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에 주목하다 보니 상체보다 하체가 강조되며투박하기 짝이 없어요. 즉 태곳적 여성 조형물은 여성의 몸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 몸은 늘 아이를 잉태하고 있어요.. 프루스트가말하는 신체의 오묘한 역설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어떤여인이 있습니다. 여인의 신체는 늙어 갈 수밖에 없죠? 여인이 할머니가 되면서 신체가 소멸하는데 그 신체에서 아이들이 끊임없이태어납니다. 기괴합니다. 끊임없이 아이를 잉태하고 생산하는 신체, 프루스트가 보는 신체가 바로 이렇습니다. 유한한 시간적 존재로서 소멸하지만, 소멸할수록 기억의 경험이라는 아이를 잉태합니다. 이런 신체는 현대적 시간성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탈물질화되어 가는 신체는 삼분법적 시간을 따르지만, 감각의경험을 저장하는 공간으로서 신체는 결코 삼분법적 시간을 따르지않습니다. 오히려 역류해요. 늙을수록, 없어질수록, 소멸할수록 뭔가 자꾸 생산되니까요.
프루스트가 신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문제는 이미지나 감각에서끝나지 않고 시간까지 포함합니다. 우리가 경험하지는 못해도 분명히 존재하는 또 다른 시간이 있다. 그것의 이름은 기억이고, 기역은 결코 현대적이며 진보적인 삼분법적 시간을 따라 움직이지않고 역류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