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젠더 수업 창비청소년문고 27
김고연주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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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젠더 수업>은 젠더 전문가인 작가가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묶어 놓은 책이다. 그럼 수업의 주제인 '젠더'는 무엇일까? 젠더gender란 말 자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젠더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여성/남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학자들은 생물학적 성이 아닌 사회, 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성을 따로 '젠더'라고 부르며, 우리말에 명확한 번역어가 없어 영어 단어를 그대로 쓴다.

 

하루에도 열두 번 씩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젠더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남녀 간의 사랑, 여자와 남자의 직업, 우리 가족의 구조, 모성, (어쩌면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한) 외모, 그리고 최근 화두인 여성 혐오 문제까지, 케케묵은 오래된 궁금증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도록 만들어 준다. 어린 동생이나 청소년기 조카가 있다면 당연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내가 청소년 시절 했던 숱한 내 모습에 대한 고민(나는 왜 이렇게 뚱뚱하고 못생겼지?), 가족들과 부딪히고 갈등을 겪으며 했던 생각(아빠와 할아버지는 어떻게 명절에 아무 일도 거들지 않고 저렇게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지?), 엄마와 싸우고 울면서 속으로 삭혔던 질문(엄마는 도대체 나한테 관심이 있긴 한 거야?) 들에 '젠더적 시각'으로 답을 한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이 답답한 질문은 이따금 나를 괴롭히기에 흥미롭게 책을 읽었다. 별로 두껍지 않고, 어려운 내용도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어 한두 시간 만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쉽게 읽었는데 덮고 나니 생각이 많아진다. , 맞아, 그렇지. - 하는 생각이 퐁퐁 떠올라 여운이 남는다.

 

알아도 당장 고치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모르면 영영 불가능하다.


이렇게 성별에 따라 주어지는 틀을 학자들은 '젠더 박스'라고 불러요미국의 법학자 제니퍼 나이는 우리 사회에 눈에 보이지 않는 두 개의 젠더 박스가 있다고 말해요여성은 여성성을남성은 남성성을 지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 박스지요모든 여성과 남성이 각자의 젠더 박스에 깔끔하게 들어맞을 거라고 기대하고요그래서 누군가가 이 젠더 박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경계에 걸쳐 있거나또는 두 개의 젠더 박스에 동시에 들어가 있으면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188p)

결국 비정상적 젠더 관념은 여성과 남성 모두를 괴롭힌다.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는 모두 젠더 박스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그런데 이 탈출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박스가 저절로 사라지지도 않는다아무 천천히오랜 시간을 들여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모두 동의할 때 구시대적 젠더 문법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더라도 당장 실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하지만 외면하면 영영 불가능하다조금씩천천히그러나 분명히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 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 꽤 오래 짝사랑을 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나는 대학에 가면서 스마트폰을 샀다.) 상대방이 읽었는지 알 수도 없는 문자를 조심조심 보내며 답장을 기다렸다. 어떻게든 짝사랑 상대와 한 번 더 마주치고, 뭐라도 이야기하고, 엮이고 싶어 그 앞에서 얼마나 알짱댔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서울 정도로 집착적인 일방적 짝사랑을 하며 내가 인터넷에 주로 검색하던 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 말투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 행동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

 

하나하나 뜯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검색어들이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짝사랑 상대가 좋아하는 스타일/말투/행동'이었고, 그건 인터넷 검색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인데 나는 종종 이런 것들을 공부(!)하고 노트에 하나하나 필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남자들은 동물이나 아기를 좋아하는 여자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동물과 아기를 과하게 좋아하는 척 어필하기도 했다. 다시 생각하니 참 웃기다.

 

그런데 어색한 연기를 했던 나보다 더 웃긴 사실은, 내 연기가 사실 잘 짜인 각본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각본을 따르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님을, 책은 지적하고 있다. 


이성애 연애에는 문화적 문법이라는 것이 있어요. 미국의 사회학자 로스와 슈워츠는 이성애 연애의 문화적 문법을 '연애 각본'이라는 용어로 설명했어요. 배우들이 각본에 따라 대사와 행동을 연기하듯이, 연인들도 연애 각본을 행동 지침으로 삼아 따른다는 뜻이에요. (76p)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동화, 인터넷 소설, 광고, SNS 등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매체는 십중팔구 우리에게 이 '연애 각본'을 주입시킨다. 신데렐라나 백설공주가 잘생기고 능력 있는 왕자를 만나 결국 행복해진다는 전통적 서사부터 시작하여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을 구하는 능력 좋고 박력 있는 남주인공이 나오는 티비 드라마, '남자친구가 홀딱 반할 옷 스타일' 따위의 슬로건을 내건 광고까지.

 

지나치게 획일적이어서 살짝 지겹기까지 한 이 연애 각본은 실제로 많은 여성/남성의 행동을 통제한다. '여자는 조신해야지!' '남자가 박력이 있어야지!'와 같은 각본의 인물 설정을 거부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람이 열 명이면 열 가지의 취향이, 백 명이면 백 가지의 취향이 있으며 개개인은 모두 저마다의 개성이 있다는 당연한 명제는 언제부터인가 색이 바래 잊혀 버렸다.


연애는 굉장히 치열하고 어려운 인간관계랍니다. 실제의 연애는 낭만적인 면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면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연애를 하고, 또 이별을 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며 훌쩍 성장하게 되지요.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면, 또는 앞으로 연애를 한다면 연애 각본은 조금만 활용하기로 해요. 누구나 똑같이 하는 연애가 아니라 나만의 색깔로 더욱 충만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러려면 무엇보다 상대방과 솔직하게 소통해야 한다는 것 잊지 마세요! (88p)

 

책을 읽고 나자, 평소에 내가 꼽는 '이상형'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됐다. 내가 그리던 이상적 연애 상대에 과연 내 취향은 얼만큼 반영되어 있을까? 내가 내 취향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이, 사실 연애 각본 속 완벽한 주인공의 모습인 건 아닐까? 

 


 

집착적 짝사랑을 마무리하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부모님의 품을 벗어나 상경하던 스무 살, 처음 한강을 건너던 때의 간질간질하고 벅찬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숙사 방 몇 개를 거쳐 마침내 서울에 내 몸 뉠 방 한 칸이 생겼을 때에는 참 묘했다. '서울 사람 다 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혼자 '서울 콤플렉스'라고 명명하던 것이 천천히 희미해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센티한 감정도 잠시, 나는 곧 가사 노동이라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우선 고백하자면, 나는 화장실이 원래 하얗고 깨끗한 줄 알았다. 물때가 이렇게 쉽게 생길 거라 예상하지 못했고, 곰팡이의 존재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음식을 해 먹으면 설거지가 쌓이는 건 당연하지만, 음식물 쓰레기 처리가 이렇게 번거로울지 몰랐다. 혼자 지내는데 머리카락은 왜 이렇게 많이 떨어지며, 청소기는 돌려도 돌려도 끝이 없고, 빨래는 또 왜 자꾸 쌓이는가.

 

앙드레 고르는 누구나 세 가지 일을 함으로써 보다 행복하고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세 가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생계 노동',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돈을 벌 수 없는 '가사 노동', 그리고 돈을 벌지 못해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자율 노동'을 말해요. 이 세 노동의 균형이 맞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41p)

가끔 퇴근하고 집에 가면 뭐 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집에서 집안일을 한다.

 

생계 노동으로 충분히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오면 밥솥에 밥을 안치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시간이 너무 늦기 전에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돌린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기 전에 건조대에 널린 마른 빨래를 걷어 개고, 새 빨래를 탁탁 털어 잘 넌다. 정기적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고(내가 제일 싫어하는 집안일이다.) 쓰레기 배출일에 맞춰 일반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린다그리고 또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집안일. 해도 아무런 티가 나지 않지만, 안 하면 바로 티가 나는 이 집안일! 지긋지긋한 생활 노동에 지쳐 자율 노동이고 뭐고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때쯤 엄마를 떠올렸다. 우리 엄마는 언제 일하면서 동시에 이 많은 집안일을 다 했지?


많은 여성이 사회에서 일하고 있지만, 가정이 여성의 공간이고 사회는 남성의 공간이라는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이를 학자들은 어려운 말로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남성은 돈을 벌어서 나머지 가족들의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은 남성이 돈을 잘 벌어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모델입니다. (135p)

내가 자연스럽게 '가사 노동=엄마'를 떠올렸을 때, 나는 이미 이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델은 아주 오랜 시간 사회에 지배적으로 자리 잡았다. 성별에 따라 역할과 공간을 분담한, 얼핏 공평해 보이지만 "남성은 중요하고 가치 있는 바깥일을, 여성은 사소하고 가치 없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불공평한 모델인데도 말이다. (135)

 

아내도 아내가 필요하다고 한다. 맞벌이는 당연하지만 '맞살림'은 당연하지 않은 현실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여성인 내가 너무 '자기들 편'을 들어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실제로 작가도 여성이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불행하게 만든다.

 

나는 실제로 내 아버지와 많은 갈등을 겪었다. 똑같이 맞벌이를 하면서 가사 분담에는 극도로 무신경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생계 노동과 가사 노동에 이중으로 시달리는데, 그런 어머니 모습에 딸인 나로서는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내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중재에 나섰는데,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얼마나 많은 부담감과 책임감을 안고 계시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는 완벽한 가부장 사회에서 성장하며 전형적인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을 학습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니 외벌이로는 도저히 두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만 여전히 가장은 아버지 자신이며,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 모두를 당신께서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여 생기는 좌절감, 당신이 학습한 아버지상과 자식들이 학습한 아버지상의 차이에서 오는 모순 등이 아버지를 끝없이 짓누르고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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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 어쩐지 의기양양 도대체 씨의 띄엄띄엄 인생 기술
도대체 지음 / 예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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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서 혼자라도 박수치고 와야겠다. 내가 고생한 걸 나는 아니까.

도대체 작가의 에세이,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를 읽었다'행복한 고구마' 짤로 더 익숙한 작가님인삼밭에 낀 행복한 고구마 이야기인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봤었다. 읽으려고 보니 이 작가님 책이더라.


대충 그린 것 같은데 섬세하고 귀여운 그림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실 책을 읽는다기보다 작가의 트위터를 천천히 구경하는 것 같았다. 별로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아서 한시간 정도면 가볍게 쭉 훑을 수 있다.

 

누구나 삶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게 될 때가 있다.

지난 늦여름, 상처 많은 복숭아를 떨이로 샀었다. 시장 좌판에 진열된 크고 맛있어 보이는 비싼 복숭아 대신, 싸지만 상처가 많아 바로 먹어 치워야하는 복숭아. 비닐봉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집에 오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 상처많은 존재는 가치까지 절하되는 걸까?

 

내가 상처많은 복숭아를 보며 생각에 잠기듯, 이렇게 누구나 살면서 깊든 얕든 마주하는 세세한 순간을 담은 책이다. 다만 억지 위로, 억지 힐링을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런 일상 에세이를 읽으면 '나는 어떤 어려움을 겪고 위기에 처했지만, 비관하지 않고 노력에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마침내! 결국! 모두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가 참 많다. 해봤자 도움도 안되는 뻔한 말들만 늘어놓기도 한다. 그런 책은 읽다가 지치고, 지루해서 금방 덮게 된다.

 

도대체 작가님이 하려는 말은 '어차피 다들 힘들고, 삶이란 늘 암울한거야' 라는 절망적이고 단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너도 힘들지. 그래 알아.'라는 담담한 위로가 담겨있다. 작가님은 아닌 척 하지만, 사색을 즐기고 생각이 참 많은 사람 같다.

나가서 혼자라도 박수치고 와야겠다. 내가 고생한 걸 나는 아니까.

강하다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라 거부할 줄 아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한없이 슬퍼할 자유도 없는 월급쟁이의 비애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일상의 힘이라 믿는다.

그런데 시트엔 나이테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옹이가 그려져 있었다. 톱밥을 눌러 만든 MDF는 진짜 원목을 흉내 내기 위해 일부러 원목의 흠집인 옹이까지 따라 한 것이다.
‘진짜엔 흠이 있구나.‘

나는 겨울이란 계절을 아직 백 번도 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애송이지."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는 서툰 신세, 낯선 환경이라도 그것은 새순처럼 나의 일부일 뿐, 그 끝엔 수십 년 살아온 ‘내가‘ 버티고 있다는 걸 떠올리면 불안한 마음이 조금 사라지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보았다.

맥주가 제일입니다
맥주가 제일이라고요

그러다 시간이 더 지난 어느 날이었다. 처음으로 아기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식을 모친에게 전하니 원래 웃는 건 좀 더 커야 가능하단다. 아, 혹시 인생의 기본값은 원래 우는 것인데, 좀 더 자라 뭘 좀 알게 되면 웃을 수 있게 되는 거였나.
누구나 울면서 살기 시작하지만, 결국은 웃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 생이 다할 때까지 살아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틈틈이 웃을 수 있다. 그리고 웃음은 삶의 기본값이 아니기에, 우리는 웃기 위해 약간의 수고를 주고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지는 목련을 흉보지만 나는 목련 편이다. 꽃도 사람도 질 때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밤 내가 서러운 일로 목 놓아 울고 있던 순간에도, 누군가는 내 방의 불빛을 보며 위로받았을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게 반짝이는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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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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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캐나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 같은 작가가 드라마 대본으로 쓰기도 했다. 주제가 주제인지라 추리 소설을 기대했는데, 그보다는 심리 소설이나 여성 소설에 더 가까웠다.




주인공 그레이스 막스는 하녀로 일하던 집 주인인 토머스 키니어와 그 집의 가정부 낸시 몽고메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공범인 제임스 맥더못은 사형을 선고받아 종신형에 처했으나 그녀는 아직 어리고 아름답고 어딘가 부족하여 어리숙하다는 이유로 감면받아 종신형을 받는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이야기는 그레이스의 정신 질환에 관심을 갖던 사이먼 조던 박사가 그녀를 찾아오며 시작된다. 조던 박사는 그레이스가 정신 병원에 있던 전적, 살인 사건에 대한 진술을 두 번이나 번복한 점, 특히 살인 당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점 등을 근거로 그녀의 무의식 속에 망각된 채 묻혀있는 기억을 꺼내고자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그녀와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묻는다. 그레이스는 기억을 더듬어 처음 아일랜드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왔을 때부터 끔찍한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 자신이 겪은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한다그녀는 과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일까, 아니면 순진무구한 피해자일까?



마거릿 애트우드는 페미니즘 작가로도 평가받는데실제로  책은 단순히 살인 '사건'보다  이면에 얽힌 그레이스( 그녀를 비롯한 당대 모든 여성)의 삶그들이 일상적으로 받던 억압당대 성차별적 현실을 꼬집는다

장르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출판사에서 홍보하는 데 홀딱 넘어가서 빌려봤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훨씬 쉽게, 훨씬 재미있게 읽었으나 전달하는 바가 꽤 묵직하여 여기저기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표지가 바뀌며 새 개정판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는 이전 판으로 읽었다. 1, 2권으로 나누어져 있어 읽는 데 오래 걸리리라 생각했으나 책이 재미있어 술술 금방 읽었다. 

중간이 중요하다. 그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어쩌면 정신병 환자는 열이 나거나 몽유병에 걸렸거나 특정 약물을 복용했을 때 그런 것처럼, 이런 연상 작용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는 선을 넘나드는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 (1권, 92p)

하지만 그 밑에 또 다른 느낌이 숨어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예의 주시하는 듯한 느낌이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손으로 얼굴을 덮는 기분이 들어 화들짝 눈을 뜨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일어나 앉았는데 아무도 없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리고 그 밑에 또 다른 느낌이 숨어 있다. 이번에는 내가 열리는 느낌이다. 육신이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열리는 것이 아니라 복숭아, 그것도 심지어 너무 익어서 저절로 갈라지는 복숭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그 복숭아 속에는 씨가 들어 있다. (1권, 105p)

나는 가진 게 별로 없다. 소지품도 없고, 재산도 없고, 사생활이고 뭐고도 없다. 그러니 내 몫으로 뭐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권, 151p)

다들 그렇게 솜털이 보송보송했고, 진실과 마주치더라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1권, 152p)

뱃길과 감옥은 어쩌면 우리가 모두 육체이고, 모든 육체는 풀이며, 그래서 약하다는 걸 일깨워 주는 하느님의 도구일지 몰라요. (1권, 174p)

누비이불에 대한 이런 상념들은 감옥에 갇힌 뒤에 한 거예요. 이곳은 생각할 시간은 많고, 생각을 들어 주는 사람은 없는 곳이라 자꾸 혼잣말을 하게 돼요. (1권, 236p)

그레이스, 난 당신이 하는 이야기에는 뭐든 관심 있어요. 그가 말한다. 인생의 사소한 부분에 종종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기도 하거든요. (1권, 237p)

도련님은 방탕한 길로 빠져들었는데, 다 자기 잘못이었어요. 대접을 너무 잘 받으면 자기가 그럴 만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거든요. (1권, 249p)

실제로 결정타를 날린 사람이 진짜 살인범이 아닌 경우도 있잖아요. 메리는 이름 모를 도련님 손에 죽은 거예요. 그자가 칼을 들고 메리를 찌른 거나 다름없었어요. (1권, 259p)

아가씨, 한 번도 해 본 적 없기 때문에 해야 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내가 말했다. (2권, 24p)

내 손금에 재앙이 새겨져 있다. 나는 재앙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 어딜 가든 그걸 몰고 다닌다. 그가 내 몸에 손을 댔을 때 불운이 그에게로 옮겨 갔다. (2권, 98p)

그러다 눈이 번쩍 뜨이면서 주님이 이 집을 찾아 오셨고, 이것이 천국을 감싸고 있는 은빛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님은 어디에든 계시니 막을 수 없고, 주님은 모든 것의 일부분이라 아무리 담을 쌓고 사방에 벽을 세우고 문을 달고 창문을 닫아도 공기를 가르듯 걸어 들어오실 수 있으니 이 집에도 찾아오신 거죠.
제가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하고 물어도 주님은 아무 대답 없이 계속 은빛으로 계셨어요. 그래서 저는 소젖을 짜러 밖으로 나갔죠. 주님은 말린다고 듣거나 이유를 알려 주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거든요. 주님 앞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런 건 있어도 왜냐하면, 이런 건 없잖아요. (2권, 125-126p)

저는 주님이 어디에든 계시니 부엌에도 있고, 맥더못 안에도 있고, 그의 손 안에도 있고, 도끼에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권, 127p)

그녀의 입에 낚시바늘은 넣어 두었는데 과연 그걸 꺼낼 수 있을까? 심연 속에서 빛이 있는 곳을 향해 위로, 깊고 푸른 바다를 벗어나.
그는 스스로 왜 이렇게 격한 표현을 쓰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그녀가 잘 되길 바란다. 그것을 일종의 구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까? 만약 숨기고 싶은 게 있으면 물속에, 어둠 속에, 그녀의 영역 속에 머무르고 싶을지 모른다. 밖으로 나가면 숨을 쉴 수 없을 거라고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2권, 135p)

그러다 하늘 전체가 종이처럼 얇은 표면으로 바뀌더니 불에 그슬려 조금씩 사라지지 뭐예요. 그 뒤로 나타난 것은 차가운 암흑이었어요. 제가 쳐다보고 있던 그곳은 천국도 아니고 심지어 지옥도 아니고 그저 빈 공간이었어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무서운 일이라 저는 속으로 주님께 제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나를 용서해 주실 주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하나 싶더라고요. 그때 문득 저곳이 주님이 안 계신 곳, 사람들이 울며 이를 간다는 바깥 어두운 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돌을 던졌을 때 물이 그러는 것처럼 하늘이 다시 닫혔어요. 그리고 다시 별들로 가득한, 매끈하고 온전한 하늘이 되었죠. (2권, 152p)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 가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집합체일 수도 있지요." 사이먼이 말한다. (2권, 250-251p)

불완전한 것이 우리의 낙원이다. - 윌리스 스티브스, <우리 풍토의 시>(1938) (2권, 294p)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여도 불편했던 걸 보면 편안함이라는 것은 익숙함인가 봐요. (2권, 297p)

이 퀼트 패턴은 이름이 ‘천국의 나무‘인데,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참 똑똑한 여자였던 것 같아요. 성서에서는 ‘나무들‘이라고 하지 않아요. ‘생명의 나무‘와 ‘선악과나무‘, 이렇게 두 개의 다른 나무가 있다고만 하죠.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나무가 한 그루뿐이고 생명나무 열매와 선악과가 같은 거예요. 그리고 그걸 먹으면 죽지만, 먹지 않아도 죽긴 마찬가지예요. 그걸 먹으면 좀 더 유식해져서 죽는 거죠.
그런 식이 되어야 인생살이와 더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2권, 3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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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책세상총서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책세상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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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듣고 싶었던 수업 교재였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수업은 못 듣고 책만 빌려 읽게 되었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에 대해 성찰한 여러 내용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인데, 서론에서 자기 자신은 이론에 있어 일말의 야심도 없음을 밝힌다.

 

소설 자체, 소설가, 유럽 소설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 인터뷰, 수상소감 등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작가의 작품과 자기 자신의 작품을 모두 아우르며 그는 소설이란 실제가 아닌 '실존'을 탐구하는 것이라 말한다. 실존과 실제는 조금 다른 개념인데, 실존이 의미하는 바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전부라고 지적한다


소설은 유머의 정신에서 탄생한, 실존의 중대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의 한 형식이라고.

 

소설의 언어는 철학이나 여타 다른 학문의 언어와는 상이하며, 작가 자신은 그저 실무자일 뿐이라 이야기하지만 "실무자""이론적 성찰"이 눈길을 끈다. 읽으면서 곱씹게 만드는 구절이 참 많다.

 

책을 읽을 때, 저마다 좋아하는 장르를 더 찾아 읽기 마련이다. 나는 문학, 특히 소설을 좋아해서 이 분야 위주로 편독하는 편이다. 누군가 내게 '결국 꾸며낸 이야기일 뿐인 소설'을 왜 읽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쿤데라가 대신 답해준다. 소설에는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소설의 지혜'가 존재한다. 단순히 허구적 서사를 전달하는 것 너머, 소설이 내포하는 본래적 가치를 생각해본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 했던 책. 번역이 살짝 아쉬웠으나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철학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전체로서의 세계)를 풀어야 할 의문의 대상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세계를 의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러저러한 실제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앎에의 열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13p)

지식이 진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세계와 자기, 자신의 총체성을 잃어버렸고, 이리하여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존재의 망각‘이라는, 멋지면서도 거의 마술적인 표현 속으로 함몰되었다. (14p)

힘의 공격성은 완전히 제멋대로이고 아무런 동기도 없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원한다. 그것은 비합리적 순수이다. (21p)

그러나 반대로 이 소설가들은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종말적 역설이라는 상황 속에서 모든 실존적 범주들이 어떻게 돌연히 그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23p)

실제로는 자신이 불구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그는 사랑의 모험을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인식할 수 없었던 겁니다. 행위와 그의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이죠. 사람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 모습이 전혀 그를 닮지 않은 것입니다. 이 같은 행동의 역설적인 성격이야말로 이 소설의 위대한 발견입니다. (36p)

삶이 덫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항상 알고 있었던 것이죠. 사람은 원하지 않았음에도 태어났고 스스로 택하지 않은 육체에 갇혀 있다가 결국 죽게 되지요. 그러나 세상이라는 공간은 영원한 탈출의 가능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40p)

이런 식으로 하면 데모크리토스Demokritos는 4억의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고 브람스Johannes Brahms는 10억, 곰브로비치 자신은 20억 인류를 대표하는 게 되지요. 이러한 산술적 관점에서 본다면 프루스트적 무한함의 무게, 자아의 무게, 자아의 내면적 삶의 무게는 점점 더 가벼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벼움으로의 경주 속에서 우리는 숙명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죠. (41p)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만일 자신의 코가 매일 1밀리미터씩 길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될까? 그리고 만일 그녀의 얼굴이 더 이상 테레사와 닮지 않았다면, 그래도 테레사는 여전히 테레사일까?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가 나일까 하는 생각들이죠. 당신도 보시다시피 영혼의 무한한 불가사의 앞에는 놀라울 것이라곤 없습니다. 놀라움은 차라리 자아와 그 정체성의 불확실성 앞에 있는 것이죠. (43p)

소설의 인물은 살아 있는 존재의 모방이 아니에요. 그건 상상적 존재이지요. 실험적 자아이고요. 이렇게 하여 소설은 그 시작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돈 키호테는 거의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보다 더 생생한 인물이 누가 있습니까? 제 말뜻을 잘 이해하세요. 저는 독자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욕망, 즉 소설의 상상적 세계에 실려 간혹 그성르 실제와 혼동하고 싶은, 소박한 만큼이나 정당한 욕망을 비웃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에 심리적 리얼리즘의 기법이 필수 불가결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네 살에 처음으로 <<성Das Schloss>>을 읽었죠. 그리고 그 시절 저는 저희 집 가까이 살던 한 아이스하키 선수를 숭배했었습니다. 전 그의 인상을 통해 K.의 모습을 상상했었죠. 오늘날까지도 그의 모습은 이런 식으로 떠오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은 자동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보완하게 된다는 겁니다. 토마스는 금발입니까, 갈색머리입니까? 그의 아버지는 부자였나요, 가난했나요? 당신 스스로 선택하세요! (48-49p)

샐먼_당신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를 알아야 하나요?
쿤데라_아녜요.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은 소설이 직접 말해줍니다. (55p)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존이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영역이지요. 그것은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것,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소설가들은 인간의 이러저러한 가능성들을 찾아냄으로써 ‘실존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죠. 그러나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안에-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물과 그의 세계를 ‘가능성‘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겁니다. (59p)

이런 게 소설이냐고요? 제 생각으로는 소설이지요. 소설이란 상상적 인물을 통해 관찰된 실존에 대한 성찰이니까요. (105p)

(나는 동의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각각의 단어는 각기 특유한 뜻을 지니는 것으로서 의미론적으로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158p)

카프가 연구가들은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다가 카프카를 죽여버렸다. (160p)

소설_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대한 주제의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의 형식. (162p)

예컨대 베토벤의 <살리에리에 대한 변주곡>같이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은 작품은 정말 보잘것없지만 그것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이다. (170p)

활자_사람들은 점점 더 작은 활자로 책을 만든다. 나는 문학의 종말을 이렇게 상상해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활자가 조금씩 조금씩 작아져서 나중에는 아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버리는 것. (178p)

희극_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한다. 희극은 이보다 혹독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나는 모든 인간적 사실들에는 희극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지각되고 알려지고 이용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장막에 가려지기도 한다. 희극의 진정한 천재는 우리를 많이 웃기는 사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던 희극의 영역을 들추어내는 사람이다. 역사는 언제나 진지한 분야로만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희극도 있는 법이다. 섹스에도 희극이 있듯이. (179p)

차라리 저는 톨스토이가 작품을 쓰는 동안에 윤리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인 신념의 소리 이외의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제가 즐겨 소설의 지혜라고 무르는 것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소설가들은 개인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이 지혜의 소리를 경청합니다. 이것은 위대한 소설들이란 항상 그 작가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자신의 작품보다 더 현명한 소설가들이라면 그들은 아마 직업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184-185p)

소설의 지혜는 철학의 지혜와는 다릅니다. 소설은 이론적 정신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유머의 정신에서 탄생합니다. (1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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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의 맛
앵무 지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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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되던 웹툰 <초년의 맛>을 창비에서 단행본으로 엮었다. 웹툰은 못봤고, 단행본으로만 보게 되었다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초년생들의 이야기를 음식과 엮어 만든 에피소드들로, 옴니버스식 구성의 책. 주인공은 대학생, 취준생, 고시생, 군인, 알바생, 회사원 등 20대 초중반의 사회초년생들이다.

 

만화책은 후루룩 금방 읽게 되더라. 그리고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초년생인 나에게 거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남일 같지 않아서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었다.


개인적으로 지방에서 상경한 청년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는데, 고향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반찬을 열어보는 장면이나 원룸 월세 때문에 부모님이랑 통화하는 장면들이 인상깊었다. 아마 내 상황이랑 비슷해서 그랬나 보다.

 

나도, 가끔 부모님 댁에 내려가면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 가방이 그득하다. 가방 무거워지니 반찬은 그냥 사먹으면 그만인데, 자꾸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어하신다. 특히 김치 같은 건 아무리 꽁꽁 싸매도 냄새가 나기 마련이라 별로 안 들고 오고 싶은데 말이다.

 



"어떤 순간은 혀로 기억된다"

이따금 달고, 대부분은 쓴 게 초년생들의 '인생의 맛'이 아닐까어른이라고 하기에 어딘가 약간 부족하고, 그렇다고 마냥 어린애도 아닌. 모든 일이 서툴고 어색하지만 투정부릴 수도, 쉽게 티낼 수도 없는 초년생들.

 

누군가에겐 그냥 킬링타임용 만화책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이에겐 위로가 될 수도 있겠더라. 나를 포함한 모든 초년생이 다 같이 힘냈으면.

 

, 책은 기본적으로 흑백인데 음식 그림에만 색을 입히셨더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도 신기하지만, 특히 음식 그림을 먹음직스럽게 그려내는 사람들은 참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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