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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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조금조금씩 아껴가며 읽고 있다. 시집 읽듯이.
발표했을 때 따라 읽었던 작품이 꽤 되는데 이렇게 묶인 상태에서 읽으니, 또 다르다.
분명히 그땐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고 별로야!! 하고 제쳐두었는데..뭐지 뭐지.. 엄청 좋다.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 문장을 어째서 그토록 쉽게 지나쳤을까.

"맞아, 좋았어. 우린 참 좋았어. 그렇긴 하지만 우린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라고 하는 헤어진 여자친구의 말도 왜 그렇게 쉽게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는데..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랑했던 거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마지막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두 인물이 서로의 마음을 더듬더듬 짚어나가는 장면은, 진짜 최고다.

그건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의 마지막,

택시 안에서 "어떤 경우에도 앞만 바라보면서 그저 냄새만으로 그 사람들이 먹은 식사와 그 사람들의 경제적인 상황과 그 사람들의 직업을 짐작하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어느 날 새벽에 본 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옛 남자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나'가 만들어가는 장면이 주는 감동과도 같았다. 나도 그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이 아름다운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김연수는 진짜 '난놈'인가보다. -.-
(무슨 놈의 소설 제목은 또 이리도 잘 짓는지..)

 아직 읽을 소설이 몇 편 더 남아 있다. 그래도 당분간은 더 읽을 소설이 있어, 내 '생활'을 구해줄지도 모르겠다.

 술에 취했으므로 우리는 차창을 다 열어놓았다. 어디선가 탁탁탁 규칙적으로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 머리카락이 자꾸만 열어놓은 창문 바깥으로 흩날렸다. 종현의 택시는 한남동을 지나 소월길로 접어들었다. 종현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바흐의 칸타타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들으며 어두운 도로를 바라보다가 내가 "종현아"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종현아"라고 한번 더 불렀다. 그리고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종현은 전방의 도로와 나를 번갈아가면서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종현의 손을 뿌리쳤다. 종현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고 길 옆으로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봤다.

 _'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중에서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자꾸 읽는다.

 
그리고 또하나의 걸작, '달로 간 코미디언'

 
"그러니까 그 여자 말로는 고통과 <우리>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긴데, 소통하면 고통은 없는 거야. 맞지? 이 왼손이 남자고 이 오른손이 여자야. 이 두 사람이 늘 함께 붙어 있다가 이렇게 떨어지면, 서로 소통이 안 되니까 그게 고통이잖아."

나는 두 주먹을 쥐고 서로 붙였다가 뗐다가를 반복하면서 말했다. (……)

"암튼 붙으면 고통이 없고 떨어지면 고통이 생기고, 그런 거야.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거야. 곁에 없으면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야.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처지가 되는 거지. 걔는 왜 그랬을까? 정말 이상한 애잖아? 이해할 수가 없어. 한때 나 자신보다 더 친했던 사람에게 느끼는 그런 의문 자체가 고통이라구. 여기 봐. 이렇게 바람이 불잖아. 여기 나무들 사이로. 그런데 네가 없으니까 이런 의문이 들더라. 왜 바람이 부는 거지?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고통스러워. 손뼉을 치잖아. 짝짝짝. 그러면 소리가 나잖아. 왜 소리가 나는 거지? 이런 소리 자체가 고통이었어. 세상 모든 게 고통이었어."

"그래서 오늘 말고도 길 가다가 가로수에 부딪친 적이 많았다는 소리야?"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내가 알지 못하니까 고통인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니까 오늘처럼 어디 가로수에만 부딪치겠냐고?"

"그럼 또 뭐하고 부딪치는데?"

"바람 소리하고도, 통닭 튀기는 냄새하고도, 하늘의 파란색하고도, 세상 모든 것하고 다 부딪치지."

 

시각적 세계와 목소리, 청각, 보지 않고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여자는 아버지가 왜 가족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적을 쫓음으로써 공식적 기록이 아닌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소설의 화자인 소설가는 자신을 버리고 가버렸던 옛애인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침묵과 암흑의 세계일 뿐이다. 지구에서 에야크 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이라는 노파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렇지만 또, 그 말과 말 사이의 공백에 씌어지지 않는 우리 삶의 이야기가 있는 거라고 김연수는 말한다.

마지막 장면이, 정말이지 인상적이다. 자신의 옛애인이 남긴 소리-하나도 편집하지 않고 목소리의 미세한 결을 고스란히 살려놓은-를 듣고 있는 남자. 그 남자는 그 소리를 듣다가 불을 끔으로써 시각적 세계를 차단한다. 소리 속에서 그녀가 묻는다. "지금, 보이세요?" 그리고 남자가 화답한다. "아, 이건 만월이군요. 맞지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사막 저편으로 걸어갔을 그 여자의 아버지 뒷모습이 보일 듯 말듯하다. 달의 풍경과도 같은 사막. 그리고 만월이 떠 있는 사막. 그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사라진 게 아니라, "우주 저편으로 날아갔다고 생각할 수 있어 다행"인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달로 간 코미디언>이라는 사실도 여운을 남긴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보면 외롭다가도 행복해진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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