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기술 책세상총서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책세상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듣고 싶었던 수업 교재였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수업은 못 듣고 책만 빌려 읽게 되었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에 대해 성찰한 여러 내용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인데, 서론에서 자기 자신은 이론에 있어 일말의 야심도 없음을 밝힌다.

 

소설 자체, 소설가, 유럽 소설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 인터뷰, 수상소감 등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작가의 작품과 자기 자신의 작품을 모두 아우르며 그는 소설이란 실제가 아닌 '실존'을 탐구하는 것이라 말한다. 실존과 실제는 조금 다른 개념인데, 실존이 의미하는 바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전부라고 지적한다


소설은 유머의 정신에서 탄생한, 실존의 중대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의 한 형식이라고.

 

소설의 언어는 철학이나 여타 다른 학문의 언어와는 상이하며, 작가 자신은 그저 실무자일 뿐이라 이야기하지만 "실무자""이론적 성찰"이 눈길을 끈다. 읽으면서 곱씹게 만드는 구절이 참 많다.

 

책을 읽을 때, 저마다 좋아하는 장르를 더 찾아 읽기 마련이다. 나는 문학, 특히 소설을 좋아해서 이 분야 위주로 편독하는 편이다. 누군가 내게 '결국 꾸며낸 이야기일 뿐인 소설'을 왜 읽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쿤데라가 대신 답해준다. 소설에는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소설의 지혜'가 존재한다. 단순히 허구적 서사를 전달하는 것 너머, 소설이 내포하는 본래적 가치를 생각해본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 했던 책. 번역이 살짝 아쉬웠으나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철학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전체로서의 세계)를 풀어야 할 의문의 대상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세계를 의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러저러한 실제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앎에의 열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13p)

지식이 진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세계와 자기, 자신의 총체성을 잃어버렸고, 이리하여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존재의 망각‘이라는, 멋지면서도 거의 마술적인 표현 속으로 함몰되었다. (14p)

힘의 공격성은 완전히 제멋대로이고 아무런 동기도 없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원한다. 그것은 비합리적 순수이다. (21p)

그러나 반대로 이 소설가들은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종말적 역설이라는 상황 속에서 모든 실존적 범주들이 어떻게 돌연히 그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23p)

실제로는 자신이 불구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그는 사랑의 모험을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인식할 수 없었던 겁니다. 행위와 그의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이죠. 사람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 모습이 전혀 그를 닮지 않은 것입니다. 이 같은 행동의 역설적인 성격이야말로 이 소설의 위대한 발견입니다. (36p)

삶이 덫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항상 알고 있었던 것이죠. 사람은 원하지 않았음에도 태어났고 스스로 택하지 않은 육체에 갇혀 있다가 결국 죽게 되지요. 그러나 세상이라는 공간은 영원한 탈출의 가능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40p)

이런 식으로 하면 데모크리토스Demokritos는 4억의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고 브람스Johannes Brahms는 10억, 곰브로비치 자신은 20억 인류를 대표하는 게 되지요. 이러한 산술적 관점에서 본다면 프루스트적 무한함의 무게, 자아의 무게, 자아의 내면적 삶의 무게는 점점 더 가벼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벼움으로의 경주 속에서 우리는 숙명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죠. (41p)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만일 자신의 코가 매일 1밀리미터씩 길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될까? 그리고 만일 그녀의 얼굴이 더 이상 테레사와 닮지 않았다면, 그래도 테레사는 여전히 테레사일까?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가 나일까 하는 생각들이죠. 당신도 보시다시피 영혼의 무한한 불가사의 앞에는 놀라울 것이라곤 없습니다. 놀라움은 차라리 자아와 그 정체성의 불확실성 앞에 있는 것이죠. (43p)

소설의 인물은 살아 있는 존재의 모방이 아니에요. 그건 상상적 존재이지요. 실험적 자아이고요. 이렇게 하여 소설은 그 시작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돈 키호테는 거의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보다 더 생생한 인물이 누가 있습니까? 제 말뜻을 잘 이해하세요. 저는 독자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욕망, 즉 소설의 상상적 세계에 실려 간혹 그성르 실제와 혼동하고 싶은, 소박한 만큼이나 정당한 욕망을 비웃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에 심리적 리얼리즘의 기법이 필수 불가결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네 살에 처음으로 <<성Das Schloss>>을 읽었죠. 그리고 그 시절 저는 저희 집 가까이 살던 한 아이스하키 선수를 숭배했었습니다. 전 그의 인상을 통해 K.의 모습을 상상했었죠. 오늘날까지도 그의 모습은 이런 식으로 떠오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은 자동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보완하게 된다는 겁니다. 토마스는 금발입니까, 갈색머리입니까? 그의 아버지는 부자였나요, 가난했나요? 당신 스스로 선택하세요! (48-49p)

샐먼_당신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를 알아야 하나요?
쿤데라_아녜요.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은 소설이 직접 말해줍니다. (55p)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존이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영역이지요. 그것은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것,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소설가들은 인간의 이러저러한 가능성들을 찾아냄으로써 ‘실존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죠. 그러나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안에-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물과 그의 세계를 ‘가능성‘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겁니다. (59p)

이런 게 소설이냐고요? 제 생각으로는 소설이지요. 소설이란 상상적 인물을 통해 관찰된 실존에 대한 성찰이니까요. (105p)

(나는 동의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각각의 단어는 각기 특유한 뜻을 지니는 것으로서 의미론적으로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158p)

카프가 연구가들은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다가 카프카를 죽여버렸다. (160p)

소설_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대한 주제의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의 형식. (162p)

예컨대 베토벤의 <살리에리에 대한 변주곡>같이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은 작품은 정말 보잘것없지만 그것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이다. (170p)

활자_사람들은 점점 더 작은 활자로 책을 만든다. 나는 문학의 종말을 이렇게 상상해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활자가 조금씩 조금씩 작아져서 나중에는 아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버리는 것. (178p)

희극_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한다. 희극은 이보다 혹독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나는 모든 인간적 사실들에는 희극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지각되고 알려지고 이용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장막에 가려지기도 한다. 희극의 진정한 천재는 우리를 많이 웃기는 사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던 희극의 영역을 들추어내는 사람이다. 역사는 언제나 진지한 분야로만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희극도 있는 법이다. 섹스에도 희극이 있듯이. (179p)

차라리 저는 톨스토이가 작품을 쓰는 동안에 윤리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인 신념의 소리 이외의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제가 즐겨 소설의 지혜라고 무르는 것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소설가들은 개인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이 지혜의 소리를 경청합니다. 이것은 위대한 소설들이란 항상 그 작가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자신의 작품보다 더 현명한 소설가들이라면 그들은 아마 직업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184-185p)

소설의 지혜는 철학의 지혜와는 다릅니다. 소설은 이론적 정신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유머의 정신에서 탄생합니다. (1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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