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최근에 화제를 몰았던 ‘우영우’ 신드롬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조금 시기만 늦췄다면 분명 작가는 이에 대한 코멘트 몇 줄 정도는 추가했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종영하고 나서 뉴스를 채운 ‘자폐 아들 살인 후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한 30대 엄마’의 소식이 아무렇지도 않게 미디어를 장식했다. 현실은 그러했다. 조금도 감정의 기복이 없었던 것처럼 무감각하게 대중의 관심을 금세 옮겨버린다. 지역, 나이, 국가, 성별, 장애여부, 근로형태, 성적 지향을 거론하며 작가는 무덤덤하게 미디어에서 그려지고 있는 주류와 비주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한다. 너무 은연중에 스며들어서 그게 잘못된 것인지 옳지 못한 관점이었는지 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미 내면 깊숙이 내재화되어있는 모습에 문득 느끼기는 했다. 그냥 웃고 넘어갈 만한 잠깐의 유희 정도였는데, 그 안에 감춰진 유독물질 같은 유머는 누군가를 짓밟고 뭉개지 않으면 구체화될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한번 곱씹고 넘어갔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만큼 미디어의 위세는 엄청났다. 누군들 그 영향권 아래 없지 않을까? 자신의 순수한 의견인 듯 내세워서 큰소리로 외치지만 그 어느 하나 자신이 내세운 목소리였을까? 어디서 보고 들을 그 소식들이 모이고 조합되어 결국 내 나름대로 정리한 주장이었을 뿐인데 복사 붙여 넣기가 익숙한 디지털 세대의 우리는 자신의 사고마저 주류의 대중이 나아가야 할 미디어의 공식 아래 그들의 논리를 답습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어쩌면 애초에 틀어진 관점이 재생산되어 사람들 속에서 화자 되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콘텐츠들이 생성되고 또 그걸 받아쓰고 복사하는 확장은 너무 당연한 걸 지도 모른다. 오히려 작가와 같이 기존의 룰에서 벗어나 그들을 다시 한번 뒤집어보고 두드려보는 행위는 잘못된 오류처럼 보인다. 깨끗하게 정돈되고 제단 되어 어느 티끌조차 없어 보이는 공간이 감탄을 일으키지만 그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모든 성질을 불규칙과 어지러움을 향해가는데 그것을 구태여 손으로 제한해서 깨끗함으로 돌리는 건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면에 가려진 소수의 입장이 늘 대중과 괴리를 갖고 이따금 생겨나는 깨달음에 잠깐 스쳐 지나가듯 톡 쏘는 감정으로 화제전환를 할 뿐이었다. 민감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비난은 면하고 싶다는 작가의 수수한 고백에 앞서, 어쩌면 힐난을 먼저 두려워해야 하는 미연의 두려움이 앞서는 것도 당연했다. 조금이나마 응원을 더하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다양한 방향에서 다루려다 보니 각각의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카테고리 속에 작가가 다루지 못했던 혹시 이미 지나쳐서 그것조차 차별의 두 음절 안에 속해 있었을지 모를 되돌아보게 되고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우선 무엇보다 이 책을 붙잡고 도통 뭔 소리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나 스스로가 불안했다. 분명 단어와 단어의 연결이 만들어낸 글줄의 생각이 저자의 흔적을 남길텐데, 다섯살의 꼬마마냥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막연한 사고의 반경으로 인해 조금도 그 자취의 흔적을 종잡을 수 없었다. 경위는 다음과 같은 문장 때문이다. (그 많은 당혹스런 문장 가운데 엄선하고 고른 매끄러운 한 구절을 인용드립니다)“위기가 발생해서 경제나 행정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문제 해결에 봉사해야 한다는 정치의 역할은 집단에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들을 협상하기 위한 각축장에서 인용만 될 뿐이다.”독일어는 배우기 어렵다고 익히 들었다. 하지만 독일어로 쓰인 책을 번역했을때 읽기 어렵다고 듣지는 못했다. 이건 전적으로 누군가를 탓할 중요한 근거가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원인을 자진납세한 역자의 후기에서 그 단서를 매우 쉽게 찾을수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이 책의 번역은 결코 쉽지 않았다.” 라고 털어놓으며 그녀의 불안을 토로했다. 과연 “불안”을 주제로 담은 작품답게 당당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역자는 본인감정을 남겨주었다. 역자 또한 이러한데, 독자로써도 그에 호응하지 않는다면 작가에게 매우 애석할 따름이 아니겠는가!나는 이에 11장으로 구성된 각종 불안들을 뒤로하고 차마 더는 견디기 힘든 2챕터는 깔끔하게 포기한채 책을 덮었다.
백화점에서 오랜 기간 일했다는 40대 아저씨의 소비패턴이 담겨있다. 근데, 어디 막힘없이 스르륵 읽히는데 내용 또한 스르륵하고 책을 덮는 순간 사라진다. 시간 뿌시기용 글들에 이만한 책이 없겠구나 했다. 구태여 시간이 없다면 읽어볼 필요까지는 없겠다. 누구든 알고 있고 주변에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회사 선배나 주변 누군가의 성향이 조금씩 섞여있는 그런 에세이기에.
뭔 이런 기이한 제목의 책이 있나 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색상의 기하학 도형이 어우러진 패턴이 더욱 그 기이함을 배가했는지도… 뭔가 홀리듯이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단순했다. 딱히 읽어볼 생각은 없었으나, 방금 전에 읽은 책의 추천서에 이 작가의 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0대라는 남녀의 소비패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래도 남자 작가의 글에는 어느 정도의 가식은 있었다) 서로 다른 작가의 글을 연달아 읽고 있자니, 뭔가 출판사들의 대단한 기획으로 마련된 착각에 (하지만 두 책은 전혀 다른 시기에 출판되었다) 시리즈물처럼 자연스레 읽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분위기에 나는 사로잡혔다. 자본주의에서의 소비는 정말 말 그대로 꽃이다. 마치 한 인간의 삶이 소비라는 (너무 단정 지어 극단적이기는 하나) 공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매일을 그렇게 뭔가를 구매하면서 살아간다. 따지고 보면 매끄럽게 정리된 모든 매체들은 기승전소비로 연결될 정도로 모든 방향이 돈을 쓴다는 한 곳을 향하고 있다. 누가 올린 일상의 포스팅, 누군가 친절하게 남긴 블로그, 헤드라인에 장식된 기사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뭔가 구매를 유도하기 위한 은밀한 계획이 폭발 일보직전의 시건장치처럼 비밀스레 숨겨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결제창으로 넘어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소비를 빙자한 정보들의 수법은 얼마나 교묘한지 분명 주도적인 의지로 결제버튼을 혹은 카드를 내밀었던 자신이 되돌아보면 부끄럽기 마다하지 않은 한 장면이 되어 카드내역과 함께 청구될 뿐이었다. 근데 어찌나 신기한지 그런 기이한 감상은 이내 휘발되어 또 다른 과업을 위한 나로 탈바꿈(?)되어 또 소비를 하고 있다. (이거야 원.. 엄청난 패턴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책에서 ‘돈지랄’이라는 비속어로 소비, 그 행위 자체를 하등 취급하는듯하지만 오히려 이에 반기를 든다. “내가 번 돈 내가 쓴다는데 누가 뭐라 할 건가!”하면서 (그래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이자 자유주의 국가이다!) 하등 불분명해 보이고 과소비로 보이는 미련한 행위를 타인의 관점에서는 뭐든 못마땅하다. (이것저것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불편러들은 가르침의 대상을 눈 크게 뜨고 찾아 나선다) 근데 결국 그 잣대를 들이대는 타인 또한 똑같은 소비를 하고는 있지 않을는지. 소비가 주는 교훈은 정말 숫자에 비례하는 것인지, 과거의 나도 너무 많은 쓸모없음을 취하고 버리고 또 구매하는 이상한 경험을 반복했다.(과거형으로 단정 짓지 말자. 현재 진행 중이다) 그 가운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소비하며 겨우 도달한 것 같던 나의 취향은 어찌나 그리 쉽게 바뀌는지 사회가 강요(넙죽 받아들인 나의 잘못입니다)한 유행에 빗대자니 스스로가 너무 도태되어 보여 초라할 뿐이었다. 시대는 어찌나 빠르던지 늘 소비에 둘러싸여 고민하고 고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정작 나의 삶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까지 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할 수 없다는 화석 같은 고대 문장을 새겨 들었다. (그만큼 돈은 우선 많아 봤으면 좋으련만) 소비도 그러하지 않을까 했다. 돈을 쓴다는 소비가 주는 행위는 분명 달콤하고 행복하지만 일회성의 휴지조각처럼 금세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곧, 소비 이면에 가려진 나의 욕망을 더 들여다봤으면 하는 욕망의 부산물이 아닐까. 소유하면서 자리 잡는 감정과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마음이 구체화되어서 소비라는 행위가 이뤄지기에 가장 먼저 행동을 유발했던 나의 시작점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누군가의 소비를 관망하며 우습게 볼지언정 그들은 진심이다. 그리고 노력하고 실패하며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소비를 통해 끊임없이 묻고자 한다. ‘돈지랄’이라는 명백한 소비를 통해서 말이다. 작가도 나도 정말로 소비에 진심인 과거를 오늘을 내일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