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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1843년 캐나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 같은 작가가 드라마 대본으로 쓰기도 했다. 주제가 주제인지라 추리 소설을 기대했는데, 그보다는 심리 소설이나
여성 소설에 더 가까웠다.
주인공 그레이스 막스는 하녀로 일하던 집 주인인 토머스
키니어와 그 집의 가정부 낸시 몽고메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공범인 제임스 맥더못은 사형을 선고받아 종신형에 처했으나
그녀는 아직 어리고 아름답고 어딘가 부족하여 어리숙하다는 이유로 감면받아 종신형을 받는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이야기는 그레이스의 정신 질환에 관심을 갖던 사이먼 조던
박사가 그녀를 찾아오며 시작된다. 조던 박사는 그레이스가 정신 병원에 있던 전적, 살인 사건에 대한 진술을 두 번이나 번복한 점, 특히 살인 당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점 등을 근거로 그녀의 무의식 속에 망각된 채 묻혀있는 기억을 꺼내고자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그녀와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묻는다. 그레이스는 기억을 더듬어 처음 아일랜드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왔을 때부터
끔찍한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 자신이 겪은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한다. 그녀는 과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일까, 아니면 순진무구한 피해자일까?
마거릿 애트우드는 페미니즘 작가로도 평가받는데, 실제로 이 책은 단순히 살인 '사건'보다 그 이면에 얽힌 그레이스(와 그녀를 비롯한 당대 모든 여성)의 삶, 그들이 일상적으로 받던 억압, 당대 성차별적 현실을 꼬집는다.
장르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출판사에서 홍보하는 데 홀딱 넘어가서 빌려봤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훨씬 쉽게, 훨씬 재미있게 읽었으나 전달하는 바가 꽤 묵직하여 여기저기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표지가 바뀌며 새 개정판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는 이전 판으로 읽었다. 1, 2권으로 나누어져 있어 읽는 데 오래 걸리리라 생각했으나 책이 재미있어 술술 금방 읽었다.
중간이 중요하다. 그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어쩌면 정신병 환자는 열이 나거나 몽유병에 걸렸거나 특정 약물을 복용했을 때 그런 것처럼, 이런 연상 작용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는 선을 넘나드는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 (1권, 92p)
하지만 그 밑에 또 다른 느낌이 숨어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예의 주시하는 듯한 느낌이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손으로 얼굴을 덮는 기분이 들어 화들짝 눈을 뜨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일어나 앉았는데 아무도 없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리고 그 밑에 또 다른 느낌이 숨어 있다. 이번에는 내가 열리는 느낌이다. 육신이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열리는 것이 아니라 복숭아, 그것도 심지어 너무 익어서 저절로 갈라지는 복숭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그 복숭아 속에는 씨가 들어 있다. (1권, 105p)
나는 가진 게 별로 없다. 소지품도 없고, 재산도 없고, 사생활이고 뭐고도 없다. 그러니 내 몫으로 뭐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권, 151p)
다들 그렇게 솜털이 보송보송했고, 진실과 마주치더라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1권, 152p)
뱃길과 감옥은 어쩌면 우리가 모두 육체이고, 모든 육체는 풀이며, 그래서 약하다는 걸 일깨워 주는 하느님의 도구일지 몰라요. (1권, 174p)
누비이불에 대한 이런 상념들은 감옥에 갇힌 뒤에 한 거예요. 이곳은 생각할 시간은 많고, 생각을 들어 주는 사람은 없는 곳이라 자꾸 혼잣말을 하게 돼요. (1권, 236p)
그레이스, 난 당신이 하는 이야기에는 뭐든 관심 있어요. 그가 말한다. 인생의 사소한 부분에 종종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기도 하거든요. (1권, 237p)
도련님은 방탕한 길로 빠져들었는데, 다 자기 잘못이었어요. 대접을 너무 잘 받으면 자기가 그럴 만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거든요. (1권, 249p)
실제로 결정타를 날린 사람이 진짜 살인범이 아닌 경우도 있잖아요. 메리는 이름 모를 도련님 손에 죽은 거예요. 그자가 칼을 들고 메리를 찌른 거나 다름없었어요. (1권, 259p)
아가씨, 한 번도 해 본 적 없기 때문에 해야 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내가 말했다. (2권, 24p)
내 손금에 재앙이 새겨져 있다. 나는 재앙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 어딜 가든 그걸 몰고 다닌다. 그가 내 몸에 손을 댔을 때 불운이 그에게로 옮겨 갔다. (2권, 98p)
그러다 눈이 번쩍 뜨이면서 주님이 이 집을 찾아 오셨고, 이것이 천국을 감싸고 있는 은빛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님은 어디에든 계시니 막을 수 없고, 주님은 모든 것의 일부분이라 아무리 담을 쌓고 사방에 벽을 세우고 문을 달고 창문을 닫아도 공기를 가르듯 걸어 들어오실 수 있으니 이 집에도 찾아오신 거죠. 제가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하고 물어도 주님은 아무 대답 없이 계속 은빛으로 계셨어요. 그래서 저는 소젖을 짜러 밖으로 나갔죠. 주님은 말린다고 듣거나 이유를 알려 주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거든요. 주님 앞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런 건 있어도 왜냐하면, 이런 건 없잖아요. (2권, 125-126p)
저는 주님이 어디에든 계시니 부엌에도 있고, 맥더못 안에도 있고, 그의 손 안에도 있고, 도끼에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권, 127p)
그녀의 입에 낚시바늘은 넣어 두었는데 과연 그걸 꺼낼 수 있을까? 심연 속에서 빛이 있는 곳을 향해 위로, 깊고 푸른 바다를 벗어나. 그는 스스로 왜 이렇게 격한 표현을 쓰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그녀가 잘 되길 바란다. 그것을 일종의 구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까? 만약 숨기고 싶은 게 있으면 물속에, 어둠 속에, 그녀의 영역 속에 머무르고 싶을지 모른다. 밖으로 나가면 숨을 쉴 수 없을 거라고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2권, 135p)
그러다 하늘 전체가 종이처럼 얇은 표면으로 바뀌더니 불에 그슬려 조금씩 사라지지 뭐예요. 그 뒤로 나타난 것은 차가운 암흑이었어요. 제가 쳐다보고 있던 그곳은 천국도 아니고 심지어 지옥도 아니고 그저 빈 공간이었어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무서운 일이라 저는 속으로 주님께 제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나를 용서해 주실 주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하나 싶더라고요. 그때 문득 저곳이 주님이 안 계신 곳, 사람들이 울며 이를 간다는 바깥 어두운 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돌을 던졌을 때 물이 그러는 것처럼 하늘이 다시 닫혔어요. 그리고 다시 별들로 가득한, 매끈하고 온전한 하늘이 되었죠. (2권, 152p)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 가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집합체일 수도 있지요." 사이먼이 말한다. (2권, 250-251p)
불완전한 것이 우리의 낙원이다. - 윌리스 스티브스, <우리 풍토의 시>(1938) (2권, 294p)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여도 불편했던 걸 보면 편안함이라는 것은 익숙함인가 봐요. (2권, 297p)
이 퀼트 패턴은 이름이 ‘천국의 나무‘인데,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참 똑똑한 여자였던 것 같아요. 성서에서는 ‘나무들‘이라고 하지 않아요. ‘생명의 나무‘와 ‘선악과나무‘, 이렇게 두 개의 다른 나무가 있다고만 하죠.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나무가 한 그루뿐이고 생명나무 열매와 선악과가 같은 거예요. 그리고 그걸 먹으면 죽지만, 먹지 않아도 죽긴 마찬가지예요. 그걸 먹으면 좀 더 유식해져서 죽는 거죠. 그런 식이 되어야 인생살이와 더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2권, 3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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