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체조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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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소설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벌써 시리즈로 4권째라는 사실은 책을 판촉하려는 출판사의 자세한 설명을 읽지않았다면 알 수도 없었다.
작가가 창조한 이라부라는 정신나간 정신병원장은 여전히 오락가락 재치가 넘치며, 난리를 치지 못해 안달난 상태 그대로였다. 하지만 병원도 의사도 똑같은데 치료를 원하는 환자들은 변했다. 그들은 코로나라는 현대의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고, 화를 누르고 예스맨인척 자신을 감추는 착한사람 콤플렉스를, 과도한 자아제어에 지친 누군가를 반영했다. 이렇게 뻗어나간다면 환자의 무수한 가짓수로 소설은 무한한 증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원대한 계획에 혀를 내두르며 여전히 ‘이라부 시리즈’에 부담감을 토로하며 말을 아끼는 작가의 모습은 못내 장난스럽기 그지없다.
챕터에 담긴 실없는 유머와 위트에 실소를 자아내면서 뭔가 씁쓸하게 다가오는 감동이 어울리지 않는 친절처럼 부담스러웠다. 지금을 위로한다는 작가의 조언이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이들이 남몰래 껴안고 살아가는 나약함을 광장으로 끄집어내려는 것 같아서 나는 정말인지 낯선 어색함을 느낀것이다. 지금처럼 있어도 된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누구나 쉽게 말버릇처럼 되새기고 읊어내려가지만, 이내 떠오르고 강박처럼 새겨내리는 마음가짐은 전혀 대단한 결심에 동요하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작가는 엉뚱하게 그려낸 무언의 대상으로 복잡한 당신을 희화화한 상황으로 치환하여 현실을 보다 쉽게 마주하게 도와주려 하지는 않는가?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을것이다. 그냥 실소하다가 잊어버려도 그걸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잊혀졌는데, 작가의 시리즈가 여전히 손에 잡힐 한 권으로 남아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서 오랜만에 돌아왔다는 신간이 조금도 익숙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는 반가움을 느낀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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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 - 손쉽게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행동설계의 힘
칩 히스 & 댄 히스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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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아가는데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한것 같았다. 아니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노력이 삶을 채우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게는 당연한 것들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도통 뭔소리인지 짐작도 안 될 헛소리들이 주절주절 나열되있다. 결국 원하는것을 취하려고 든다면 한번쯤 작가를 따라 시도해봄직은 어떠한지. 손해볼 필요도 없다. 작가의 말마따나 그 출발점에서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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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워크 -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
이얼 프레스 지음, 오윤성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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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대중은 자애스러운 화자의 위치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가볍게 말을 내뱉지만, 본인 자녀가 만약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않는 직업을 희망한다면 결코 그들의 부모는 헛소리 같은 너그러움을 본인의 자식에게 내보일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기피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반드시 존재한다.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한 누군가의 희생을 위해 지속되는 사회의 균형은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듯이. 때문에 특정집단의 노동을 통한 혜택은 당연하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지만 동시에 매우 평범한 하루의 일상에서 누군가의 존재는 반드시 망각되기 일쑤이다. 때때로 그것은 하찮다는 이유로, 누구나 대체가능한 역할이기에, 또한 그다지 많은 기술이 요하지 않다는 각종 편견으로 응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가치 평가에 있어 그들의 급여는 작은 숫자로 환산되어 노동에 가담하는 주체를 더욱더 사회 속에서 고립시키는데, 당연하게도 그들은 스스로 원해서 사회적으로 밀려난 직무를 떠맡고 있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누군가 해야 할 일들은 과연 무엇일까. 또 왜 사람들은 누군가의 중요한 노동을 평가절하하며 존재의 의미를 애써 지워버리려 하는가. 그들은 애초에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가? 무언가를 드높이고 경외의 대상임을 학습하듯이 우리는 이미 특정집단을 망각하고 무시하는 법을 터득했는지 모른다. 불쾌하고, 더럽고 역겨운 감정은 늘 내 주변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기에 본능과도 같기에 동일한 방식으로 누군가의 노동에서 비롯된 비슷한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려 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더티워크’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서 작가는 미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존재하는 직무를 한 꺼풀 드러낸다. ‘교도관’, ‘드론조종사’, ‘도살장 노동자’, ‘시추선노동자’, ‘실리콘밸리의 IT노동자(다만, 이들은 나열된 다른 직무와 지위가 조금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주체를 잊지 않으며, 의견을 내보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더티워커’이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누군가의 일은 코로나라는 전례 없는 질병으로 사회가 폐쇄되면서 오히려 다른 직업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강제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않았던 하찮은 역할들이 실로는 꽤나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없었다면 과연 일상이 돌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조차 의문이 들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도 바이러스와 직접 대치하는 의료진과 같이 평소에서 경외의 대상인 직업에 대중의 주목에 한하여 긍정할 뿐, 교도관이나, 드론조종사, 도살장 노동자와 같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들은 그 존재감이 미미하기는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범죄자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기 마땅한 이유로 인해 대중의 분노를 곧이곧대로 물려받은 교도관의 폭력적인 아웃풋으로 묵인되었다. 평화를 지킨다는 대단한 이유로 적인지 시민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순간에서도 불분명하지만 위험해 보인다는 주관적인 직관을 통해 (스스로가 위험성에 노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사살하는 버튼을 조종하는 자가 있었다. 전쟁을 위해 전쟁을 하는 계산된 국가의 논리 속에서 폭력이 정당화된 집단의 동의로 소수의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록되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배당해야 마땅한 동물은 어떠한가.  단순히 기업의 실적을 부풀기 위한 마릿수일 뿐 사람과 공존하며 유용한 식량이 되는 식자재가 아니다. 때문에 가장 효율적이고 완벽한 숫자를 위한 관리 속에서 가금류는 손바닥만 한 공간에서 평생의 시간을 알을 낳거나 자신의 살을 바쳐야 하는 생물체가 되어야 하며, 살아있음에도 전기충격을 받거나 숨을 쉬는 가운데 칼에 찔리며 사지를 갈기갈기 분해당하는 소들처럼 가장 빠른 시간에 가능한 많은 양을 처리해야 할 도축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할 뿐이다.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범죄자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동물을 학대하는 듯 보이는 노동자가 나쁘다 비판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부적절한 오해이다. 그들은 당신의 동의를 통한 사회의 일원으로 담담하게 오늘을 이끌어 가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오늘 점심으로 먹은 육식 메뉴가 소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타인의 잘못으로 치부한다면 이것만큼 어리석은 인간은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오늘을 그렇게 산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이라고 생각하며. 이렇듯 ‘더티노동’을 수행하는 집단은 일상의 대중과 물리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그들과 또 다른 계층으로 분리되기 희망했던 것일까? 시스템으로 분리된 그룹화의 계층구조는 집단을 돈독하게 하며 나름 평온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일면으로 비치나, 그 이면에 가려진 불순하고 더러운 상태와 과정을 단순하고 조립된 이미지로 파편화하여 최대한 계층과 분리된 단계를 넘어서지 않는 강력한 구조를 강화했다. 때문에 대중은 미디어에서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으며 헐떡거리는 사람들 보며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나도 그와 같이 먹고 싶다 생각할 뿐이지, 피를 흘리는 닭대가리를 나열한 축산 공장에서 오염된 역겨움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 죽임에 가담하는 노동자의 인권과 환경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사회의 누군가가 할 것이라는 대리인의 ‘더티노동자’는 그렇게 탄생하며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오늘도 깨끗한 거리의 도로는 밤늦은 새벽사이에 미화원들의 일터로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금세 잊고 지내며, 식탁의 고기가 육즙이 풍부하고 마블링이 어떤지에만 오로지 관심이 있을 뿐 전기로 소를 기절시키며 분뇨와 역겨움이 넘쳐나는 도축장의 불쾌한 공기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노동을 통한 혜택을 기억하며 감사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밀려난 특정 집단을 위로하며 연민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분명하게도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으며, 나는 이에 과연 무엇을 취하고 어떤 의견을 사회에 던져야 할지 조금이라도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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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P HOPPER 잡호퍼 - 취업보다 중요한 이직의 시대
유월 지음 / 지북(g-book)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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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명제와 겉표지의 위엄을 역행하는 속내용 없는 내용물에 나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 그의 깨달음을 전하고자 했던 어느 박사는 말했다. 책을 마주함에 있어서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오롯이 그 작가의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지금까지 작가들의 말을 비판적으로 혹은 내 기준에서 바라보았던 부정적인 태도를 나는 반성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가져야지. 
하지만 나는 철저하게 개인경험을 일반화하여 자신의 가치를 오류로 삼아 꼰대로 대변할 수 있는 작가의 관점에 맞서 이내 열렸던 긍정의 마음을 매몰차게 닫아버렸다. 저자가 여러번 이직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커리어를 지속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뛰어난 실력과 완벽한 능력에 비함이었다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과연 사회라는 집단 안에서 능력주의로 대변하는 편협한 작동법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기능했을지는 막연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한, 글쓴이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태도를 불편한 변화로 보고 시종일관 불편한 기색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자신은 무조건 옳은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그릇된 행동을 하고 있음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기존 관습을 답습하려는 답답한 입장을 나는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가 자신은 지금껏 이래 잘 살아왔으니 그것만으로 인생의 답이 되며, 누구든지 반드시 내 얘기를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는 논지를 강하게 강요할 뿐이었다. 분명 그도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부모며 어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관점을 편향되게 조성할 수밖에 없는 그의 상태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과연 나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었을까. 여전히 답답한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편협한 공간에 머물러 세대의 차이를 극명하게 선 그으려는 이 사회 속의 누군가와 공존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본본기가 된 이와 같은 그릇된 어른이 되지 말 것임을 사전에 마음 붙잡고 단단히 기억해야 하는 것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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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의 힘 - 현대 세계를 만든 값싼 것들의 문화사
웬디 A. 월러슨 지음, 이종호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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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이 매우 싸구려 같지만 원제인 “Crap: A history of cheap stuff in America”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 ‘싸구려’만큼이나 직설적으로 이 책을 대변하는 수식어는 없을 듯하다. 문제라면 독자들이 이 책을 한낱 싸구려 책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만, 그것은 매우 단단히 잘못된 오해이다. 싸구려 타이틀을 단 책을 단순히 저급하게 취급한다면 이는 곧, 지금 자신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불필요한 물건들에 둘러싸인 스스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방증이 될 것이니까. 

나는 ‘크랩’을 생각하며 어느 집에나 한 장 정도 있을법한 돌잔치나, 칠순잔치 수건을 떠올렸다. 동시에 어느 병원의 이름이 적힌 볼펜을, 매장이름이 궁서체로 새겨진 라이터를, 회사로고가 정중앙에 박힌 보조배터리를 나는 곰곰이 지켜보았다. 그들은 누군가의 넓은 아량으로 제공된 선물이었는데, 내 손에 쥐어져 개인 영역에 들어온 순간, 그들은 무차별적으로 사유공간을 차지하려는 과잉생산된 한낱 물건으로 변모하고는 그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물건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회사로고에 있음을 여러 차례 과시하며 끊임없는 반복된 커뮤니케이션을 강요했다. 이러한 현상은 무료로 제공받는 재화에 한정된 것만도 아니었다. 분명 아름답게 필요한 물건이었을 매장 속의 상품들은 구매를 이유로 개인 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 식상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목적으로 온갖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한자리를 차지하고 방치되기 마련이다. 반복된 학습과 오랜 경험이 무색하리라 만큼 새로운 물건에 대한 쓸데없는 인간의 욕심을 끝이 없다. 판매자도 이 알 수 없는 대중의 욕심에 대처하기 위해 온갖 크랩을 생산하고 반복해서 사람들이 소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일상에서 흘려보내버린 작지만 불필요한 크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들의 존재가 염가이며, 무료로 제공되었다는 혹은 기호에 의해 수집되었다는 의도로 존재감의 시작이 미약하기에 사람들이 일상에서 지나쳐버린 물건의 가치에 대해 묵인하고 아무런 불평을 두지 않았던 현실에 대해 자각하기를 원하고, 현실에 스며들어간 크랩의 존재를 부각하려 한다. 작가가 속한 미국이라는 나라에 한정하여 크랩의 역사가 어떠한지 그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을 설득하고 부드럽게 괴롭히면서 크랩이 자리 잡게 된 이유부터 차근차근 살펴가지만 그것은 곧 어떤 한 지역의 한정된 범위가 아닌 우리 모두의 그러니까 전지구화된 세계가운데에서 결의 차이만 조금 있을 뿐 동등하다고 볼 수 있다. 생산한 재화를 홍보하기 위한 도구로 시작하던 홍보용 물건들이 역할을 뒤바꾸어 물건을 팔기 위한 미끼로 전락하거나 크랩화된 가치가 호평을 받으며 수집이 대상이 되거나 투자 혹은 또 다른 재판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념을 위한 기념품은 그 가치로 크랩이 되었으며 누군가의 의도에 의한 가짜 상품은 새로운 가치를 얻으며 안 그래도 넘쳐나는 물건 속에 새로운 물건이 되었다. 

사람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정도에 이르면 물건이 사람의 사고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은 아닐까. 개개인이 미디어화된 시대에 서로를 간편하고 쉽게 버리고 사용해 버리는 기저에는 어쩌면 물건(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화상이 담겨있지 않음에 마음이 껄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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