이, 까치발을 한 채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집마다 매달려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 사이로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는 풍경을, 그저 황홀하게. (155p)

 


그런 사람으로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단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다 선량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모르는 걸 내가 알았을 뿐. 그렇게 사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더 이익이 된다는 걸 말이다.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선물을 준다는 것은 돌려받을 대가를 바라서이고 남을 위한 칭찬은 곧 나의 평판으로 이어져서 훗날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지. 알아듣겠니? 지금 당장의 손해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나중의 이익을 담보하게 된단다. 손해 아니라 투자. 선물 아니라 거래. (10-11p)

소문들은 대개가 그런 식이었다. 누구의 목격담인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었지. 정작 그 사람은 무슨 이유로 모텔을 드나들었던 거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으니까. 떠도는 의혹일 뿐이었고 아무런 악의도 없이 그냥 되는대로 내밭는 말들이었다. (16-17p)
문제는 사과하는 쪽이 언제나 먼저 사과한다는 점이란다. 그게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모르지. (17p)

고개를 숙이는 연주가 무서웠단다. 존나 무서웠어. 무릎을 꿇으니까 더 무서웠다. 그 완벽한 사과의 자세가 무엇을 뜻하는 거겠니. 그게 더 우월해지는 거라고 누가 가르쳤는데. 연주를 따로 불러서 미안하다,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은데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그게 더 멋스러운 거라고 바로 내가 가르쳤는데 그걸 연주가 진짜 잘하고 있더구나. 누가 봐도 훌륭했으므로 나는 무서웠단다. (28p)

나를 무섭게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틀렸다고 확신한 것들이 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이 세계가 끝나고 구원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 같은 것이다. (…) 나만 모르고 모두가 알고 있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닐까. 그걸 내가 다 따라가지 못한 게 아닌가. (38p)

그렇게 일찍 집에 돌아와봤자 혼자 있게 되는 날들에는 처음 이사 왔던 날 아버지가 내게 아파트 단지를 보여주었던 옥상에 쭈그려앉아, 사라져가는 태양의 빛줄기가 쇠락한 골목과 남루한 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그러면 그 손길을 따라, 동네에 쪽잠을 청하는 고단한 노인처럼 주름이 깊게 팬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해가 지고 나면 대기에 남아 있던 온기도 노인의 마지막 숨결처럼 느리게 흩어져갔다. 몸에 한기가 깃들어 더 이상 앉아 있기가 힘들어지면 그제야 나는 쭈그렸던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라한 골목이 어째서 해가 지기 직전의 그 잠시 동안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지는지, 그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 깃드는 적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달콤하고 또 괴로워 울고 싶었을 뿐. (145-146p)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이 교착(交錯)하는 순간을 짚으면서 백수린은 미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 윤리적/도덕적인 것에 대한 판단을 압도하거나 삭제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인식에까지 나아갔다. (…) 때마침 도착한 「고요한 사건」의 회고와 더불어 우리는 아름다움에 매혹돼 잊어버린 추한 과거, 그 과거에 잠복돼 있는 끝나지 않은 싸움들, 묻히지 못한 사체들, 그리고 작별 인사 없이 헤어진 친구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자문해보게 된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나는 과연 무엇과/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고 또 없는지를. (1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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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온우주 단편선 1
곽재식 지음 / 온우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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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작가님은 타고난 이야기꾼인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단편 하나를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단숨에 끝내버리고 싶게 만든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은 휴가지에서 읽기 딱 좋다'는 생각을 했다.

 

연애소설이지만 한 커플이 꽁냥꽁냥하는 그런 내용은 아니고, 연애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것 같지는 않은 특별한 에피소드들을 너무 무겁지 않게, 또 지나치게 가볍지 않게 잘 담아내고 있다. 책을 덮고 나니 문득, 두 사람이 만나 연애를 하는 것은 너무나 지루하고 흔한 이야긴데, 하나하나 면면이 들여다보면 다 자기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는 총 다섯 개의 단편

- 달과 육백만 달러

- 최악의 레이싱

- 달팽이와 다슬기

-

-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이 실려 있습니다.

 

한 편 한 편 재미있게 읽었지만 <최악의 레이싱><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최악의 레이싱

제목만 읽고 자동차 레이싱을 떠올렸는데(관심 1도 없음)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였다.(역시 관심 없음)

 

혹시 언제 처음 보조바퀴 없이 자전거를 타게 되었는지 기억하시는지? 내 처음은 잘 생각나지 않고, 동생이 두발 자전거 연습하던 때는 생생하게 떠오른다. 동생은 보조바퀴를 뗀 자전거 폐달을 힘차게 구르고, 아빠가 뒤에서 같이 뛰셨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동생은 이렇게 외친다.

"아빠, 절대 놓으면 안 돼!!"

 

아빠는 대답한다.

"잡고 있어!!"

 

나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봤는데, 아빠는 처음부터 자전거를 잡고 있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자전거 배우는 법을 터득했겠지. 8살쯤 되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생의 씁쓸한 뒷면을 보게 되었다. 삶이란... 이렇게 서로 속고 속이는 거구나...

이런 거다. 인생은 이렇게 서로 속고 속이는 거고, 원효대사의 해골물과 같이, '내 자전거를 붙잡고 있음'이란 믿음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는 것! 누군가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고 있다는 믿음으로 어린 아이들은 자전거 타는 법을 처음 배우게 된다.

 

주인공은 강의실에서 만난 한 여학생과 썸(!)을 탄다. 거의 사귀기 직전 단계에 돌입했을 때, 그녀가 데이트 신청을 한다. 영화보자고.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뒷자리에 자기를 태워달라고...

 

주인공은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어릴 적, 어른들에게 속아가며 자전거를 배운 적이 없는 것이다. 룸메이트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달라고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자력구제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들은 박사과정에 있는 대학원생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방법을 갈구한다. 그러니까.. 어떤 물리학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자전거의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기계장치를 고안해낸다.

 

스케일은 점점 커져 교수님까지 이 레이싱에 가담하게 된다. 무슨... 무슨 원리... 인공지능...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뭔지 잘 모르겠구!^^!(동공지진) 암튼 다 큰 성인은 이렇게 요란하게 자전거를 배운다.

 

어릴 적 배웠던 자전거 속에는 이렇게 생각보다 큰 원리와 인생의 쓴맛이 담겨있었다. 뒤에서 날 잡아주는 이를 믿고 폐달을 밟는다는 것이 어느 순간 불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뒤돌아보지 않고 선뜻 폐달을 밟기가 어렵다. 의심이 많아져서 그런지, 당한게 많아져서 그런지, 내 자전거를 잡아준다고 하는 이들에게 쉬이 믿음을 보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의 일.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인 아름다운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그 날 아침 나는 새똥을 맞았다. 이탈리아 새똥 맞아보신 적 있으신지? 아니 거기서 새똥 맞을 줄 상상이나 했겠냐고...

 

모닝 새똥은 액땜이라 생각했다. 오늘 하루 중 이보다 불쾌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시간이 다가왔고, 이제 그만 피렌체 기차역으로 향해야 하는데 도통 버스가 오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촉박해지고 애가 타는데 택시도 안 잡히고. 어떡해? 어떡해?? 하다가 기차시간을 놓쳤다. 역에 가보지도 못한 채.

 

미국 출장 중이던 주인공은 백두산이 분화했다는 뉴스를 접한다. 화산재가 하늘을 온통 뒤덮어 당분간은 비행기가 뜰 수 없다는 소식이 덧붙여 있었다. 그럼 이를 핑계로 관광하며 쉬면 되겠지만, 주인공은 그 상황을 즐길 수 없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이 그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이다.

 

예비 신부에게 전화가 온다. 우리 결혼식 할 수 있는 것 맞아? 신부가 운다. 신랑도 운다. 자연재해를 뭘 어찌할 수도 없고 무기력하기만 하다. 사실 이 결혼은 준비과정에서부터 삐걱거렸다. 얼마나 힘들게 겨우 맞이하는 결혼식인데, 한국에 갈 수 없다니. 절망에 빠져 눈물 콧물 쏙 뺀 신랑은 일단 공항으로 향한다.

 

이미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모두 취소되었고, 주인공은 중국까지 날아가, 거기서 육로로 한국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운다. 그렇지만 중국으로 가는 티켓도 모두 동이 나 있는 상태. 이대로라면 토요일까지 한국에 도착할 수 없다.

 

반짝, 하고 주인공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스친다. 지구는 둥글다! 태평양을 건너지 않고, 반대 편으로, 그러니까 유럽을 지나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향하는 루트를 짜는 것. 이 경로라면 표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그렇게 결혼식을 하기 위한 긴 여정에 오른다.

 

찰나의 순간, 타이밍이 아쉬울 때가 있다. 한끝 차이로 무언가를 놓치기도 하고 얻기도 한다. 잠깐의 방심이 큰 화를 부르기도 하고. 인생은 왜 이렇게 맘대로 되는 게 없는지.

 

도저히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과 마주쳤을 때, 과연 개인의 노력으로 그 상황을 얼마만큼 개선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심오한 소설은 전혀 아니었다만, 유쾌하게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런 잔잔히 여운이 밀려왔다.

 

정말 말 그대로 '재미있어서' 놓지 않고 끝까지 쭉 읽어버린 소설이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도 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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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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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연휴, 본가 책장에 있던 책 중 눈에 띄는 걸 아무거나 골라 읽은 게 천명관의 <고래>였다. 일전에 누가 재밌다고 추천해 줬던 기억이 있어 집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이 수업시간에 읽느라 사뒀던 책이란다.

 

한줄로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좀 과하게 선정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이런 자극을 뛰어넘는 내러티브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2004년에 문학동네 장편소설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소설 끝에 심사평이 붙어 있었다. 한 심사위원의 말마따나 소설이 어떻게쓰여야 하는지 보여 준 강력한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추녀인 늙은 노파, 야망에 사로잡힌 대장부 금복, 그리고 금복의 딸 춘희로 이어지는 세 여자의 서사시이자 한 편의 시대극이고, 현실과 상상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판타지소설이기도 하다. 상당히 많은 등장 인물이 각각 다른 인물과 서로 얽혀있으며, 그래서 꽤 방대한 이야기를 꼼꼼히 풀어낸다.

 

소설은 인간의 욕구, 성적 충동, 가난한 생, 돈과 사랑에 대한 갈망,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은 야망, 삶을 향한 집착, 죽음의 공포와 같은 인간이 가진 근원적 특성을 시대적 배경과 잘 맞물러 이야기한다. 아무리 못한 삶도 죽음보다는 낫다는, 그래서 삶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전하고자 하는데, 그 방식은 인간이 얼마나 처절한 삶을 영위하느냐를 보여주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그렇고 그런, 지루하고 뻔한 여타의 한국소설과는 다르게 탄탄한 구성력이 돋보이는데, 작가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서술자는 곳곳에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꼭 시장 바닥에 앉은 보따리장수가 여기 저기 떠돌며 들은 이야기를 과장을 보태가며 흥미롭게 풀어내는 것 같다. 판소리 소리꾼의 타고난 재주를 구경하는 기분이기도 하다.

 

아쉬운 부분은, 가끔 어느 지점에서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데, 이게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간의 본성이나 동물성이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써야 했나? 싶으면서도, 그래 때로 인간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훨씬 잔인하지, 라는 생각.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덧붙여, ‘죽음이란 건 별게 아니라 그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은 일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6-17p)

그녀가 진정 사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단순한 세계였다. 그녀는 그의 육체를 신뢰했으며 그 거대한 존재 안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행복했다. (72p)

사람들은 물건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탄성을 질러댔지만 금복은 왠지 자신의 살을 베어내는 것처럼 마음이 쓰라렸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생명체가 그렇게 덧없이 고깃덩어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내장을 다 드러낸 채 해체되어가는 고래의 처지가 마치 걱정과 자신의 처지처럼 여겨져 저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올랐다. (89p)

당시만 해도 산 것이나 죽은 것이나 별반 다른 게 없었으며 죽음은 너무나 흔해서 귀하게 취급받지 못했다. (129p)

당연하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141p)

- 그러니까 다 껍데기뿐이란 말이군. 육신이란 게 결국은 이렇게 하얀 뼈만 남는 거야.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그리고 곧 내키는 대로 아무 사내하고나 살을 섞는 자유분방한 바람기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평생을 죽음과 벗하며 살아온 그녀가 곧 스러질 육신의 한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덧없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216p)

춘희는 비로소 생전에 점보가 말하던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파리가 눈에 앉아도 눈을 깜빡여 쫓지 못하는 거였고 차가운 비가 내려도 피하지 못하는 거였으며 다리가 아파도 앉아서 쉴 수 없는 거였다. (218p)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271p)

그들은 어느덧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타인의 세계를 훔쳐보는 그 음험한 쾌락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영화를 통해 인생을 이해했으며 영화는 부조리한 실존에 질서를 부여해주었다. (274p)

한때 보잘것없던 산골의 한 소녀였던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 거대한 영화가 눈앞에서 모두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이 점점 따뜻해졌다. 그의 눈앞엔 오래 전 그가 고향의 언덕에서 맞이하던 적막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낙조 속에서 마을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언덕에 바람 한점 불지 않았으며 세상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참으로 아름대운 풍경이었다. (301p)

진실이란 본시 손 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독자 여러분, 이야기는 계속 된다. (4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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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호칭 (마리몬드 리커버 한정판) 문학동네 시인선 18
이은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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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도 문학동네시인선은 늘 예쁘지만, 마리몬드 리커버로 나온 이 시집은 정말 예쁘다. (표지에 홀려서 삼ㅎㅎ)

 

 시를 읽는데 정답이랄 건 없겠지만, 그래도 시를 읽는 방법이란 게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고민해 본다. 시집을 읽을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결론은 없는데, 다만 모든 글에는 작가의 지문이 묻어 있다고 느낄 뿐이다.

 

 이은규 시인의 세계는 하늘, 구름, , 나비, 나무, 꽃과 같은 것이었고, 이 시집은 계절같은 시로 가득차 있다.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이 시집을 두고 "자연을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자연의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장을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122p) 시인은 "나무, 바람, 구름 같은 것들이 나누는 친교의 밀어를 듣는 귀"이고 말이다.(123p)


 책을 읽다 보면 사람은 저마다가 감동받은 구절이나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가끔씩은 모두가 비슷한 부분에서 책 읽기를 멈추고 밑줄을 긋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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