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 물욕 먼슬리에세이 1
신예희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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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이런 기이한 제목의 책이 있나 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색상의 기하학 도형이 어우러진 패턴이 더욱 그 기이함을 배가했는지도… 뭔가 홀리듯이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단순했다. 딱히 읽어볼 생각은 없었으나, 방금 전에 읽은 책의 추천서에 이 작가의 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0대라는 남녀의 소비패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래도 남자 작가의 글에는 어느 정도의 가식은 있었다) 서로 다른 작가의 글을 연달아 읽고 있자니, 뭔가 출판사들의 대단한 기획으로 마련된 착각에 (하지만 두 책은 전혀 다른 시기에 출판되었다) 시리즈물처럼 자연스레 읽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분위기에 나는 사로잡혔다.

자본주의에서의 소비는 정말 말 그대로 꽃이다. 마치 한 인간의 삶이 소비라는 (너무 단정 지어 극단적이기는 하나) 공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매일을 그렇게 뭔가를 구매하면서 살아간다. 따지고 보면 매끄럽게 정리된 모든 매체들은 기승전소비로 연결될 정도로 모든 방향이 돈을 쓴다는 한 곳을 향하고 있다. 누가 올린 일상의 포스팅, 누군가 친절하게 남긴 블로그, 헤드라인에 장식된 기사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뭔가 구매를 유도하기 위한 은밀한 계획이 폭발 일보직전의 시건장치처럼 비밀스레 숨겨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결제창으로 넘어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소비를 빙자한 정보들의 수법은 얼마나 교묘한지 분명 주도적인 의지로 결제버튼을 혹은 카드를 내밀었던 자신이 되돌아보면 부끄럽기 마다하지 않은 한 장면이 되어 카드내역과 함께 청구될 뿐이었다. 근데 어찌나 신기한지 그런 기이한 감상은 이내 휘발되어 또 다른 과업을 위한 나로 탈바꿈(?)되어 또 소비를 하고 있다. (이거야 원.. 엄청난 패턴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책에서 ‘돈지랄’이라는 비속어로 소비, 그 행위 자체를 하등 취급하는듯하지만 오히려 이에 반기를 든다. “내가 번 돈 내가 쓴다는데 누가 뭐라 할 건가!”하면서 (그래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이자 자유주의 국가이다!) 하등 불분명해 보이고 과소비로 보이는 미련한 행위를 타인의 관점에서는 뭐든 못마땅하다. (이것저것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불편러들은 가르침의 대상을 눈 크게 뜨고 찾아 나선다) 근데 결국 그 잣대를 들이대는 타인 또한 똑같은 소비를 하고는 있지 않을는지. 소비가 주는 교훈은 정말 숫자에 비례하는 것인지, 과거의 나도 너무 많은 쓸모없음을 취하고 버리고 또 구매하는 이상한 경험을 반복했다.(과거형으로 단정 짓지 말자. 현재 진행 중이다) 그 가운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소비하며 겨우 도달한 것 같던 나의 취향은 어찌나 그리 쉽게 바뀌는지 사회가 강요(넙죽 받아들인 나의 잘못입니다)한 유행에 빗대자니 스스로가 너무 도태되어 보여 초라할 뿐이었다. 시대는 어찌나 빠르던지 늘 소비에 둘러싸여 고민하고 고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정작 나의 삶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까지 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할 수 없다는 화석 같은 고대 문장을 새겨 들었다. (그만큼 돈은 우선 많아 봤으면 좋으련만) 소비도 그러하지 않을까 했다. 돈을 쓴다는 소비가 주는 행위는 분명 달콤하고 행복하지만 일회성의 휴지조각처럼 금세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곧, 소비 이면에 가려진 나의 욕망을 더 들여다봤으면 하는 욕망의 부산물이 아닐까. 소유하면서 자리 잡는 감정과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마음이 구체화되어서 소비라는 행위가 이뤄지기에 가장 먼저 행동을 유발했던 나의 시작점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누군가의 소비를 관망하며 우습게 볼지언정 그들은 진심이다. 그리고 노력하고 실패하며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소비를 통해 끊임없이 묻고자 한다. ‘돈지랄’이라는 명백한 소비를 통해서 말이다. 작가도 나도 정말로 소비에 진심인 과거를 오늘을 내일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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