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을 위하여
홍윤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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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의자가 없어지고 나서 이정록의 시 <의자>를 이해했던 적이 있다.
이사를 하는 날이었는데, 어디 한군데 앉질 못하고 종일 서 있어보니까 의자가 정말 간절해졌다. 좀 앉고 싶다, 는 생각을 하는데 퍼뜩 이정록의 <의자> 생각이 났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시간이 지나다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어떤 시구를 내 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들이 종종 온다. 머리도 마음도 아니고, 그냥 몸이다. 
 

돌아갈 내 '방'이 없어지고 나서 홍윤숙 시인의 시를 읽었다.
이 시집을 읽고 나면 유난히 집에 대한 이미지가 오래 남는다. 돌아갈 집. "마음이 텅 비어 쓸쓸한 사람을 위하여 이 세상에 집 한 채 짓고 싶다"던 표제작의 이미지가 오래 남아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갈피를 접어놓았던 시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온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면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면서
늘 무슨 일인가 하고 있다
주고 잃는 것만큼
어디선가 그만큼씩 채워지고 있는
빌수록 가득 차는 지상의 나날
이제 돌아갈 집도 멀지 않으니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온다

"청춘의 또다른 말 방랑 ; 다시는 없을 그 푸르던 날들을 아득히 돌아본다"는 작가의 말이나, 이미 삶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들을 가만 읽고 있으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이 마음이 뭘까,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하나 말을 고르고 골라봐도 잘 모르겠다. 그냥, 속상하다. 나이들어서 약해진 내 가족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평생 내 옆에 있어줄 것 같은 엄마가 제 입으로 "엄마 많이 늙었지"라고 말하는 것 같달까.

돌아갈 '방'이 아닌, 영영 돌아갈 집. 곧 밤이 올 거고,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는 위의 시를 내 몸으로 이해하게 될 날도 머지않아 올 것이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지금이 나에게 가장 좋은 시절이며, 곧 좋았던 시절이 되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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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 눈빛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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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런 장면에서 멈춰 섰다.

해질 무렵, 여전히 볕이 드는 방 안에서 빛이 들어오는 쪽을 향해 편안한 의자를 놓고 앉는다. 완전히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 머문다. 그저 빛을 지켜본다. (......)

햇볕이 잘 드는 큰 교실에서 다양한 매체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서로의 작품에 대해 토론하는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였고, 점차 해가 저물어 실내는 어두워졌다. 하지만 프레드 마틴은 불을 켜지 못하게 했다. 그 세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작품들, 사람들, 공간, 목소리의 어조, 서로의 관계...... 모든 것. 그것은 계시적이었다.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보고 느끼는 사진 속에서 사진의 내용이 되는 질감과 명도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사진가의 섬세함을 기르는 일이다. 음악의 음색, 목소리의 어조, 감정의 느낌, 시의 가락, 떨림의 장단, 동작의 선.

 
천천히 나는 자연이란 비평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가 자연 속에서 느끼는 경외감은 빛, 공간, 질감 그리고 공기의 울림과 관련이 있고, 자연이란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다는 놀라운 발견에 눈을 뜨게 되었다. 행운이란 순간적으로 바위에 드리워진 나뭇가지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빛이 반짝거리는 웅덩이에 둥둥 떠다니는 나뭇잎이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음을 나는 마침내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사물들 간의 위계질서도 점점 희미해져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내용'은 그 모습과 기능 안에 녹아 있었다.

 

어떤, 잘 써진 글은 그 자체로 이미 음악인데. 
감정의 느낌. 목소리의 어조. 떨림의 장단.
그 고유한 리듬들.  

이 책이, 내가 의문시했던 것들에 손을 들어주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를 사로잡는 이미지, 톤, 리듬에 좀더 집중해야겠다는, 그 떨림에 진짜가 있을 거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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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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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이 책은 정말 발을 퉁퉁 붓게 만드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광화문에서 다 읽고 서너 시간 걸어다녔다.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내일이 또 올 거라는 생각에 우울했고 그 내일이 바로 월요일이라는 사실에 참담했고 텅 비어 있는 도심이 무서워서 걷고 또 걸었다.
한강의 소설을 읽고 나면 나와, 내 가족과,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엄마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내가 전화 걸면, 있는 그곳에서 내 전화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한강은 정말 징그럽게도 무시무시하고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지금도 정희와 인주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인주도, 삼촌도, 인주의 엄마도 이제는 세상에 없다는 생각.
정희가 혼자라는 생각. 남아 있는 정희의 고통을 나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생각.

나는 종종 그런 공포와 마주한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것 같은데,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조금 누그러졌던 그 공포가 한강의 소설을 읽고 나면 뚜렷하게 되살아난다. "통각들이 생생히 되살아"나듯이.

그래서 나는 밖에서 엄마를 만나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헤어질 때마다 늘 그때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버스를 타고 가는 엄마, 자동차를 운전해서 가는 엄마의 뒤꼭지가 내가 보는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우리는 제대로 작별하지 못할 거라는 예감.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걸.

 ......그게 무서워서, 꿈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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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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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가장 좋았던 한때'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친구는 '가장 좋았던' 하면 바로 떠오르는 나이인 스무 살, 스물한 살을 이야기했고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나이로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때보다는 지금이 더 좋고, 지금보다는 앞으로가 더 좋을 것이다, 라고 나는 막연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이런 나이에 나는 나를 믿지 못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매사 지금 내가 그 사람이었더라면, 하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네 명의 인물이 살아내고 있는 바로 그 나이이다.  

정윤은 도시에 적응하지 못해 매일매일 걷고 또 걷는다. 마치 이 도시의 길을 몸에 새기기라도 하겠다는 듯.  

나는 이 책을 쉬지 않고 걸었던 여행길에서 다시 읽었다. 처음 가보는 도시였고,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 물었을 때 이 도시라고 대답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그 여행에서 나는 태생지가 있다는 것에 대해 난생처음 생각해보았다. 나고 자란 곳, 엄마가 있는 곳, 같은 것. 그제야 윤이 어째서 도시를 걷고 또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 아주 조금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해"(107쪽) 

나도 궁금하다.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다는 보장이 아니라, 모두가 다 견디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므로, 함께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게 "내.가.그.쪽.으.로.갈.게" 하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삶은 그것대로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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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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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조금조금씩 아껴가며 읽고 있다. 시집 읽듯이.
발표했을 때 따라 읽었던 작품이 꽤 되는데 이렇게 묶인 상태에서 읽으니, 또 다르다.
분명히 그땐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고 별로야!! 하고 제쳐두었는데..뭐지 뭐지.. 엄청 좋다.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 문장을 어째서 그토록 쉽게 지나쳤을까.

"맞아, 좋았어. 우린 참 좋았어. 그렇긴 하지만 우린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라고 하는 헤어진 여자친구의 말도 왜 그렇게 쉽게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는데..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랑했던 거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마지막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두 인물이 서로의 마음을 더듬더듬 짚어나가는 장면은, 진짜 최고다.

그건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의 마지막,

택시 안에서 "어떤 경우에도 앞만 바라보면서 그저 냄새만으로 그 사람들이 먹은 식사와 그 사람들의 경제적인 상황과 그 사람들의 직업을 짐작하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어느 날 새벽에 본 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옛 남자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나'가 만들어가는 장면이 주는 감동과도 같았다. 나도 그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이 아름다운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김연수는 진짜 '난놈'인가보다. -.-
(무슨 놈의 소설 제목은 또 이리도 잘 짓는지..)

 아직 읽을 소설이 몇 편 더 남아 있다. 그래도 당분간은 더 읽을 소설이 있어, 내 '생활'을 구해줄지도 모르겠다.

 술에 취했으므로 우리는 차창을 다 열어놓았다. 어디선가 탁탁탁 규칙적으로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 머리카락이 자꾸만 열어놓은 창문 바깥으로 흩날렸다. 종현의 택시는 한남동을 지나 소월길로 접어들었다. 종현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바흐의 칸타타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들으며 어두운 도로를 바라보다가 내가 "종현아"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종현아"라고 한번 더 불렀다. 그리고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종현은 전방의 도로와 나를 번갈아가면서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종현의 손을 뿌리쳤다. 종현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고 길 옆으로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봤다.

 _'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중에서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자꾸 읽는다.

 
그리고 또하나의 걸작, '달로 간 코미디언'

 
"그러니까 그 여자 말로는 고통과 <우리>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긴데, 소통하면 고통은 없는 거야. 맞지? 이 왼손이 남자고 이 오른손이 여자야. 이 두 사람이 늘 함께 붙어 있다가 이렇게 떨어지면, 서로 소통이 안 되니까 그게 고통이잖아."

나는 두 주먹을 쥐고 서로 붙였다가 뗐다가를 반복하면서 말했다. (……)

"암튼 붙으면 고통이 없고 떨어지면 고통이 생기고, 그런 거야.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거야. 곁에 없으면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야.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처지가 되는 거지. 걔는 왜 그랬을까? 정말 이상한 애잖아? 이해할 수가 없어. 한때 나 자신보다 더 친했던 사람에게 느끼는 그런 의문 자체가 고통이라구. 여기 봐. 이렇게 바람이 불잖아. 여기 나무들 사이로. 그런데 네가 없으니까 이런 의문이 들더라. 왜 바람이 부는 거지?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고통스러워. 손뼉을 치잖아. 짝짝짝. 그러면 소리가 나잖아. 왜 소리가 나는 거지? 이런 소리 자체가 고통이었어. 세상 모든 게 고통이었어."

"그래서 오늘 말고도 길 가다가 가로수에 부딪친 적이 많았다는 소리야?"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내가 알지 못하니까 고통인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니까 오늘처럼 어디 가로수에만 부딪치겠냐고?"

"그럼 또 뭐하고 부딪치는데?"

"바람 소리하고도, 통닭 튀기는 냄새하고도, 하늘의 파란색하고도, 세상 모든 것하고 다 부딪치지."

 

시각적 세계와 목소리, 청각, 보지 않고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여자는 아버지가 왜 가족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적을 쫓음으로써 공식적 기록이 아닌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소설의 화자인 소설가는 자신을 버리고 가버렸던 옛애인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침묵과 암흑의 세계일 뿐이다. 지구에서 에야크 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이라는 노파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렇지만 또, 그 말과 말 사이의 공백에 씌어지지 않는 우리 삶의 이야기가 있는 거라고 김연수는 말한다.

마지막 장면이, 정말이지 인상적이다. 자신의 옛애인이 남긴 소리-하나도 편집하지 않고 목소리의 미세한 결을 고스란히 살려놓은-를 듣고 있는 남자. 그 남자는 그 소리를 듣다가 불을 끔으로써 시각적 세계를 차단한다. 소리 속에서 그녀가 묻는다. "지금, 보이세요?" 그리고 남자가 화답한다. "아, 이건 만월이군요. 맞지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사막 저편으로 걸어갔을 그 여자의 아버지 뒷모습이 보일 듯 말듯하다. 달의 풍경과도 같은 사막. 그리고 만월이 떠 있는 사막. 그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사라진 게 아니라, "우주 저편으로 날아갔다고 생각할 수 있어 다행"인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달로 간 코미디언>이라는 사실도 여운을 남긴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보면 외롭다가도 행복해진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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