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2 - 다양성 너머 심오한 세계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2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의 글을 읽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따뜻한 친근감이 등 뒤로 감싸며 스스럼없이 활자 속에 숨겨진 작가의 온기에 빠져든다. 뭐 이렇게 감상이 장황한가 하면 그만큼 작가의 글이 아들 키우는 영국 브라이튼의 일본 아줌마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잠시 어리둥절하지만 또 그게 무슨 상관이던가 했다. 전작의 아들은 조금 성장했고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관점은 여전히 그대로 사랑스럽다.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면 어제와 똑같을지 모를 그냥 그런 하루이었을 텐데 작가는 아이를 통해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는 세심한 시선으로 사회를 커뮤니티를 다시 돌아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지 살펴보고 있다는 가슴 따뜻한 시선. 작가는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펜을 들어 글로 옮겨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착한 소비는 없다
최원형 지음 / 자연과생태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모두에게 갖춰진 보통의 일반적인 그런 일상을 꿈꾸지만, 보통이란 무엇인지? 또 일반적인 일상은 무엇인지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상한 기후변화와 돌출하는 자연 현상에 우리는 당연하게 존재했어야 할 보통의 나날이 결코 쉽게 손에 잡히지 않음을 조금이나마 지레짐작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가운데 “코로나 팬데믹”은 이미 많은 영역에서 뭉뚱그려 가늠해 보았던 가정들이 직접적인 현실로 드러나며 그 실체를 더욱 구체화시킨 트리거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암담한 변화는 아직 초기단계로 시작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유아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더욱 위기감을 조성할 뿐이었다. 

작가가 정갈하게 늘어놓은 각 챕터의 우려들은 다음과 같은 위기감에 비롯한 걱정에서 시작되었으리라 가늠해 볼 수 있다. 근래에 뉴스나 미디어에서 한 번쯤 들어보았던 경고와 개선책은 작가의 글을 통해 한 번 더 강조되며 독자에게 자극을 던진다. 나는 늘 당연시해왔던 행동과 습관들이 주변을 그리고 더 나아가 환경을 지구를 폐하는 것임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실천하기까지의 의식적인 과정이 다소 무료하고 탄성적으로 복귀해버리는 무력한 본능이 우선되었을 뿐이다. 작가를 따라 하나하나 점검해 가며 그동안의 자취는 얼마나 더러운 흔적을 남겼는지 과거 반성의 돌이킴으로 나는 다소나마 스스로를 다독일 뿐이었다. 정말인지 우리는 타인의 배려가 당연한 권리가 되는 일상을 보내며 보통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소망을 주입시키며 대단해 보이지 않는 삶의 철학을 지탱하기를 원했다. 아무도 그 소소한 일상이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기반한 지탱을 고스란히 뒷받침하고 있음을 무대 뒤의 암흑처럼 모른척하거나 부정했다.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한다. 집안에 가득 찬 물건들과 앞으로 구매할 온라인 마켓에 담긴 장바구니 리스트를. 너의 개성을 존중하고 맘껏 꿈을 펼치라는 멋들어진 슬로건 하에 구매를 독촉하며 현재의 너를 비난하지 마다하지 않는 기업들의 그늘진 마케팅을. 과장스럽게 음식을 먹으며 더 많이 더 풍성하게 먹고 남기라고 등 떠미는 미디어의 부채질을. 더 편하고 쉽게 손가락으로 결제하면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스르륵 스크롤과 간단한 버튼으로 마무리되는 배송과 배달의 편의성을. 이런 타성에 젖어 계속해서 골몰하면 인간은 그 자체로 지구(인간들로 인해 이미 퇴보된)와 함께 소멸하기 딱 알맞을 정도이다. 

누군가는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한다. 자조적인 희망사항일지라도 어쨌든 변화의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던가. 한 개인이 노력한들 얼마나 큰 변화가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실천했을 때 스스로 마음의 안정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이것에 맞서듯 기업들은 그린워싱과 같은 행동으로 교묘하게 이미지를 세탁함을 알고 있다. 텀블러와 에코백 소지를 조장하며 제품을 더더욱 찍어내는 돈잔치에 누가 그런 멍청한 동조를 하나 했지만, 그것이 “그린”(비꼬는 것이다) 임을 자청하는 고객님들의 호응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좋은 조언과 자극을 던지는 훌륭한 책인데 나는 크게 의문이 들었다. 왜 작가는 이 책을 재생용지로 인쇄하지 않았을까? 왜 책 커버를 굳이 무광코팅으로 마감하며 재활용을 어렵게 했을까? 디자인을 위해 가운데 여백 안쪽에 컬러 면적을 두며 가독성과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잉크 사용으로 자원을 소비한 이유는? 이건 굉장히 사소하고 불필요한 의견일 수 있다. 다만 이 한 권을 통해 그렇게 주야장천 물건을, 자원을, 에너지를 그리고 소비를 돌이켜보라는 경고 아닌 비난을 마다하지 않은 작가가 이러한 디테일에서 묵인했다면 아무래도 나는 이 책이 지식인인척 고귀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자신을 타당해 만족한 허구처럼 느껴질 뿐이라 대단히 씁쓸하고 불쾌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 차별과 다양성 사이의 아이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1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민자로써의 삶을 생각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 막연한 이야기이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도 함께. “브래디 미카코”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감히 상상이나 해볼 수 있었을까?
작가는 영국 브라이튼이라는 나에겐 다소 낯선 곳에서 아이를 키우며 일상을 남긴다. 늘 그렇듯 작가가 전하는 일상은 누군가가 보내는 아주 작은 하루지만 (이번 책에는 자신의 자녀에 초점이 되어있다!) 그 안에서 발견한 새로운 의미는 국가, 나이 혹은 인종을 벗어나 삶을 대하는 한 명의 인간에게 작지만 큰 파장을 던진다.
중간중간 피식대며 위트를 남기는 가벼운 농담도 좋았고, 무엇보다 아들을 사랑하고 애틋하게 가족과 그녀의 커뮤니티를 대하는 작가의 애정어린 감정이 많이 묻어나와 책을 읽는 내내 나 또한 마음이 따뜻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알려준 (남을 이해하려하는 능력) “엠퍼시”로 화제를 던지며 그녀의 아이처럼 막 중학생이 된듯한 시점으로 돌아가 보기도했고, 백인 사회에서의 아시아인은 어떤지 막연하게나마 상황을 엿보며 현재 한국사회는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다소 답답함을 짐작했다. “영국”이라는 특수한 국가에 한정되어있지만 다민족과 서로다름이 복잡하게 얽힌 배경에서는 사회가 어떤 구조로 서로 지탱하고 정리되고 있는지 아주 사소한 개인의 일상에서 엿볼수 있다는게 작가의 글을 읽으며 가장 기쁜 점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함을 이 정도의 무게로 가볍게 치환해서 무거운 화두를 전하는데에는 정말 탁월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책이 완성도가 높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는지 최근에 후속 에세이가 출간되었다는 기쁜소식을 알게되었다. 중학교를 보낸 자녀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서 얼른 찾아보지 않으면 안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할 말이 많다. “할많하않”은 집어던지고 모조리 말을 해야겠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이처럼 생각이 좀처럼 정리되지 못할 만큼 분출해서 쏟아져 내리게 되는 경험을 하는 건 말 그대로 기쁜 일이다.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때로는 반론을 제기하며 내 관점을 다시 한번 재점검하고 앞으로 살아갈 나의 시간에 이정표를 더해 나를 탄탄하게 다지는 느낌이니까. 
우선 사전에 덧붙이자면 나는 작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교류가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건 너무 맹목적으로 일방적인 희망사항이다)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본 책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시사기획 창”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덤덤히 본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지만 어느 누구보다 분명하고 적확하게 꼬집어 내는 발언으로 나의 눈길을 끌었다. 시청한 지 꽤 오래된 프로그램이었고 심지어 해당 편성에서는 20대를 대변하는 여럿 인터뷰이가 편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현우”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임팩트를 주었음에는 부정할 수가 없다. (낯선 타인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엄청난 일이다!) 그 이후로 이따금씩 작가의 이름을 검색창에 적어 넣으며 그가 어떤 기고를 하고 어떤 사고를 하는지를 주기적으로 확인했다. 다만 각각의 미디어에서는 그리 길지 않은 시리즈로 엮여있어 한참이나 분량이 아쉬웠다. 이미 그가 투척해버린 글들은 모조리 읽어버렸고(업데이트 주기는 왜 이렇게 느린지) 기고한 글만으로는 불충분했기에(조금 무서운 관심인가요?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만) 다큐 프로그램 편성 즈음 동시에 다른 매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던 미디어 속 작가의 모습도 모조리 체크했다. (심지어 칼럼에서 작가가 추천하는 추천 도서 목록까지 읽어야 했다: 나한테 만족스러운 큐레이션은 아니었으나 이렇게라도 조금이나마 작가의 철학에 다가갔음 했다) 그런 그가 “쇳밥일지”(이미 동일한 타이틀의 칼럼이 있다)로 책 한 권을 묶어냈다. 아니 겨우 이제야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드디어!”라는 감탄사를 낼 정도로 오만가지 감정이 드는 마음으로 작가의 글 앞에 섰다. 앞서 얘기했듯이 동일한 타이틀의 칼럼이 있었기에 나는 해당 미디어에 기고했던 글을 조금 덧붙이고 수정해 책으로 묶어냈다고 오해했다. (이렇게 쉬운 프로세스였다면 책이 더 빨리 출판되었겠지 하며 의문을 가졌다) 물론 기본적인 작가의 서사가 변화할 수 없듯이 배경 이야기는 동일하지만 본 책은 사실상 작가의 새로운 글임에 틀림없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프롤로그를 읽는데 겨우 3면 남짓한 책장을 넘기며 주체할 수 없이 묻어 나오는 작가의 세계에 이미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감상을 도저히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전달할 수 있을지 도통 감당이 안된다; 이 서평이 두서없이 난잡한 이유도 모두 재능이 넘치는 작가 탓이다..) 기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넘어간다는 건 작가의 작업이 정말 뛰어나거나, 혹은 내 기대가 그마저도 과소평과 되었다는 뜻일 텐데 어찌 되었든 무엇하나 비할 데 없이 그야말로 엄청났다. 

붓글씨로 정갈하게 휘갈겨 쓴 폰트(아마도 작가의 작업복에 새겨진 이름과 같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의도된 것 같다)로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것은 “산문”이라 책 표지에 명기하고 있지만, 과연 이 한 권을 “산문”이라는 좁은 범주에 작가의 글을 집어넣어 레디메이드 된 상품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작가의 풍부한 표현력과 다채로운 묘사를 따지면 자연스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이런 글은 없었다. 이것은 소설인가 산문인가. 예예~ 현우소설산문입니다) 이유인즉슨 은주 씨와 초원 씨가 이 글을 허락해주셨는지도 의문이지만 중간중간 글이 너무 스윗하지 않은가.. 순간 이 것은 연애소설이 아니었음을 독자들은 다시금 정신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님 저에게 왜 이런 혼동을 주시는 것이십니까) 극적인 결말을 예상(실례입니다만 스포일러)이라도 한 듯 관객 입장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결말이 씁쓸하긴 했다. (역시 저자가 괜히 웹소설에서 등단을 시도하려 했던 게 아니었다;;) 몇 만부는 기본으로 초판 해버리는 여럿 유명한 소설 작가들의 커리어에 고뇌를 던지는 작가의 글에 프로페셔널한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질까. (나 같으면 이런 무시무시한 필력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무서울 거 같다; 그렇다면 여름 공포 시즌에 출간을 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그와 비슷한 시기를 비슷한 세대로써 비슷한 시간을 전혀 다른 경험과 배경을 뒤로한 채 작가와 공유했다. 마치 타국의 이방인을 대하는 호기심이 없다 했다면 거짓말이다. 작가의 이력은 그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평범했을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너무 생경했다. 당연히 작가에게는 종래의 미디어가 다루는 그의 세대들이 수도권의 보통의(이것은 전혀 일반적인 보통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수는 당연하게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다수가 디폴트가 되어버린 낯선 것이었다. 웃긴 것은 시간은 공유하나 그가 전혀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소 거리감이 있는 지역이기는 하나 ‘창원’, ‘마산’을 (안타깝게도 나는 전혀 그곳들을 가본 적이 없다) 외국지명처럼 바라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웃픈 감정이 돋아나는 건 왜인지 아이러니했다. 
작가는 청강대 졸업 축사의 한편에서 “남이 떠먹여 주는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먹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표현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 문장 그대로의 삶이 되어버린 것 같은 작가의 이야기는 환상 속의 동물인 유니콘처럼 아득하기만 할 뿐 ‘과연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만 던지다 이내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작가의 이번 챕터는 한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렇게 한 단락으로 치부하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으나) 혹은 잠시 언론에서 주목하는 반짝이는 영웅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지금 현재 무엇을 경계하며 어떠한 파급과 울림을 내게 주었다면 지금의 나에게 있어 순수하게 그것에 집중해야 하고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결코 그가 앞서 말한 작가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설령 그러할지라도 작가 스스로가 타인의 철학에 대해 경계하고 스스로 판단해 해석하며 소화하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그도 그의 배경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 항상 당연함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며, 지금 내가 있는 것이 누군가의 도움과 노력의 한 땀이 스며들어 있지 않음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지 능력주의라는 논거로 철저하게 뒷받침되는 논리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인간은 너무 무력한 나머지 익숙함을 당연으로, 당연을 자신의 지위와 행동으로 치환하는 신기한 능력을 감추려 마다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스스로의 관점에 타인을 무력화한다. 일반론으로 다수의 대중을 묶어 비난하기에 앞서서, 나 역시도 그들의 한 편이었고 작가와 같은 돌출된 모난 선구자들이 없다면 늘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내며 자신을 탄성적으로 드높이려 들뿐이다. 작가가 있기에 감사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몰지각한 나를 되돌아보고 주변을 조금이라도 관찰하라는 명료하고도 당연하지만 너무나도 어려운 발의를 꺼내기에. 스스로가 못났다고 부족하다고 겸양으로 자신을 낮추던 작가는 더 이상 없다. 그의 변화처럼 희망도 엿보고 앞으로의 행보가 더 많이 궁금해서 또 그래서 대단하고 멋지고 훌륭한 사람과 한 시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축복을 받은 것 마냥 나는 그냥 기쁘다. 

지금 이 순간이 힘들고 괴로운 분께 이 한 권을 전해드리고 싶다. 당신보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삶의 바닥까지 추락해본 작가가 지금은 환골탈태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신데렐라 같은 희망 자극을 주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한 치 앞도 예견할 수 없는 지금을 마주해야 할 우리 모두의 앞에, 서로의 각자 다른 환경에서 이렇게 변화를 촉구하며 지금의 당신과 같이 살아가고 있음을, 그리고 지지를 보낼 누군가가 있음을 통해 조금이나마 응원을 보내주고 싶은 것이다. 내가 작가에게 받은 것만큼 말이다. 이 책은 정치적인 생각을 은근히 담고 있지만, 이 책을 단순하게 어떤 정치 편향으로 단정해버린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판단이 아닐 수가 없다. (그것과는 별개로 전 대통령이 이 책을 추천해다는 이야기는 추후에 알았다; 그래서 더 주목을 받은 이유도 있겠지만 이미 ‘천현우’ 작가는 유명했다) 이 책은 국민의 삶과 대중의 사고, 그 안에 개인의 일상에 미치는 뭐 대단한 담론을 제시하며 극적인 변화와 돌출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화려한 일들은 정말인지 많은 사람들의 기표와 선택으로 이뤄진 무게를 감당해야 할 금배지의 사람들이 이끌어가야 할 행동이지 한 개인의 서사로 만들어질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오해 없이 읽어보시길 그리고 ‘포터 아저씨’ 마냥 거칠고 퉁명스러운 겉껍질에 오해해서 다가가기 힘들지만 그 안은 한 없이 진국인 대한민국의 많은 숨겨진 보석 같은 분들께 감사를 표한다. 

p.s 작가를 안 후, 줄곧 ‘천현우’라는 석자를 추천했던 친구에게 나는 말했다 “아니 왜 이런 능력 있는 대단한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있지?” 그 해답은 간단하리라 할 만큼 명료하게 마지막 챕터에서 결론을 맞는다. 작가는 미디어 업체에서 기자로 이미 활동을 하고 있다 했다. (그럼 그렇지.. 이런 훌륭한 인재의 재능을 이 사회는 가만히 놓아둘 이유가 전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들의 계급투쟁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을 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을 본 적이 있다. 주관적인 개입을 가능한 차단한 감독의 시선이 인상 깊은 영화이었지만 그보다 앞서 선진국이라 자부한 어두운 영국의 사회상을 그려낸 점이 다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나에게는 한동안 멍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다. 영화에 뒤지지 않을 것처럼 이 책 또한 적나라한 영국의 현실을 한 권으로 다시 한번 드러낸다.

’보육교사’와 ‘영국 정치’라는 도통 연관점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의 교집합에서 작가는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여기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음을. ‘브래디 미카코’가 전개하는 화법은 정말인지 매번 군더더기 없이 (그녀가 화두로 던지는 주제가 엄청 극적인 것에 반하여) 평이하기 그지없다. 분명 작가 개인이 겪은 아주 사소한 사적인 경험인데 어찌 된 지 나는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녀가 전개한 세상은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탓인지 파고들면 금세 내 주변 얘기이고 누군가가 겪었던 어제의 야이기 마냥 들린다. (심지어 그녀는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의 장벽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세계화의 일환인가?) 조금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시류의 흐름에 맞춰 정권의 변화에 따라 저변 탁아소와 긴축 탁아소를 거쳐 보육교사로 일을 했던 저자의 경험담은 정말인지 어느 영화보다 흥미롭게 전개된다.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 정치의 변화가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잘 알 수 있다.”라는 작가의 말은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정의와 같다. 이는 영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적용 가능한 개념으로 팬데믹에서 시작된 유례없는 극심한 변화는 많은 부분에서 사회약자들을 배제하고 누락시키면서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이들을 보살피고 유심히 바라보지 않는 건 정치라는 집단지성의 권위자들이 오만하고 무지해서가 아니라(그들은 원래 오만하고 주변에 대해 무지하다) 분열되어버린 서로의 위치에서 더더욱 멀어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무리 좋은 말과 현명한 철학이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한들 서로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못한다면 탁상공론에 그치는 빛 좋은 개살구에 빗대어 뭐하겠는가. 안타깝게도 세상은 소수를 보존하기 위한 관점으로 방향을 틀어 나아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고가 모여 힘을 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우리는 정말인지 바로 앞에 마주하고 있는데 이를 모른척하고 그들을 유령 취급한 채 살아가고 있다.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변명을 둘러대던 입막음은 도대체 언제까지 묵인해야 할까. 이 책으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난과 비난이 되지 않도록 집단이 생각을 고쳐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작가는 에둘러 던지려 하지는 않았나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