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무게 - 가족에 의한 죽음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사탐(사회 탐사) 7
이시이 고타 지음, 김현욱 옮김, 조기현 해제 / 후마니타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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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무게’라는 다소 은유적인 표현은 이 책의 원제인 “근친살인 :옆에 있었기 때문에”가 아무리 르포라는 사실 기반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객관적인 서술에 다가가고자 한 의도의 직접적인 그로테스트한 기괴함 조금이나마 완곡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누군가의 고뇌가 엿보이는 타이틀이다. 이에 호응하듯 ‘가족’이라는 가슴 따뜻한 큼지막한 단어의 첫머리에 끌려 아무런 미심쩍은 의심 없이 책을 집어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황망하기 이를 데 없는 영혼을 간신히 붙잡으며 현실의 씁쓸함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무게라는 시적인 표현은 직접적인 사건사고를 연상시키지 않게 순화한 역자의 바람직한 의도 탓에,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집어든 독자의 탓으로 돌리며 그들에게 한 권의 무게를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무책임함을 책망하는 듯하였다. 
언론과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극히 적은 수의 사건 사고들은 세밀하지 못하다. 빠른 뉴스의 흐름 안에서 친족 간의 국지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은 특히나 다수를 일반화하거나 특정 구성원을 극대화하여 의도된 감정에 편입 혹은 본질을 호도하거나 그를 뒤엎는 자극적인 무언가에 집중하기에 우선일 따름이다. 무명의 셀럽이 무엇을 하든 대중의 무관심이 당연하듯 내 근처에서 평범하게 일어날 법한 가족 간의 문제들은 잊힌 다수의 반응을 기대하듯 소리소문 없이 너저분하게 주위를 배회하다 사라질 뿐이다. 저자는 이런 점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그의 관점을 근친사건을 중심으로 대중들의 주위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근친살인이 일본의 전체 살인가운데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의아할 정도로 매우 이례적인 느낌이었다. 국가 간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미디어에서 다뤄진 사건들은 결코 가족 간의 살인을 바로 연상시킬 만한 근거가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디어는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있음을 대중에게 착각하게 만든다. 그건 스스로가 바라보는 자아와 타인이 지켜본 나와의 간극을 메울 수 없듯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지만, 이 차이의 존재를 부정하여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이다. 적어도 사회를 인지함에 있어 개인은 그 차이를 극복하려던가 적어도 관계의 차이성을 고려한 위에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조금이나마 그 현실을 그대로 인식할 수는 있는 자세라도 갖출 수 있지는 않나?

우리는 멀리 일본의 얘기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사회복지의 사각지대라는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마주하고 있다. 최근 ‘수원 세 모녀’, ‘신촌모녀사건’으로 이어진 연속된 생활고와 지병, 그리고 결국에 사망에 이르는 사건들을 대중들은 접하였다. 그나마 과거에 비해 사정이 나아졌을 뿐이지 기존에도 이와 같이 조명받지 못한 사건사고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음을 짐작으로나마 가정할 뿐이다. 과연 아사가 2000년도의 한국에서 발생 가능한 사건인지도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는 발전과 과도한 성장성에 집착하며 그 뒤에 가려진 주변을 살펴봄을 소홀했다. 이것들은 가족 간의 개개인이 풀어낼 문제로 치부하며 조금이나마 관심 깊게 조명하려 시도라도 했었던가 했다. 여러 많은 사건들 가운데 작가가 그나마 추려서 책에서 소개한 7개의 사건들이 그다지 낯설지 않음은 한국 또한 일본과 비슷한 사회구성과 유사한 국민사고를 공유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라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쉬쉬해서 가려져온 사건들이 도처에 즐비함을 단적으로 시사하기까지 하다.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지만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무거운 주제 탓에 나는 잠시 책을 덮고 마음의 환기를 시켜 자세를 다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극소수가 처한 누군가의 상황을 그 누군가의 얘기가 나의 이야기이며 우리에게 처한 조건임을 조금이라도 책임을 갖고 살펴보아야 하지 않나. 

그동안 나는 은둔형 외톨이, 간병, 우울증, 치매 조명받지 못한 채 그 누군가의 책무로 사회가 알아서 보장하겠거니 하고 사회복지의 잘 마련된 짐작이나 할 뿐이었다. 작가는 사건들을 나열하며 도래하지 않았다고 해서 미리 짐작해서 걱정하고 대중에게 겁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으레 당연시되어온 그 구조의 과정이 결코 관심과 참여 없이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가슴 한편 어딘가에서는 이해하고 기억하고 있자는 환기를 주려함에 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돌변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마주하며, 슬프게도 본인과 가장 가까운 가족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가정하려 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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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
도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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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계는 전력부족이라는 불안을 마주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발달된 기술로 혁명적인 디지털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풍족한 생활을 영유하고 있다. 나는 전력 문제를 비롯한 현재의 에너지 수급상황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에너지부족이란 건 외교나 정치적인 분야와 얽혀 있더라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이미 완성된 기술이나, 과학 발전에 전적으로 기반하고 있다 생각했던 것이다. 하물며 타이핑을 하고 있는 지금의 노트북도 아주 조금의 과거에는 펜으로 종이에 담겼을 사유였음을 이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이처럼 너무나 오만하고 단순한 타성에 젖어 있었다. 
이처럼 편의와 본능이라는 가치에 생각을 내어주면 사고의 출발 자체가 달라진다. 약간의 의문을 가질 만한 문제점들이 휘발되는 가치와 증폭되는 숫자로 변모할 뿐이고 이익이라는 기업의 고귀한 산물로 대체하기에 자본사회의 총체적인 과정을 의심한다는 건 비평받아 마땅하다. 이건 ‘돈세탁‘이라는 무시무시한 범죄영화의 브로커를 떠올리지 않아도 좋다는 얘기이다. 이미 ‘세탁‘이라는 매끄럽고 깔끔한 과정이 우리 삶에 촘촘하게 설계된 플랫폼 속으로 자리 잡았으니까. 

작가는 자신이 바라본 관점을 통해 아홉 가지의 카테고리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뒤집어 본다. ‘뒤집는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은 아주 평온하고 아름답기만 한데, 작가가 들춰내는 현실은 꺼림칙하고 부정적이며 불쾌하기까지 하다. “과연 그게 지금 우리네 삶인가요?” 누군가와 아무렇지도 않게 교환해 왔던 행동과 말들은 이제 플랫폼의 가치 아래에 디지털로 변환하며 숫자와 금액으로 환산되는 거래가 되었다. ‘좋아요‘와 ‘팔로워 수‘는 (혹은 작가가 예로 들어준 당근마켓의 ‘매너온도‘와 같이 이름은 다르지만 결국은 기업이 규정하여 계산가능한 측정단위로) 기업의 속내를 가리는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유희로 가장되어 문제발생의 책임 본질을 흐리게 돕는다. ‘페이스북‘이 ‘메타‘라는 사명으로 갈아타고 노골적인 사업의 목적을 드러냄과 동시에 개인의 삶이 채굴대상이 되는 가치로 타깃이 된 것은 (하지만 그들은 그 이전부터 그런 행보를 차근차근 밟아 왔을 뿐이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정치인들이 왜 그렇게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집착하는지 한 번쯤 곱씹어볼 만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공짜 서비스‘라는 당장의 이득에 순응하여 자진해서 사진을 포스팅하고 영상을 업로드한다. 스스로가 기업의 또 다른 콘텐츠며 노동자가 되기를 꺼리지 않는 현대인들은 오히려 길들여지기를 꺼리는 인간들을 배제하고 비난할 따름이다. 이쯤 되면 작가의 책은 부적절한 사상을 주입하며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이기에 불온서적으로 낙인 되어 온라인 거래로 정지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하지만 이는 주목과 또 다른 콘텐츠라는 형태로 면모 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자산이 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황새를 쫓을 기력이나 자신감 자체가 결여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시류를 잘 못 읽고 자가진단이 확실했던 탓에, 작가가 열거한 플랫폼의 화상에 데는 일은 적었다. 가뜩이나 예민하고 경계심 많은 나 같은 성격에는 아직까지 기업의 알고리즘이 강제성을 발휘해 정보를 도달시키기에는 어려운 것일까. 기술의 개발 속도가 미치지 못함에 다소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미화되거나 편의로 가공된 마케팅의 논리는 여전히 덕지덕지 삶의 구석구석에 쌓여 있고, 살짝만 스쳐도 인연이 되는 가벼운 터치만으로도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종속되고 아주 쉽게 편입되는 고객이 된다. 작가가 끝맺음에 넌지시 얘기하듯 이런 사회에서는 아예 그들 속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바치고 매체를 통제해버리거나, 혹은 완전 플랫폼을 차단한 채 완강히 거부해야 할 텐데 전자를 내세우기에 내 자아의식은 아직 불안하고 후자를 선택하기에 그렇게 까지 내가 미쳤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애매모호하게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은 채, 부유하는 듯한 이물질 마냥 나는 흐름에 몸을 내버려 두고는 있을 뿐이다. 근데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단점과 역효과가 묻어나기 나름 아닌가도 했다. 너무나도 빠른 편의를 생각하기에 급급하여 목적 달성을 위해 그동안 묵인되고 제외되어온 소소한 가치들이 이제야 산더미처럼 불어나 앞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숙제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어찌 되었든 변화와 기술이 삶에 침투하는 방향은 회피할 수 없기에 지금에 와서야 문제가 되었을 뿐 감정적으로 비난하기에 앞서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개선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한다. 고민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플랫폼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의견 또한 결코 부질없이 소모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 믿음 없이는 이 세상을 온전히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음을 알기에. 

우리는 의사소통을 위한 플랫폼이 ‘읽씹‘과 ‘차단‘이라는 형태로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키고, 거래를 위한 시스템이 마케팅과 불순한 의도로 교환을 막는 이상한 역설의 효과를 몸소 체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문자화된 사상을 직접 체험으로 경험시키는 그들의 배려에 감사해야 하나 이리 황송하기 그지없는 오지랖에 차디찬 테크놀로지의 따뜻함을 새삼 느낀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문득문득 떠올랐던 의문이 작가로 인해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흐리멍덩하게나마 자극을 받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나는 ‘현명한 고객‘이라는 가공된 이상에 발을 담길 의도는 전혀 없다. 그냥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플랫폼의 의도에 의해 보정되지 않고 반영되는 길이 무엇인지 궁금할 뿐. 오늘도 그렇게 제도 속의 잉여물처럼 하루를 살아가길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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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은 어떻게 우리를 단절시키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가 - 민주적·지성적 문화의 타락을 부추긴 세계 최강,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에 대한 미디어 생태학자의 신랄한 고발장
시바 바이디야나단 지음, 홍권희 옮김 / 아라크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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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인 ‘안티소셜미디어’의 타이틀이 세분화되고 길어졌다.  사실상 책의 모든 요약은 책 초반에 마련된 옮긴이의 말에 자세하고 친절하게 정리되어 있다. 교수의 논문이 그러하듯 많은 사례와 사건을 실증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주석들이 줄줄이 엮여 한 권이 되었으나, 결국하고자 하는 말은 간략하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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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복 탐구 : 새로운 패션
박세진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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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매거진에 실리면 찾고 헤매던 마지막 퍼즐조각처럼 딱 알맞게 적당한 글이 아닐까 했다. 정작 화려한 잡지 페이지에서는 번쩍거리는 이미지에 눈길에 사로잡혀 가독성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작가가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5pt로 가지런히 마련한 깨알 같은 글들은 읽지 못하겠지만. 
내가 ‘패션’이라는 거추장스럽게 무거운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가 하면 그 결과물로 자신을 돌아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내 기준에 ‘패션’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란 신상판을 구매하기 위해 셔터가 굳건한 매장 앞에 줄은 한 번쯤 서서 차가운 새벽공기를 마주한 분들이 아닐까 했다. 그런 반면에 왜 그렇게 나는 의류브랜드에 많은 돈을 기부해왔는지도 동시에 의문이다. 맘에 들어 혹은 누군가가 입고 있어 멋져 보였던, 쇼윈도의 마케팅에 사로잡힌 그대로의 복사 붙여 넣기 착장은 매번 실망과 좌절이라는 감상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찾는 신상으로의 호기심의 악순환을 고착화할 뿐이었는데도 인간의 습관이랄까 본능은 변화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패션브랜드는 이런 나의 패턴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히려 가소롭게도 소비자의 엉뚱한 선택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유도하겠으나) ‘패스트패션’이라는 시장을 창조해내고 변화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객에게 선택폭과 신속성을 그리고 무엇보다 가성비를 철저하게 제공해 주었다. 이제 와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고 있는가를 점검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버린 미궁가운데 작가는 ‘일상복’과 ‘패션복’의 차이를 구분을 시작으로 아주 단순하게도 혹은 다수가 모른척했던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던 욕심의 한계를 인정하길 바랐다. 사실 이 구분으로 시작한 주절거림이 이 책의 모든 내용이지만, 왜 그렇게 한 권을 통해 끊임없이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옷에 관한 고찰을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무언가를 작가는 분명하게 시사한다. (그게 끝없는 소비라든지, 개발도상국에서 이뤄진 의류노동자 혹은 의류제작으로 인한 환경오염 등등 문제점에서 시작한 시사점에서 출발하든 무관하게) 
잘 갖춰 입는다는 것의 포상을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기준하기에 앞서,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의 편의와 감정을 우선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무엇보다 나의 취향이 무엇이었는지, 이전에 실패했던 의류들을 돌아보며 (혹은 반복하며) 이미 가진 옷들의 소재, 형태와 색감을 그리며 패턴화 하는 그런 단계말이다. 무턱대고 맘에 든다고 구매해버리는 습관을 완벽하게 버리지는 못했으나(오히려 24시간 운영되는 온라인매장의 편의성은 이를 더 확대하면 강조했지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충동이라는 과감함을 현명한 인스피레이션으로 포장된 감각으로 패션에 녹일 수 있다면 그걸로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여러 가지 룰이 생기고 그걸 또 파괴하고 새로운 자산을 형성하고 무너뜨려버리고 하는 반복된 혼동 속에서 살아남을까 아니면 흐름을 유연하게 즐기고 있을까?. 답은 없지만 답은 만들어 내야 할 거 같은데 그게 또 내 안에 있어서 불명확한 모호함의 기준은 갈피가 잡기 힘들어 보일 뿐이다. 타인의 시선이든 소비의 불안한 불편함만 없다면 뭐든 그 시작은 조금이나마 변화해 볼 수 있고 좀 나은 선택의 뚜렷함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일상복’이라는 가볍고 친근한 매일의 대상을 어떻게 마주할지 나에게는 또 다른 관점을 던져준 흥미로운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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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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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을 찾으며 글의 출간 시기가 언제였는지 확인하는 것이 습관처럼 배었다. 그 책이 소설이라면 작가가 활동한 기간을 대략적이나마 가늠하기 위함이고, 그게 논픽션이라면 현재를 기준으로 작가의 사고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측량하기 위함이다. 작가가 후기에서 언급하듯 본인의 글을 “사적인 강연록” 비스름한 것으로 취급하는데, 한 권에 담긴 구성이며 냉철한 자기 관찰이 오히려 그 어느 작품보다 나에게는 소설처럼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었거나 인상 깊게 이해하고 있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나에게는 너무 저명해서 닿기 힘든 작품 혹은 작가의 거리감 때문에 오히려 회피해서 경계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 이것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의견에 의심 없이 수저를 올려놓은 꼴 마냥 작가를 순수하게 문학으로 받아들였던가 하는 의문이다. 이에 반기를 들듯 조곤조곤 (강연록이라는 취지에 걸맞게 매우 부드러운 화법을 쓴다) 속삭이듯 대처하는 작가의 말 가운데 나는 그동안 작가가 쌓아온 분노를 자근자근 씹어내는 열기를 느낄수록 있었다. (괜히 뜬금없이 불편해진다) 작가는 글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쌓아둔 문장을 교차하고 수정해서 원고를 최종적으로는 통일된 문장으로 정리하였다 했지만 그 기저에 깔린 “화”를 감출 길이 없어 보였다. 굉장히 일본적인 대처법이랄까? 이렇게 그동안 본인을 향한 비난과 시기를 한 권의 묶음으로 타파해 낼 수 있다니 정말인지 그는 대단한 이 시대의 작가가 아닐 수가 없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작가는 소설은 스토리에 담긴 인물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본인이 관여하는 사적인 프로세스의 영역이 작다했지만, 결국 픽션이라는 건 작가 자신의 무의식을 담고 있어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작가라는 사람을 읽고 파헤친다. 소설이 간접화법으로 작가를 드러내는 면모를 추상적으로 그려냈다면 본 책의 글과 같은 에세이는 직접적으로 작가를 드러내며 맞서기에 조금은 당혹감이 생긴다. 팬으로서는 이런저런 다양한 작가의 사고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겠다 했다. 구태여 추종자가 아니더라도 이 책은 작가라는 독특한 선망의 직업이 “이” 작가에게 (하도 작가가 본인은 스테레오 타입이 아님을 몇 번이고 강조하기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소화하고 있는지 세분화하였다. 이것은 작가를 지망하는 누군가에 가르침이 되는 교양서가 아니다. (마치 그것을 노리듯 교묘하게 뉘앙스를 던진 타이틀에 범죄의 추궁이 요구되지만) 작가도 후기에서 밝히듯이 모호하게 이것은 특정 대상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아님을 밝혔다. 
나에게는 신기하게도 작가라는 타이틀을 벗겨내면 그 특이성이 내가 가진 직업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으며 직업으로서의 작가라기보다 작가로서의 무라카미 씨는 어떤 사람인지가 더 두드러져 보여, 혹은 나는 너무 작가주의에 몰두하여 주변을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했다. (하지만 그게 또 내가 가야 할 방향이라면 일부러 방향을 틀어 나의 중력을 거슬러하지 않겠으나) 

태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그렇다 한다면 모두 창작자가 아니겠는가 했다. 작가는 그러기에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들어 100명의 작가가 있다면 100명의 글쓰기 방식이 있다고 했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소설가로 한정 짓지 않아도 여기에 살고 있는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써 내려가고 있는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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